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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러 왔노라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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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러 왔노라 (막 10:35~45)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께서 당선 후 국민과의 첫 약속을 “나는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약속대로 한다면 역사에 길이 빛나는 지도자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언제나 정치 지도자들이 비판 받아온 부분이 국민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출세, 권력만 생각해서 처신을 하기 때문에 국민의 원망을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우리나라의 대표적 정당이 지금 세 개라고 생각됩니다. 16개 정도의 정당이 있지만 유명무실한 당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표적 정당의 최고 지도자들이 1년 전만 해도 같은 당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국민들의 소원은 같이 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 이리저리 갈라져 각각의 당 지도자가 되니까 국민들의 마음이 이리저리 다 갈라져 버린 겁니다. 이것은 국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섬김에는 희생이 따라와야 됩니다. 욕심은 절대로 섬김이 아닙니다. 우리 교인들이 2008년 1년 동안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야 되는 연초에 오늘 말씀으로 우리가 영적 무장을 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느 사회나 조직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공동체 사회라고 부릅니다. 어떤 공동체가 훌륭한 일을 하면서 잘 발전해 간다는 것은 그 공동체를 운영해 가는 사람들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결정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국가 공동체를 비롯해서 아주 작은 그룹에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예수님도 공동체를 구성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끌어갈 사람을 열두 사도로 선택하셨습니다. 

기본적으로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제일 처음 구성하시고 운영하신 그 제도를 본받아서 거의 똑같은 성격으로 교회가 운영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 구성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선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적 제자 선택입니다. 그들이 바로 열두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교회를 운영해야 하는 방법과 해야 할 일을 가르치셨고 훈련시키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봉사적 제자 선택입니다. 열두 제자가 있었지만 그들만 가지고는 교회가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12사도가 그 사도적 직무를 다하는데 필요한 협조적 사역자들을 두심으로, 이 두 가지의 조화가 하나님 나라 확장에 가장 큰 도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 이하에 읽어보면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바로 이 사람들이 사도적 제자들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이 부분은 봉사적 성격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두 성격의 제자들의 조화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훌륭하게 이끌어감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이 이 세상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교회는 거의 이같은 제도를 따릅니다. 사도직 제자 성격으로는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영적 계시의 소명을 받은 자로 정규적 훈련을 마치고 말씀 전함과 성례전을 집례하고 교인들의 모든 문제를 위해서 일을 하는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만 가지고는 교회를 운영할 수 없습니다. 사도직 제자들에게 협력하는 평신도 제자의 집사라는 제도가 초대교회에서부터 생겨서 지금도 똑같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조금씩 헌법에 차이가 있지만 모든 교회들은 교회 운영을 위해 대표 대의원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 기관의 제도와 똑같은 철학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온 국민이 한꺼번에 모여서 나라 일을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즉 대표를 뽑아서 나라의 운영을 맡김으로서 훌륭한 나라 건설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본적 신앙 철학을 설교하심으로 우리 교회 일꾼된 자들은 이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잘 운영해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받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러분이나 저나 똑같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신앙 철학을 오늘 말씀에서 몇 가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첫째로, 하나님의 일은 기회가 왔을 때 사양하지 말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자의 철학으로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되는 사람이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나는 이 나라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해 나갈 것을 하나님과 국민 앞에서 약속합니다.” 그런 뜻입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이것이 우리 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일을 우리 생애에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때가 있고 거두시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항상 건강하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서 조사했더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현미경으로 봐야 보이는 점 하나가 내 몸에 생겼다고 심각하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생각됩니까? ‘인간의 생명이 이렇게 간단한가?’ 그런 어려움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나에게 지금 건강이 주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진리입니다. 이 기회를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물질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내게 있는데 내일은 누구 손에 넘어갈지 알 수 없습니다.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이 은퇴를 합니까? 때가 지났다는 말입니다. 여기 지금 은퇴하신 선배 목사님들이 여러분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인데도 주시는 때가 있는가 하면 이젠 그만 하라고 거두시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헛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목사님! 내가 돈 많이 벌면 하나님의 일 많이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돈도 안 생기거니와 생겨도 안합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재정이 부족했습니다. 수백억짜리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이민자들이 어렵게 사니 쩔쩔 대며 저는 너무 급해서 이런 기도도 해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인들 돈 많은 집을 영적으로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렇게 쩔쩔 매는 소리도 하고 교인들에게 호소도 하며 교회 건축을 했는데, 그때 제가 제일 많이 들은 소리가 또 이겁니다. 

휴가를 떠나면서 “목사님! 내가 이번에 라스베이거스로 휴가를 갑니다. 가서 대박나면 다 건축헌금을 드리겠습니다.” 이 소리를 제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단 한 사람도 가지고 온 사람이 없습니다. 건강, 재물, 은사 모두 거둬갑니다.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찍어 불에 던져 사르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셨을 때 해야 합니다. 예수 믿은 지가 몇 십 년인데 십일조 드리는 것을 아직 결정을 못합니다. 어느 교회나 십일조는 교회의 25퍼센트 정도 밖에 안 됩니다. 75퍼센트는 안하는 실정입니다. 기회를 주셨을 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지나가니까요. 건강도 없어지고 재물도 없어지고 은사도 없어집니다. 하려고 할 때는 늦습니다. 

두 번째로, 봉사는 교회에 유익을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 지금도 우리가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자도 교회 직분자들이요, 교회를 망치는 사람도 직분자들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맡기신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해서 하신 일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훌륭하게 해나가라고 하십니다. 바울 신학에서 “교회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기업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직분자들이 잘못하면 주님의 몸은 깨어지고 상처 나고 주님의 기업은 망하게 됩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실 때 분명한 소유권을 정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러므로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는 다 주님의 소유입니다. 누가 헌금을 해서 누가 건축을 했든지 아무 상관이 없이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는 집권자들의 잘못된 인식이 교회에 문제를 가져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세례 요한과 주님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깜깜한 암흑기 시대에 예언자의 소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광야에 나타난 예언자의 소리가 들려왔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모든 사람이 그 소리가 나는 요단강으로 몰려가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바라보기를 “아! 이는 분명히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메시아의 출현이다!” 그렇게 요한을 바라봤습니다. 요한이 “아닙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요?” “하늘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요?” “메시야의 길을 닦는 것입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십니다. 그가 메시야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몰려갔던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다 몰려갔는데 누구까지 갔느냐? 평소 요한의 제자들까지 예수님께로 다 몰려가고 광야의 요한은 외로이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요한에게 가서 말을 겁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마저 다 예수께로 갔나이다. 이 광야에 당신은 외롭고 쓸쓸이 혼자 남았나이다.” 그때 요한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쇠하고 교회는 흥해야 합니다. 그게 교회 직분자입니다. 대통령이 될 사람도 “나는 쇠하고 나라는 흥해야 한다.” 이런 철학이어야 합니다. 나라와 교회는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입장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도 혼란하고 교회도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내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을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심각한 기도를 겟세마네에서 드렸습니다. 얼마나 고민했는지 그 기도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입니다. 인간적 측면에서 예수를 바라보면 그는 실패자요, 싸움에서 졌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요. 그런데 그 실패가 기독교의 참 진리가 되는 패러독스 진리! 여러분, 예수는 지면서 믿는 것입니다. 손해 보면서 사는 교인, 쫓겨나는 신자! 괜찮습니다. 참 기독교의 진리는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12사도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 지금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우리 두 형제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초등학생이라도 다 기억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 나라의 왕이 되시는데 두 번째의 권력과 세 번째의 권력을 우리 형제들에게 주옵소서.”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이런 요청을 할 수 있었는가? 공로가 있습니다.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의 공동체를 위해서 돈을 제일 많이 썼습니다. 

또, 예수님과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이종 사촌간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마음은 요한을 제일 사랑하시는 것이 표출 되었습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안가! 우리 두 형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야! 지금 다른 제자들 앞에서 결정해 놔야 돼! 예수님, 그렇게 선언해 주세요.” “무엇을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혹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네가 거기에 매력이 있어서 그것을 원하기 위해서 나에게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이냐?” 그래서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너희들이 나의 대를 이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일하라고 3년 동안이나 이렇게 교육을 시켰는데 오늘 와서 정 반대의 결론을 나에게 가지고 왔느냐? 내가 가는 길은 네가 생각하는 길의 정 반대이다. 어떻게 하겠느냐?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고 내 목숨까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그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냐?” 우리 교회 직분자들은 섬기려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섬기기 위해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만약 갈보리교회 교회 교인이 만 명이라고 한다면 저는 만 명 모두를 섬겨야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교회에서 간증 집회를 잘 안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도 많이 해서 안 세웁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현역 장군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한번 기회를 주시면 간증하겠습니다.” 그래서 수요예배를 한번 해보시라고 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한국의 수만 명 모이는 교회의 집사님이시더라고요.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제가 나가는 교회 목사님께서 어느 날 광고를 하셨습니다. 내용이 뭐냐 하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들은 교회에 와서는 섬기십시오. 사장이라든가 장군이라든가 권력의 자리에 있다든지 어쨌든 사회에 나가면 누군가는 나를 많이 섬겨주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니까 교회에 와서는 정 반대로 섬기십시오. 자발적으로 하십시오. 쓰레기 치우고 교인들을 위해 깨끗이 청소하고 주차장 관리하십시오. 하든지 말든지 그렇게 광고를 하셨기 때문에 저도 사회에 나가서는 부하들이 천명이 넘는 장군이기 때문에 열심히 섬기고 저희 교회는 부총리까지 나와서 청소를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봉사’라는 단어의 성경의 원문 해석은 ‘노 젓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는데 그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잘못 될 때 예수님은 뭐라고 선언하셨습니까? “차라리 너는 세상에 나지 아니하였다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직분은 거룩하고 소중한 의미가 있는데 자기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행할 때는 “하지 마라. 네가 함으로 오히려 교회가 더 고난스러워진다. 너는 항상 그런 생각밖에 못하냐? 차라리 직분자가 되지 아니하였다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이것이 우리 기독교가 걸어온 역사입니다. 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희생이 따라와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일은 매우 즐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섬기는 자를 더 귀하게 보십니다. 왜 국민 지도자가 되느냐? 국민을 섬기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우리 가정에서도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식들을 섬기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요즘의 아이들이 얼마나 매스컴이 발달해서 참 영리하고 어른 세계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안했다가는 아이들에게 부모님들이 금방 책잡힙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과 길을 가다가 배고파서 호떡을 5개 샀다고 합니다. 아들을 2개 주고 자기가 3개를 먹었답니다. 말이나 하지를 말지 아들에게 “배부르지?” 아들이 속으로 대답했답니다. ‘2개 먹고 배부르면 3개 먹은 놈은 배 터지겠다.’ 

우리 교회에는 21명의 사도직 성격의 제자인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집사님, 권사님들은 수백 명이 되십니다. 여기에 대한 조화를 잘 이룰 때 하나님은 그 공동체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 사도직이나 봉사직도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물러나야 됩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교만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 공동체나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물러가고 다른 목사님이 오시면 이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잘될 것이다.’ 어떤 목사도 나보다 훌륭하게 목회할 것으로 저는 믿고 그렇게 마음을 늘 정리합니다.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하고 물러날 때는 조용히 가는 것이 우리 직분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만이 흥하고 영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 선생을 보세요. 그렇게 훌륭한 일을 그렇게 크게 하면서도 항상 고백하는 말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요, 사도 중에는 지극히 작은 자, 꼴찌요” 이렇게 생각하지 아니하는 한 교회도 어지러워집니다.

저보다 일 년 후배 목사 한명이 어떻게 목회를 잘하는지 교인들에게 굉장한 존경을 받습니다. 교인들이 어떤 때는 주님보다 목사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기침만 해도 “아멘, 아멘”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여보쇼! 어떻게 목회를 했기에 교인들이 그렇게 목사를 좋아하는 겁니까? 교인들은 입만 벌렸다 하면 목사님 자랑을 하고 목사님 아니면 죽을 것 같이 하니, 어떻게 목회를 한 거요? 무슨 비결이 있을 거니 한번 말해 보시오.” “아니, 선배님은 나보다 더 존경받으면서 괜히 그러세요?” “아니야! 당신 틀림없이 뭐가 있어! 한번 이야기해봐!” 그랬더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선배님! 나는 중학교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를 못 갔습니다. 그런데 사회 취직도 안 되니 어떡합니까? 교회 사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청소년 시절은 10년 동안 교회 사찰 일을 하면서 교회가 주는 작은 월급을 가지고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사찰 일을 10년 동안 하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오면 무엇을 원하는지, 교인들의 소원이 뭔지, 필요가 뭔지….” 사실 교회 사찰하기 굉장히 힘듭니다. 왜냐하면 다 사장이니까요. 어떻게 된 거냐고 막 따지고 야단치고 그러니까 참 힘듭니다. 웬만큼 믿음 좋지 않으면 감당하기 힘듭니다. “나는 10년 동안 그렇게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 일을 맡겨주신 것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서 교인들의 성격을 다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명을 주셔서 이렇게 목사가 되었는데 지금 목회 방법은 하나입니다. 나는 이 교회의 사찰이라고 생각하고 합니다.” 사람이 초심을 지킨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초심을 지키면 훌륭하게 됩니다. 내가 믿음이 가장 좋았을 때! 저는 초심이 있습니다. 개척교회 할 때 교인 한 사람만 들어와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새벽기도에 아무도 안 나와도 새벽기도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전기방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추운 겨울에 난방시설 하나도 안 되어 있는데 나 혼자 나와서 새벽기도 하려니 너무나 춥고 교인이 좀 있으면 신이 나겠는데 혼자서 하니 그래서 전기방석을 깔아놓고 혼자 기도하다가 잠드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나오면 그대로 자는데 바깥에서 뚜벅뚜벅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러면 번개같이 일어나서 잠 안자는 척 하느라고 “주여!” 그랬습니다. 이것이 저의 목회 초심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지 말자! 그때 나를 잊어버리지 말자!’ 

여러분, 가장 가난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돈 좀 벌면 주님 앞에 충성하겠다.’ 그래서 저는 그 후배 목사에게 “당신 그 초심 잊어버리지 마라! 사찰로 교회를 섬길 때 그 마음을 당신이 그대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기에 내가 너희를 3년 동안 훈련시킨 것의 정 반대 요청을 나에게 하고 있다.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기 위해서? 그러면 3년 동안의 봉사는 그 목적을 위해서 나를 따랐느냐?” 이렇게 되었지요? 내가 왜 집사가 되었는데? 내가 그 나이에 권사가 되어서 지금 뭐하려고 하는 건데? 여러분, 초심을 지키면서 우리 일 년 동안 주님의 몸된 공동체를 위해서 훌륭한 봉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이 말씀의 조명을 저희들이 잘 깨닫고 아버지가 주신 일 년이라고 하는 이 행복한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기뻐하실 수 있는 헌신적 봉사를 하면서 저희들이 일 년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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