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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사랑하면 할 수 있다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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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할 수 있다 (요 21:15~17)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부활의 산 증인들입니다. 우리들의 예배가 주님 부활하신 날에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으로 함께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권세이기신 주님이심을 증거 합니다. 더불어서 믿음의 길에서 시험 들고, 낙심하고, 넘어지고, 깨어진 사람들을 찾아가서, 삶을 회복시키시고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완성시켜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서 우리는 제자의 삶에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와 축복을 가득히 받기를 소원합니다. 

1.부활하신 예수님은 친구처럼 우리 곁에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되던 날, 곧 안식 후 첫날 이른 새벽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고, 그곳에서 놀라운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들었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마태복음28:10)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96km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그 바다로 다시 나아가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요21:3) 
이 때 여섯 명의 제자들이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섭니다. 
그 밤에 밤새도록 노력하였으나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고 빈손으로 동이 트는 새벽을 맞이합니다. 

저만큼 바닷가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물었습니다. 
“얘들아, 뭐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을 것이다.”
그물을 던지자 너무 많은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체험하면서 한 제자가 말합니다.
“저 분은 주님이시다.”
육지에 올라오자 예수님께서 숯불로 구워놓은 생선과 떡으로, 함께 조반을 나눕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세 번째 만남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은 언제나 아주 평범하였습니다. 2천 년 전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의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가난하고 병들고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항상 함께 한다.” 하시던 예수님은 놀랍게도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고기 잡는 어부의 모습이었습니다. 바닷가에서 직접 구운 떡과 고기로 함께 식사하는 다정한 친구였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 그렇게 함께 하십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마태복음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예수님을 고백하였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16:18) 그 이후 예수님은 계속 베드로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날 아침 예수님은 베드로의 본래 이름, 변화되기 전의 이름을 아주 인간적인 다정한 모습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게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다음 모른다고 부인하고 돌아섰던 타락한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은 3년 전 처음 갈릴리바다에서 만났던 그날 아침의 신선한 만남이 이루어졌던 그 날과 같은 마음으로 베드로를 아주 부담 없이 대하십니다. 친구로 다가서십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저에게 다가와서 “이우야~!”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어떤 관계의 사람일까요? 아무런 간격이 없는 사랑의 관계일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베드로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곁에 아주 편한 분으로, 사랑 가득한 분으로 친구처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아침에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최고의 사랑에 도전하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갔던 죄인 베드로를 다시 일으키고자 이 바닷가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1)예수님은 우리를 아주 개인적으로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주님은 항상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관계는 항상 아주 개인적입니다. 주님은 수 천 명 수 만 명을 만나셔도 한 번에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만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그리고 바울, 최이우와 여러분들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2)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가페“(ἀγαπη)입니다. 우리성경에는 다 같이 ”사랑하느냐?“ 라고 번역되었으나 성경원어는 다릅니다. 처음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 ’아가페” 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이상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조건 없이 주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 십자가의 사랑 곧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아 라고 부르시면서 이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주 특별한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낮은 사랑은 언제 또 변할는지 모릅니다. 조건적인 사랑은 언제 또 변할는지 모릅니다. 한 번 버린 사람, 또 버릴 수 있습니다. 

결혼할 때 남녀의 사랑은 ‘에로스’입니다. 애정에 뿌리를 둔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이 식어지면 두 사람의 관계가 남보다 더 험악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신랑신부에게 말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사랑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변합니다. 그 열정도 식고,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정말 행복했던 부부가 “평생 웬수!”로 마지못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는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랑에 도전하라는 말씀입니다.  

3)최고의 가치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묻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길거리에서 오다가다 살 수 있는 ‘짝퉁’이나, 싸구려 물건 같이 취급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마태복음22:37,38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말씀은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최고의 사랑을 묻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가장 진실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아닙니다. 믿을 수 있는 많은 신적 대상 중에 한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폴틸리히 박사는 "God is not a being." 하나님은 많은 존재들 가운데,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의 사랑의 수준을 그렇게 기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그렇게 기대하십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의 수준에 도달하도록 노력하여야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직장도, 가족도, 친구도, 건강도, 돈도, 취미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므로, 그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그 어떤 권세도, 영광도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주님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십니까?” 
“당신은 예수님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사랑하십니까?” 
“당신은 예수님을 당신 자신보다 더 사랑하십니까?”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반드시 이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다 소중하지만 우선순위 첫째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이 진실한 제자입니다. 당신의 대답이 진실한 고백으로 올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인간의 실상을 아십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이상적인 사랑을 제시하며 그 사랑을 추구하는 존재에로 이끄십니다. 
요한복음1:12,13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인정해주십니다. 

마태복음5:13-16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산 위의 동내”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대한 아주 특별한 인정입니다.

고린도후선2:14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를 알리는 지식의 향기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오늘 당신을 향한 성경의 도전은 동일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당신은 세상의 빛, 소금, 산위의 동내” “당신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심은 그와 같이 되도록 도전하라는 격려입니다.  


3.그러나 현실의 낮은 사랑으로 출발하십니다.   

그리고 그 현실에서 시작하자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하는 베드로를 보십시오.  
첫 번째 와 두 번째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의 대답은 동일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15,16) 

1)이 대답에서 “사랑한다.” 고 하는 대답에 사용한 단어는 ‘휠리아’(φιλρια)입니다. 친구와 나누는 수평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것을 바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자기와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아주 인간적이고 일반적인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누는 사랑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최고의 사랑,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으나 베드로는 두 번이나 분명하게 친구로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아직도 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참 훌륭한 스승이기는 하지만 유일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이라기보다 참 좋은 친구 같은 분입니다. 그 분이 내 곁에 있어 든든하고, 내가 그 분 곁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운 그런 좋은 분입니다. 

이것은 그 동안 자신의 삶에 바탕한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 동안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복음16:16) 것처럼 그런 믿음으로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주제에 주님의 질문 앞에 ‘아가페’ 적인 사랑을 한다고 감히 말 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입니다.(15,16) 

처음 두 번의 질문에 대한 시몬의 대답입니다. “내가 그렇게 밖에 사랑하지 못하고 있음을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고백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주님,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만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제가 주님을 세 번식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2)이와 같이 베드로의 진실을 아신 예수님은 세 번째 질문에서는 태도를 바꾸십니다. 베드로의 현재 사랑의 수준에 눈높이를 맞추십니다. 그래서 세 번째 질문에서는 ‘아가페’ 대신에 ‘휠리아’로 사랑을 불으십니다. 고집스럽게 수준을 고수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낮추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 
베드로는 이렇게 질문하시는 주님 앞에 ‘근심하며’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왜 입니까? 두 번의 대답에서 아가페가 아니라 휠리아로 사랑한다고 하였으나 다시 묻으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불안합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친구로서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친구로서 사랑한다는 것도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차마 그렇게 대답하기가 괴롭지만 이것이 자신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아닌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수준이 무엇이든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끝까지 지켜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형들이 동생 요셉을 이집트의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넘겼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안가에서 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총으로 쏘았습니다. 국회의원출마 공천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탈당을 하고 무소속 출마를 선언합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친구로서 신의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부간의 사랑의 도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4.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낮은 저급한 사랑일지라도 사랑하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면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불완전한 사랑이지만 사랑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 사명에 서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위대한 약속을 해 주십니다. 
마태복음28:20
사도행전1:8
빌립보서4:13

당시의 피 값으로 사신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시몬에게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성령강림이후에 그 사명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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