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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절 그 이후 (시 16:1-11, 벧전 1:3-9,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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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그 이후 (시 16:1-11, 벧전 1:3-9, 요 20:24-29)

1. 우리는 지난 주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대림절부터 오순절에 이르기까지 교회력의 황금시즌인 사순절 가운데서도 피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아직 기독교 역사가 연천한 우리들에게는 부활절이 그날 하루만 지키는 의례적인 절기이지만 서양에서는 부활절이 성탄절 못지않은 교회절기로서 매우 성대하게 지켜집니다. 부활절 휴가까지 있습니다. 그만큼 서구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뿌리가 깊은 반면 우리들의 신앙은 겉으로는 꽤 열심이 있는 것 같으나 우리 의식이나 생활 깊이까지 파고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부활소식을 듣고 모여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주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고, 십자가 형장의 끔찍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비밀리에 모이고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숨조차 죽인 체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항상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나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은 그때 나를 찾아주십니다. 우리 교회가 힘들 때 그때 주님은 우리 교회를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웠을 때 주님은 이 민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이 저들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1) 요21;19에 “예수께서 오사 저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샬롬을 선언하셨습니다. 그것도 두 차례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의심은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마28: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위해 감람산에 모였을 때까지도 제자들 가운데는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직도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못 박히신 손과 창으로 찔리신 옆구리를 보여주시니까 비로소 우리 주님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파송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회개했을 때 제자로 삼으신 주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했을 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믿었을 때 그들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파송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숨을 내쉬셨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이 이토록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그날 제자들 가운데 도마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 그 상하신 손과 옆구리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 도마의 마음에 갈등과 안타까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할 때 그것은 물론 도마의 불신앙에 관한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제자들이 그 놀라운 부활주님을 만나 뵙는 그 자리에 빠진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래서 나온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날 도마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로서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놓친데 대하여 얼마나 후회하고 애통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여러분은 교회 출석하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은 우리가 모인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 각 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만나주십니다. 유명한 부흥사 찰스 피니는 불가피하게 교회에 빠질 일이 생겨도 자신이 빠진 그 시간에 다른 성도들만 주님을 만나서 은혜 받을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예배 시간에 빠질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사 다른 것은 남에게 뒤질지라도 은혜 받는 일에는 뒤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일을 포기하더라도 은혜 받는 일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마는 그 다음에 다시 주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그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린 체 주님 앞에 서게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요한복음 본문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그날부터 여드레는 그 다음 주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사적으로 오늘 주일을 “도마 주일(Thomas Sunday)”로 지켜왔습니다. 그날 주님은 제자들의 모임에 다시 오셨습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은 한번만 말씀하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거듭거듭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찬송가에도 “자주 말씀하시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평생에 듣던 말씀(이지만) 또 들려주시오.”라고 합니다. 다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날 그 자리에 빠졌던 도마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일에 도마도 있는 자리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순전히 도마를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나를 개인적으로 아십니다. 개별적으로 만나주십니다. 비록 내가 오늘 여러 사람과 함께 예배드리지만 주님이 나를 찾아오실 때는 무더기로가 아니라 나 개인을 인격적으로 찾아오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예배가 소중하고, 순서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배에 빠지는 것이 엄청난 손실일 뿐만 아니라 늦게 들어온다든지, 중간에 들락날락 한다든지 예배를 다 마치지 않고 일찍 나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례한 일이고, 또 우리 신앙에 얼마나 손해되는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제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과 같이 도마에게도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도마가 이런 주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그 현실에서 만져보고 말고 할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도마의 성격상 아마 손을 내밀어 만져보았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던 의심쟁이 도마가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더 이상 증거가 필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상근 목사님의 요한복음 주석에서는 이 부분 즉 도마의 신앙 고백에서 요한복음은 그 클라이맥스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저자도 요한복음을 기록한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우리가 오늘 요한복음 본문을 주의해서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도마는 주님 승천하시기 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놓친 기회를 만회할 수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항상 오늘 여기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순간순간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부활체를 확인시켜 주시고, 평화를 선포하시고 난 다음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21:22에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매우 상징적인 제스처였습니다. 마치 마지막 만찬 때 떡을 떼시며 “이것은 내 몸이라.”, 또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니라.”고 하신 것과 매우 방불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오순절 날 이루어졌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 모든 것을 확실하게 깨닫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랬을 때 제자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부활에 대하여,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하여 의심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기들의 목숨을 노린다고 할지라도 유대인들이나 당국자들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선두로 하여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법 없는 사람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면서 “어찌할꼬?”라고 외치며 회개하고 세례 받은 사람이 3천명이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주님의 역사였습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3년을 지나면서 그 교훈을 듣고, 그 기사이적의 현장에서 몸소 목격하고, 주님과 더불어 더없이 가까운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는 친히 보고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증언이 얼마나 힘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그 음성을 친히 들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 비하면 오늘 우리 여건은 너무도 불행합니다. 주님 계시던 그 시절, 주님이 거니시던 그 유대 땅에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판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인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음성으로 들려주시던 우리 주님, 그때 부활 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음성으로 들려주신 그 주님은 오늘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생생하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은 아무에게나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택하신 제자들에게만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셔서 온 세상을 향하여 파송하셨습니다. 그 일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언하신 다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해주십니다.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해 주십니다. 이래서 성령 받은 우리는 보고 믿은 제자들과 조금도 못하지 않게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과 꼭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여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은총이요 복입니다. 




3. 오늘 구약 시편16:은 주님의 부활에 관한 예언입니다. 여기 마음도 기쁘고, 영도 즐거워하고, 육체도 안전히 거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하시고,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기 때문에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활의 확실한 증인인 베드로는 그 첫 번째 서신 첫 머리에 “부활”이야말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며,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셨고, 우리도 부활하게 하셔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오늘 이 땅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바로 그들이, 그리고 그 때문에 말세에 예비하신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소망을 가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 때문에 비록 고난이 있고 박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 믿음을 금보다 귀하게 연단시키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도마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부활 그 이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비록 시련이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견디면 우리가 금보다 귀하게 연단되어지고 마침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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