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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신앙으로 시대를 변화시키자!! (막 16: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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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으로 시대를 변화시키자!! (막 16:14~18)
 
요즘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가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사회가 흔들 때마다 교회는 비명소리를 내고, 격앙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수치를 당할 때 성도로서의 아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교회를 조금만 흔들어도 왜 그렇게 요란한 소리를 내는지는 한 번 숙고해볼 일입니다. 한 때는 교회가 이 민족의 정신적 길잡이로, 그리고 조국 근대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머리 잘린 삼손처럼 외형만 비대한 체 능력을 상실한 모습이 이곳 저곳에서 보여지는 안타까운 현실에 안주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아픔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붙들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나 성도들은 정말 어느 순간보다 부활의 능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부활 신앙의 담력을 가지고 세상 앞에 나갈 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한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의 일을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수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처음에는 그들이 잘 믿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들의 모습이 한심스럽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합니다.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금세 보고 나서도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호되게 닦아세웁니다. 여기 14절에 보면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여러분, 왜 이처럼 믿음 없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고 심지어 마음이 완악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요20:19절에 보면 이들은 지금 심각한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의지하고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고 난 그일 후에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도 유대인들에게 잡혀 비참한 자리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생존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엄습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 마음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마음이 완악한 자리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런 인생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니면서 은혜를 주시고 주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이들을 쓰시겠다고 그 고통 그 아픔을 감수하시고 그들을 양육하셨는데 이제 자신들에게 부활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던, 그 부활이 현실로 드러났으면 두려움에서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기쁨을 가지고 증인으로 담대하게 서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느 누구하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얼마 전에 신문에 보니까 공군 조종사 한 사람을 양성하는 데 사관학교 4년을 마치고 정식 F-16 조종사 한 명이 양성되는 데는 무려 28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것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을 뽑는데 한 기수 당 100여명 정도가 뽑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또 28개월 간 훈련을 하는데 거기서도 반수 이상이 탈락을 한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20% 정도인 14-5명 정도가 F-16조종사가 되는데 그 한 사람을 훈련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15억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든 게 조종사들입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세상에 뛰어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당신의 제자들과 여기 모인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두려움에 떠는 저 초라한 제자 한 사람의 가치는 얼마짜리 가치가 있습니까? 뭐, 돈으로도, 물질로 도저히 따질 수가 없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제자들이 아닙니까? 조종사 한 사람을 양성하는데도 그처럼 엄청난 돈과 희생이 들어가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습니까? 그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있나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무덤덤하나요?

탕자였던 어거스틴은 어느 날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너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노라. 나는 내 생명보다 너를 더 사랑하노라. 십자가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 없이 너를 사랑하노라." 그리고 그 사랑을 아낌없이 우리 각자에게 쏟아 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에 대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시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그 이유가 하반 절에 무엇 때문이라 했습니까?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부활 신앙은 우리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기 보세요. 지금 마음마져 완악해져 있는 제자들을 주님께서 호되게 닦아세우면서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말고 담대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여기 15-18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무슨 말입니까? 이제 더 이상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면 먼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증거한 복음의 위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복음 앞에 인생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게됩니다. 17-18절을 보면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말씀을 받는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11명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그 당시에 무시당하던 갈릴리 지방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또 그들이 사역을 감당할 현장은 너무도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를 십자가에 내 몰아 죽게까지 한 정말 무서운 세상이 아닙니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미 악한 권세를 짓밟고 승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을 보아도 신통치 못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현장을 보아도 악하고 무서운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난제를 푸는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 같은 별 수 없는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key가 부활 신앙입니다. 이 악한 세상을 다룰 수 있는 열쇠가 부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부활 신앙의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부활 신앙의 능력을 받으면 우리는 강해집니다. 얼마만큼 강해집니까? 예수님만큼 강해집니다.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받으면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어두워도 우리 앞에 대적하지 못하는, 적수가 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부활 신앙이 key입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의 기간을 보통 약 30년으로 잡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제일 처음 등장한 교회의 교인 수는 몇 명입니까? 120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약 30년이 지난 후, 사도행전의 기간동안 예수 믿고 돌아온 모든 성도들의 숫자를 학자들은 10만 명으로 어림잡습니다. 30년 사이에 120명의 갈릴리 촌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사마리아를 넘어 헬라권에 이르기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능력을 입은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담대하게 나가 증거한 열매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들과 초대교회 사람들이 마신 우물물을 똑같이 마셔야 됩니다. 이 시간 우리도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뜨겁게 증거하며 살아가는 열정이 일어나야 합니다. 아-멘

이제 주님은 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놀라운 4가지의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첫째로 영적 권세입니다. 17절에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빛이 임하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악한 영(사단, 귀신)을 ?아 내는 권세가 있습니다. 저의 애송이 목사 시절의 간증입니다. 휴가를 가지기 위해 강원도 명주골에 있는 베데스다 기도원에 가게 되었는데 참 희한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첩첩 산중인데 강릉행 버스를 타고 거기서 시외뻐스를 타고 산길을 오르는데 하루 길입니다. 여름인데 5시가 넘었는데 주변이 환한 시간에 기도원 방 하나를 얻어서 짐을 풀고 있는데 몇몇의 청년들이 "여기 목사님 안 계세요?" 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신분을 밝혔더니 다짜고짜 나를 이끌고 가는 거예요. 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친구가 지금 귀신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이 방법 저 방법 해보다 안 되어서 기도원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반드시 귀신을 쫓아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당황스럽더라구요. 피곤도하고 기도 준비도 안 했는데 어떨결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 보니까 귀신 들린 청년이 의자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보자 마자 웃어요. 제가 참 잘 생겼잖아요. 저는 그래서 좋아서 웃는 줄 알았죠. 그런 나를 웃으면서 보더니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너, 목사 맞아!!"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데 잠시 앞이 안보이고 또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도 나를 다시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바짝 정신을 차리고 주님한테 기도했어요. "나는 하나님 약합니다. 이 시간부터 주님의 보혈로 나를 덮어 주시고 성령의 인도로 역사하게 해 주세요." 뭐, 그 때부터 한바탕 하는데 그 관동대 학생에 들어가서 작용하는 귀신과 3시간 이상 정말 피 말리는 싸움을 했습니다. 그러다 쫓겨나가게 된 것이죠. 파란 냄새가 역겨운 거품을 쏟더니 푹 고꾸라집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은 사람을 외적으로 그렇게 결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 등을 통해서도 교묘하게 활동합니다. 우리에게 걱정, 근심, 두려움, 미움, ...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유발시키고 충동질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잘못된 길로 빠지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그런 것들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새 방언을 하게 됩니다. 17절에 '새 방언을 말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행2장에 보면, 오순절 날 성령강림 때 성령 충만 받은 제자들이 방언을 하지 않습니까? 당시 성령의 역사가 "불의 혀같이 갈라졌다"고 했는데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굳어졌던 혀가 풀려졌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입이 열려집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기 전에는 복음전파의 혀가 굳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저들의 혀는 서로 높은 자리를 탐하는가 하면 예수가 잡힐 때에는 도무지 모른다고 부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그것을 전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저들의 입이 달라졌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자리에 서서 세상 앞에 담대하게 죽음을 무릎 쓰고 저들이 죽인 예수가 구세주라는 말을 거침없이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 제자들의 말에 3천명이, 5천명이, 허다한 무리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나면 기형적으로 굳어진 혀가 풀어집니다. 닫혀진 입술이 열려집니다. 그 혀로 기도하게 되고 그 혀로 기뻐 찬양하게 됩니다. 이웃을 축복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 생각지도 못했던 말과 기도가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은 곧 입술의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어찌 그 뿐입니까? 새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밤새 방언으로 기도해도 피곤한 줄 모르고 기쁨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방언은 사람을 살리는 언어입니다. 힘들어도 격려할 줄 알고,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삶 속에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새 방언인 것입니다.


세째로 안전 보장을 해줍니다. 18절을 보면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 하며" 행28장을 보면 바울이 멜리데 섬에 갔을 때 불을 쬐면서 나무 한 묶음을 불 위에 얹어놓는데,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말짱하니까 원주민들이 깜짝 놀라 신이라고 부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원주민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환경 오염으로 심각한 독을 먹고 마시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명 가지고 믿음으로 살 때 내 인생을 그 분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만 뜨면 얼마나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이러납니까?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사명을 위해 부름 받은 우리 인생을 물이 범람해도, 불이 휘감아도 그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아-멘.


넷째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8절을 다시 보면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요즘 보세요. 얼마나 많은 질병이 있습니까? 현대 의학이 그렇게도 발달하고 최신 연구가 쏟아지고 불치의 병으로만 알던 환자를 고치는 최첨단의 현장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현대 의학이 손도 못 대는 원인을 알수 없는 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 전인가요, 어느 방송국에서 특이한 병을 충격으로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프로제리아(Progeria)'- 길포드 증후군(Gilfordn Syndrome) - 라는 병이었어요. 아마 사람 이름을 딴 병명 같습니다. 이 병은 아이들에게만 생기는 병이었어요. 성장을 멈추는 병이지요. 그러나 신기한 것은 성장이 멈추는 것에 반해 세포조직은 빨리 늙어버리는 겁니다.

그 당시 TV에서 이 병에 걸린 아이들과 부모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참담했어요. 한 아이를 집중하여 조명하였고,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아이의 몸집이 유치원생인 6살 정도 되어 보였어요. 그러나 얼굴은 40대였어요. 이 아이들은, 성장은 멈추지만 급속도로 세포조직이 빨리 늙어가서 대부분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그 아이 부모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몸집은 자라지 않고, 모든 기능은 빨리 늙어서 자신들보다 먼저 죽어 가는 아이를 둔 부모,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부모의 심정! 그 날 방송에 나온 부모들은 한결같이 흐느껴 울었어요. 저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같이 울었어요. "세상에 저런 병도 있구나, 정말 처참한 병이구나!" 만약 그 병에 여러분의 자녀가 걸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 아이가 18세가 다 되어 가는데 몸집은 초등학교 2학년만 하고 얼굴은 저보다 더 늙었어요. 이제 2년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떨까요? 이처럼 질병에 무게에 눌려 신음하는 인생에게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이십니다. 라파라는 말은 '고친다' '치료한다'라는 뜻입니다. 옷이 찢어지거나 헤졌을 때 고치고 수선하는 것이 라파입니다. 집이 낡고 비바람에 파손됐을 때 손을 보는 것이 라파입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해서 낫게 하는 것도 라파입니다. 그러니까 라파란 고쳐서 온전케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가진 인생에게 주님은 치료와 회복의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연약한 신앙이 아니라 담대하고 굳센 신앙입니다. 악한 마귀와 싸워 승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명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융은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기적을 믿지 않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적도 믿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기적을 믿으면 사업에도 기적이 나타나고, 건강에도 기적이 나타나고, 가정생활에도 기적이 나타납니다. 5세기 북아프리카의 성인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적이 없다면 나는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성령님께 붙잡혀서 부활 신앙을 가지고 담대하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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