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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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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저희 초청을 받아들여 오늘 교회에 오신 모든 분들을 우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저희와 함께 하는 오늘 이 시간이 여러분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꼭 알려드리고 싶은 것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 좋으신 분이며,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 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 7:9-11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 목숨까지 앗아간 흉악범이라고 할 찌라도 자기 자식만큼은 잘 되기를 바랍니다. 야단쳐서라도 훌륭한 사람 만들고 싶어 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힘써줍니다. 하물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어찌 바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또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피곤하고 고단해도 학생들은 한 자라도 더 보고 익힙니다. 행복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장에서 야근까지 해가며 실적 내려고 열심히 근무합니다. 사업체 제대로 일구기 위해선 입에서 단내 날 정도로 수고하고, 긴장의 고삐 늦출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게 행복하려는 욕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들 행복하려고 무거운 짐 기꺼이 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참 행복합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음은 인터넷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제 687호에 실린 사례입니다. 패션업계에서 근무하는 34세의 최유정씨(가명)에겐 주말을 함께 보낼 애인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받는 연봉도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직장에 대한 불만이 많고 요즈음 많이 우울합니다. 직장 상사가 자신의 능력은 평가절하합니다. 무능력하지만 아부 잘하는 동료는 감싸줍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불이익 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지냅니다.  최씨는 토로합니다. “회사의 인사와 조직 관리는 너무 불합리합니다. 또 남을 짓밟더라도 아부 잘해 잇속 챙기는 동료에 대해 혐오감이 듭니다. 이런 곳에서 일해야만 하는 내가 불쌍하고 내 삶 전체가 엉망이 되는 것 같습니다.”

비교적 탄탄한 기업을 운영하는 43세의 사업가 김성준씨(가명) 이야기도 실렸습니다. 그는 상냥한 아내와 곧잘 공부하는 초등학생 두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사업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안정권에 올라섰습니다. 덕분에 강남의 40평대 아파트에서 여유 있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명성도 얻었습니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게 없는 중년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즐겁지가 않습니다. 부하직원이나 가족에게 내색하지 않지만 불안한 마음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사업이란 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고, 자칫 잘못되면 내 가족은 물론 수십 명의 직원과 그 가족의 밥줄이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김씨는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도 홀로 회사에 남아있는 날이 참 많습니다. 초조해서 그렇습니다. 두 사람 다 행복해보이지 않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모두가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도, 정작 행복하다는 사람 많지 않다니 이 어찌된 영문입니까? 2006년 7월 12일, 영국의 신경제학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은 국가별 행복지수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한국은 102위였습니다. 81위의 독일이나 95위의 일본보다는 낮았습니다. 하지만 108위의 영국, 129위의 프랑스, 그리고 150위의 미국보다는 높은 순위를 기록했습니다. 행복지수 세계 1위는 비투아누라고 하는 오세아니아의 작은 섬나라가 차지했습니다. 상위권을 차지한 나라들은 대부분 후진국이었습니다. 행복지수는 경제적인 부와 그리 상관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해준 발표였습니다.

예, 2007년도부터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10년 전에 비해 분명 더 많이 갖게 되었지만, 우리의 행복지수는 도리어 떨어졌습니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어찌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코 우리를 편하게는 해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소유가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결론입니다. 

행복의 조건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면 과연 무엇에 달려 있을까요? 새로 지어 이사 간 집 구경하라고 초청받을 때, 우리는 주로 무엇을 봅니까? “그 집 참 넓네. 내부공간들이 살기 편하게 활용되었네. 친환경 고급 자재를 아끼지 않았네. 색깔이나 재질의 느낌이 고품격이네.” 등등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결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집이 과연 집 주인의 의도대로 지어졌는가 하는 점입니다. 집주인이 생각하는 목적과 계획은 설계도면에 반영됩니다. 시공사는 반드시 그 설계도면에 따라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만족스런 건물이 되는 겁니다. 설혹 구경꾼의 눈에 아무리 좋아보여도 집주인이 원하는 대로 지어지지 않았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때론 허물고 다시 건축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이란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목적에 따라 그 인생 집이 지어져 갈 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인생인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을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소유가 넉넉하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자기 존재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을 위해 살 수만 있다면 남들 보기에 아주 고생스러워도 본인은 행복합니다. 심지어 목숨까지 요구받는 자리에서도 행복해합니다.

그런데 인생 목적은 과연 누가 정하는 것입니까? 집 짓는 사람이 집의 목적을 정합니다. 음악 악기의 목적도 그 악기를 만든 사람이 정합니다. 이 땅 모든 존재의 목적은 만들어진 존재가 스스로 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같이 그 존재를 처음 존재하게 한 자가 정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도 우리 인생을 만든 자가 정합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이 명동 땅의 무수한 건물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특정 목적을 갖고 정확한 계획 속에서 만들었다는 것 다 압니다. 굳이 공사현장 보지 못했어도 삼척동자도 알고 서울을 처음 구경 온 시골사람도 그냥 다 압니다. 만일 저 건물들이 어느 순간 그냥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 취급 받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한 때 그랬습니다. 명동 땅 어떤 건물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고 완벽한 이 대자연과 인간이 그냥 생겨난 것이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주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은 지금도 굉장한 속도로 움직입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충돌하지 않는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떤 조직체보다 훨씬 복잡하면서도 여전히 조화로운 인간의 몸과 영혼도 그냥 저절로 생긴 것이라 믿으며 살았습니다. 마치 명동 땅의 건물들이 그냥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입니다.

저를 지으신 분을 몰랐으니 어찌 제 인생에 대한 그분의 목적과 계획을 알 수 있었겠으며, 어떻게 그 존재 목적과 계획을 따라 살 수 있었겠습니까? 단지 일류대학교에 진학하고 일류직장에 취직하면 행복해진다는 생각으로 그냥 달렸습니다. 머리가 그리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싶은 충동도, 이성교제에 대한 사춘기 호기심도 억눌렀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책을 붙들고 한 자라도 더 배우고 익히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세월을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 싶어 가슴 답답해질 때도 있었고, 합격하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바라던 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게시판에 붙어있는 합격자 명단에서 제 이름을 발견하고 저는 세상 다 가진 듯 기뻐 뛰었습니다. 그 때 참 행복했습니다. 바라던 바를 소유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목표가 없으니 이내 허탈해졌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주어진 대학생활의 자유를 갖고 무엇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무슨 목적 때문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존재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배운 술 담배에 절어가며 제법 오래 방황하였습니다. 

낙오하지 않기 위해 마음 다잡고 공부하려했으나 방황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웠습니다. 더 답답해지고 괴로워지니 또 술을 찾곤 했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험난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점차 불안해졌습니다. 제 어깨엔 무거운 짐이 느껴졌습니다. 그 때 저는 정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였습니다. 

이런 제 영혼 속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81년 2월 어느 수요일 밤, 먼저 믿게 된 누님의 권유로 저는 한 교회의 철야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너무 캄캄하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기도회 시작하자 그냥 힘없이 고개 떨어뜨린 저에게 하나님께선 꼭 한 마디 하셨습니다. “괜찮다.” “걱정마라 모든 것 책임져 주시겠다.” 한없는 사랑으로 저를 받아주셨습니다. 

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였습니다. 제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 품에 안긴 겁니다. 저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제 존재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어 제 인생 모든 것 책임져주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제 존재 목적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인생 집을 지어가고 있어서 저는 참 행복합니다.  

성경은 목적에서 이탈된 삶을 통틀어 죄라고 합니다. 목적에서 이탈된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예수님을 통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의 죄를 청산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벌 받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 믿으면 하나님 아버지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두 팔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미국 가시는데 비행기에 따라 들어간 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 붙어 탄 것이지요. 그 파리 미국까지 따라 붙었습니다. 그 목사님 왈, “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하는데 나는 놈 위에 붙는 놈도 있네.” 여러분 우리를 지으시고 모든 것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붙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아름다운 인생 설계도면에 따라 이제 여러분의 인생 집 재건축해보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쉼과 참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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