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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투로부터의 자유 (삼상 1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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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로부터의 자유 (삼상 18:6-16)

[데이비드 J. 리버만(David J. Lieberman)]이라는 사람이 쓴 책 중에<나에겐 분명 문제가 있다(Instant Analysis)>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저지르기 쉬운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소개해주고 있는데 무려 일흔 일곱 가지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은근히 즐거워한다>그리고<일을 대충 처리하고 다음에 한다>,<단순한 일도 복잡하게 처리한다>그리고 마지막 일흔 일곱 번째가 뭐냐 하면<틀린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주장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이미 익숙한 것에 매여서 그 생각을 도무지 바꾸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책 제목대로 내게 분명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성숙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버릴 것은 버리고 바꿀 것은 바꾸어야 되는데 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나 가장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남이 잘되는 것은 속이 쓰리고 남이 잘 못되는 것에 은근히 즐거워하는 질투의 감정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찌꺼기입니다. 사실 질투나 시기의 감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감정에 빠져 살아갑니다. 여기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인[살로비(P.Salovey)]박사는 미국에서 발생하는 범죄의 20%이상이 질투 때문에 생긴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질투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질투의 특성 중 하나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거의 질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어떤 농부가 농사를 잘 지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질투하겠습니까? 회사원이 같은 동네의 식료품점이 잘된다고 해서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나와 다른 일을 하거나 나와 상관이 없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는데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는 질투가 일어나는 것이고 또 하나 가까운 관계에 있을수록 질투는 더욱 거세다고 합니다. 부부관계, 애인관계, 친구관계에서 가장 많이 질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질투의 임상학>이라는 책을 저술한[화이트(G.White)]박사는 이혼한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갈라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질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십중팔구는 열등감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네가 나보다 더 많이 공부했다고? 그래 나는 못 배웠다 어쩔래?','네가 더 많이 가졌다고 날 무시하나본데...','시집 올 때 혼수를 많이 해왔다 이거지'하는 식의 열등감에서 질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무리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다고 해도 나름대로 거기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허허거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괜히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 스스로 열등감을 가지고 사는 게 문제지요. 

그런데 보세요. 사람이란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의 결함을 질투로 바꾸어서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분발의 동기로 바꾸어서 행복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부족한 것이 언제나 실패가 아니요, 모자라다는 것이 항상 불행은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관계의 문제입니다. 아무런 관계없이 살아갈 수는 없단 말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는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질투로 얼룩지거나 시기로 물들어서 늘 싸움터가 된다면 이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투의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길 수는 있어야합니다. 

질투의 특성 두 번째는 질투의 희생자는 항상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질투심이 생겨서 남을 미워하기도 하고 방해도 해보지만 결국은 자기 손해로 끝나는 것이 질투입니다. 

이런 재밌는 우화가 있습니다. 한 농부가 염소와 나귀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무거운 짐을 묵묵히 잘 나르는 나귀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염소는 시기와 질투를 느껴 나귀를 해칠 계략을 꾸몄습니다."나귀야, 주인은 네게 힘든 일만 시키니 너처럼 억울하고 불쌍한 동물도 없을 거야 내가 한 가지 꾀를 가르쳐주지."염소는 나귀에게 속삭였습니다."짐을 싣고 개울을 건널 때 자꾸 넘어지렴. 그러면 주인은 네 몸이 쇠약한 줄 알고 다시는 힘든 일을 시키지 않을 거야!"그래서 그날부터 나귀는 개울을 건널 때 일부러 계속 넘어졌습니다. 주인은 평소 건강하던 나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의사를 데려왔습니다. 의사가 나귀를 살피다가"나귀의 기력이 약해졌으니 염소의 간을 먹여야 될 거 같습니다. 아마 그러면 금방 회복 될 거요."하고 일러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질투에 희생된 것은 염소 자신이었습니다. 남이 칭찬 받는 것을 못 봐준다거나,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겠다는 심보가 결국 나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입니다. 질투하다가 결국 자기가 망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올 때 길거리에 모인 여인들이 환영하며 노래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노래가사가 문제입니다."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이것이 화근이 됩니다. 가끔씩 보면 여자들이 하여간 속이 없습니다. 사울이 왕인데 그 앞에다 대놓고 노골적으로 다윗이 훨씬 매력적이다 그러면 좋아하겠어요? 이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던 사울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다윗이 많이 컸구나. 이제는 이 나라를 삼키겠구나."하는 감정을 드러냅니다. 그 속내는'이 놈이 왕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겠구나.'라는 뜻이지요. 다윗이 그런 마음을 먹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열등감에 그런 판단을 해버리고 맙니다. 이때부터 사울의 전 생애가 달라지고 왜곡되는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실 원래 사울은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재주도 있고, 재능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외모로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예의도 있었고, 겸손하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장점들이 다윗을 항하여 질투의 감정을 쏟아놓기 시작하면서부터 퇴락하기 시작합니다. 질투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밤낮으로 질투의 대상만 생각합니다. 일상이 무너져서 삶의 균형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각해지고 맙니다. 9절에 보면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그날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일평생 동안 다윗을 질투하는 그 늪에 빠져 살았다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보세요. 질투로 인해 어찌나 감정이 격했던지 자기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다윗을 향해 창을 던져 죽이려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그것도 두 번 연속적으로 던졌지만 다윗이 피해서 목숨을 건집니다. 

11절에 나옵니다. 삼상24장에 가면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도 다윗이 가까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윗을 잡으러 쫓아갑니다. 지금 국가적인 전쟁을 하는 임금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질투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이성이 마비되어서 내가 해야 할 삶의 의무를 저버리고 내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을 온전히 다 빼앗겨 버리고 맙니다. 

결국 다윗을 질투했던 사울의 최후가 어떻게 됩니까? 점점 지혜가 없어집니다. 능력도 잃어갑니다. 전쟁에도 패하고 적군 앞에 포로가 될 무렵 옆에 있던 병사의 칼을 빼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무력한 왕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질투는 결국 나를 파멸시키는 것이요, 나를 죽이는 죄악입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 악사였던[안토니오 살리에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음악가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린아이에 불과한 한 소년을 만납니다.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 젊은 음악가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엄청난 질투에 빠집니다. 사실[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음악 실력도 훌륭했고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투에 빠져서 그 장점과 은사를 더 이상 계발하지 못하고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나중에[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모차르트]를 질투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저주합니다."하나님! 모차르트에게는 저 재능을 주시고 저에게는 주지 않았습니까?"결국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립니다. 

질투가 문제입니다. 질투의 화살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그렇게도[모차르트]를 질투한 반면,[모차르트]는 자신의 후배인[베토벤]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이 사람을 주목해서 보라. 그는 세계 음악사에 남을 놀라운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해서 오히려[베토벤]을 세워 주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태도입니까? 

또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슈만]도 아주 탁월한 재능을 가진 후배 작곡가[브람스]를 만났을 때[슈만]은 이 후배를 칭찬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를 데뷔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씁니다. 그리고[슈만]이 노후에 정신병으로 고통스러운 여생을 보내게 될 때[브람스]는 자기를 사랑해 주고 아껴 주었던 선배[슈만]의 남은 생을 책임지고 마지막까지 돕는 아름다운 우정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멋진 인생입니까? 

여러분, 질투하기 시작하면 나에게 있는 가능성마저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질투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가진 것을 먼저 볼 줄 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남이 가진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살면 됩니다. 내 가능성을 보란 말입니다. 이걸 계발하지 못하고 남과 비교해서 스스로 파멸해가는 것이 질투입니다. 내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따라 내가 쓰임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이 있지요"멥새가 황새 따라 가려다가 다리 찢어진다."거기서 만족할 줄 알고 거기서 행복을 찾으면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 기대하시는 나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많은 가능성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질투라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결국 하나님이 떠나버렸던 사울은 정말 우리가 닮지 말아야 할 인간상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울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질투라는 감정에 매여서 자기가 망해 가는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이건 불행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거기에 감사하며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기뻐하며 축하하면서 살아갈 때에 질투로부터 자유 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나가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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