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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와서 보고 가서 이르라 (마 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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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보고 가서 이르라 (마 28:5~7)

마 28:5-7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창 1장2장에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고 순종 할 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셨니다. 

창 3:15에는 범죄한 아담과 하외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회복 시키시겠다고 하십니다.

창 6:18에 언약이라는 말로 홍수 심판을 하지 아니 할 것을 약속 합니다.

창12장에 와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 하시고 약속의 땅과 후손이 땅의 티끌처럼 될것을 약속 하십니다.

출20장의 모세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계승이요 성취로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습니다.

삼하7:8-16에는 다윗에게 주신 말씀으로 왕조에대한 언약적 의미가 함께 합니다.

  렘 31장은 새 언약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 새겨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것임을 말씀 하는바 이는 에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 지는 은혜와 연결 됩니다.

새롭게 완전히 회복되는 그 때가 바로, 법궤가 있었던 이스라엘의 가장 신성한 장소인‘시온’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그 때임을 예레미야는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행 10:34-43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초대받아 행한 설교이며, 내용은 길지 않지만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34절) 설교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곧이어 언급될 이야기의 권위를 암시하는데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선언하는 중대한 선언을 나타내기 위해 이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처음 한 말이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적인 조건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인데,‘외모’는 단순한 얼굴 생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과 종교적 제의와 관습들을 가리키며 형식적인 경건주의를 상징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짓는 관습까지 지칭합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복음 전파 사역을 간단히 설명하면서도 그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 즉 온 세상 사람에게까지 확대되는 것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기 전에 보았던 환상을 통해‘깨닫게 된 교훈’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39절에 묘사된 것처럼 온 인류의 죄를 위해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바로 십자가 죽음을 묘사합니다. 여기에서 십자가 대신‘나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하는 이중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이어 부활 사건에 대해 증거하면서 당시 사도들이 증거한 내용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것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40절에서는 부활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미 본문과 같은 내용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교한 점을 미루어 보아(행 2:32 ; 3:15 ; 4:10 ; 5:30), 부활이 초대 기독교에 있어서 선포의 주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죄사함이 선포됨으로써 베드로의 설교가 종결되는데(43절) 복음이 사람에게 끼치는 결과가 핵심적으로 진술된 부분입니다.

마 28:1절에“안식일이 다 하여 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은 오늘날로 보면 일요일, 즉 주일이 시작되는 여명의 시간에 이른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이 아닌 주일 예배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역사상 최초의 주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님 부활로 말미암아 주일로 대체되어 지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시금 새롭게 재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은 이미 예수님의 무덤을 먼저 확인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습니다(마 27:61참조). 

그들이 갔을 때 일어났던 일을 묘사한 2-4절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기록들로, 예수님의 무덤에서 목격한‘큰 지진’과‘천사 강림’을 보도합니다.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여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성경에서는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마 27:51;출 19:18;시 68:8;행 16:26;히 12:26). 따라서 본문에서 지진이 발생했다고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함께 역사하고 계셨음을 뜻합니다(엡 2:5-6).

다음으로는“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2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에서‘앉았는데(에카데토)는 미완료시제로 마치 무덤을 찾아올 여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본문에서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마 27:64-66)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무서워 떨었는지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 합니다(4절).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믿었던 여인들 또한 무서워 떨기는 했지만 큰 기쁨이 함께 한 경건한 두려움이었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8절).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될 때 나타나는 자연적인 심리 상태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들이“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기 위해 무덤에 온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행동을 감찰하시며 동행하고 계셨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평소 예수님에 대한 여인들의 신실한 마음과 자세를 인정받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여인들에게 천사는‘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빈 무덤’을 직접 확인시켜 줍니다. 이렇게 부활의 소식을 들은 그 여인들에게 천사들은 예수님 부활의 메시지를 빨리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7절의“가시나니”(프로아게이)는 현재 진행적인 의미가 아닌 생생한 미래를 나타내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신 약속 그대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는 뜻입니다(10절). 

한편으로, 당시 유대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최초로 목격하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를 택하셨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시간에 두 여인이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며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아직도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로, 평소에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며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날도 그들은 무덤에까지 갔었고, 요셉이 자기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넣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간 것까지 자신들의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가만히 집에 있을 수 없었기에 새벽같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마침내 무덤 앞에 온 순간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일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강한 지진이 일어나서 더 이상 두 발로 서 있기 힘들어 주저앉은 그들의 눈에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 계속해서 보였기 때문입니다. 혼란 속에서 그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설마 정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부활이 일어난 것일까….’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재로 힘든 그 여인들에게 이제는 예수님의 무덤과 시체마저도 제대로 찾을 수조차 없는 그런 믿기 어려운 현실만이 무덤 앞에 서 있는 그들에게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었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습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뼈 있는’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바랍니다. 지금의 아내와 남편들도 함께 부활을 바라는가요. 부활의 생명이 오늘의 유한한 생명 속에 꽃피고 열매맺기를 정녕 바라는가요.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그 이후 펼쳐질 복된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결과는 미리 알고 있는 우리지만, 아직 그 결과를 모른 채 두려워 떨고 있는 그 여인들보다 얼마나 신실하게 부활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아직 내 심령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의심의 영은 계속해서 주님을 향해 가고자 하는 나에게‘설마, 설마, 정말로?’라는 공허한 질문을 하며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아무리 크게 외쳐도 우리들 마음에 참된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부활에 대한 참된 믿음과 그 능력에 힘입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무덤’안에 천으로 싸여서 누워 있는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인생입니다. 아니, 이미 주님이 가고 없는 빈 무덤 안에서 고집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가 나의 문제가 아닙니까?

  1827년 스코트랜드의 항구에서 배에 올라탄 노인 목사가 있었습니다.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설교한 라이트 목사 (Henry Francis Lyte)였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따뜻한 곳에 살아야 하겠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프렌치 리비에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첫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침 출항 시간에도 라이트 목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여관방을 열었더니 노인 목사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책상에는 밤사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전세계가 애송하는 찬송가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Abide with me) 입니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는 여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여 주시며“마침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제자들에게 빨리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님의 약속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무시당하던 것에 익숙해 있던 여인들은 또다시 새로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전 것과는 확실하게 다른 혼란임을 깨닫고 즉시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힘을 내어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빈 무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은 과감히 버린 채‘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려가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깊은 탄식 아래 발걸음을 재촉하며 예수님의 무덤으로 올라가던 그 모습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입니다.

빈 무덤을 떠나 세상 속으로 부활의 복음을 들고 가는 여인들의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지 않습니까?

그리스의 한 철인이 친구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그는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이런 말을 썼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새 종교집단이다. 사람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시체를 들고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즐거운 소풍이나 가듯이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행진한다.”초대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전해주는 산 증거이다. 초대 교인들은 부활의 신앙,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겼으며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남겼다.”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유산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남기신 부활의 믿음,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지금 우리 마음 속에는 어떤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몸으로 마음으로 입으로 외치는 복음은 어떠한 복음입니까? 해마다 돌아오는 부활절은 우리에게 어떤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까? 

“ 빈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빈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빈 무덤에서 나오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주님의 능력을 다시금 깨달으며, 우리 모두 빈 무덤을 뒤로 하고 경건한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안고 빨리 세상 속으로 달려나가야 할 때입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웠습니다. 당시 국제 사회는 조선을 ‘소망 없는 은둔의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황무지이기 때문에 더욱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였습니다. 그들은 순교의 각오로 파송을 자원했습니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거센 풍랑을 헤치고 한 척의 배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단순한 입항이 아니었습니다. 이 나라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오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땅을 밟았습니다. 황무지에 소망의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본국에 보낸 첫 선교 보고서에서 이날의 감동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왔다. 그날 사망의 철창을 쳐부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조선의 결박을 끊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빛과 자유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천사의 말을 듣고 보고 가서 전하는 여인들 처럼 부활의 소식을 전하며 사명 감당하는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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