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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신앙이 주는 유익 (고전 1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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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이 주는 유익 (고전 15:12~20)

겨우내 죽은 듯 하던 나뭇가지에서 새 순이 돋아나고 벚나무, 개나리와 수선화가 한창입니다.   오늘이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3일 만에 다시 사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음력을 따라 맞이하는 이번 부활절은 다른 해에 비해 상당히 빨리 돌아와 아직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겨울처럼 느껴집니다.   더구나 어제 오늘 틈틈이 보이는 눈발은 아직 겨울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곳에서 눈이 내리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라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이번에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까 기대하곤 하는데 역시 그냥 지나치곤 합니다.  어제는 날씨가 춥고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하룻 동안 청명한 하늘과 먹구름 속에서 쏟아지는 눈발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잠시 동안이었지만 겨울에 못 보던 눈 구경을 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하늘이 어둡고 함박눈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화이트 Easter가 되려나 기대하게 만들었던 특이한 봄날입니다.  이렇게 춥고 스산한 날씨이지만 그래도 정한 때가 되니 겨우내 잠자던 생명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는 소망의 계절입니다.    

아무리 매섭게 춥고 땅이 얼어붙었을지라도 봄이 오면 언 땅이 녹고 훈훈한 봄 바람이 불어 생명체들이 되살아나듯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치던 서슬 퍼런 유대인들의 고함과 잔인한 로마 군병들의 십자가 사형 집행으로 나사렛 예수는 그렇게 맥없이 죽어 모든 것이 끝이 난 줄만 알았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그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물론 예수께 기대를 걸었던 유대인들은 이분이야말로 정말 우리가 기다리던 구세주 메시야일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걸었었는데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태풍이 한 차례 지난 후 온 세상이 잠잠하듯 고함과 아우성 속에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예루살렘 성은 유월절과 함께 맞이하는 가장 큰 안식일을 지키느라 침묵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도 아리마대 요셉의 돌무덤 속에서 쉼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로마 군병들이 그 무덤을 굳게 지키도록 함으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던 정신 나간 나사렛 출신 목수의 일은 이 정도로 마무리 하고 덮어버리려 했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렸던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신 대로 주님은 무덤에 장사 지낸 후 3일만에 부활하여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심으로 성경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은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에게 부활한 몸을 보이셨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도 여러 차례 보이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시기도 하셨는데 그들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들은 잠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친동생 야고보에게도 보이신 주님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며, 마지막에는 어머니 배에서 열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부족한 사람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동정녀 탄생과 함께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심이며 기독교 복음의 중심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육체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오심 그 자체가 신비한 사건이며,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죽음을 통과한 후 다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된 부활사건은 또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동정녀 탄생과 부활 사이에 이루어진 십자가 사건은 예수께서 왜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증명하는 핵심 사건입니다.   이 핵심 사건들을 성경에서 제거하고 나면 기독교 복음은 그 생명을 잃고 맙니다.  탄생과 죽음과 부활이 없으면 이 세상 사는 동안 악을 행하지 말고 선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말하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 그 가르침이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음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서로 축하하는 것처럼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기쁨으로 맞이하고 축하합니다.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약속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사건을 사실로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무시하고 믿지 않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당일에 예수님을 본 사람들도 사실을 믿을 수 없어 갈팡질팡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더욱 더 당황하여 이 사실을 감추려고 전전긍긍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증인이 되어 부활의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죽은 사람이 도무지 다시 살 수 없다면 그리스도 역시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나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는데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 역시 다시 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니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전한 복음을 받은 너희들의 믿음 역시 헛것이고 여전히 죄 가운에 있을 것이며 예수를 믿고 죽은 사람들은 망한 사람들이니 만일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 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인생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이라고 거짓으로 전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그 거짓을 믿고 따르다 죽었다면 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그리고 아직도 그 헛된 망상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처음 열매가 되셨으니 첫 열매가 있으면 그 다음 열매가 있음을 확실히 믿는 우리에게도 그 부활의 은혜가 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부활은 언제나 죽음을 전제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죽음이 없이 다시 사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 지낸바 되었고 약속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고, 죽음이 없이 죄 사함도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23)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로 죽습니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자신의 죄의 결과로 오는 형벌이지 그 죽음 자체가 구원이 아닙니다.   죽음과 함께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시고 또 다시 살리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음을 당하실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음으로 당할 형벌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죄의 형벌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 속에 가두는 죄의 세력을 꺾으셨습니다.   죽음을 이긴 것은 곧 죄를 이기심이었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와 함께 죽음의 길에도 부활의 길에도 함께 합니다.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와 연합하여 그 다음 부활의 열매가 되어 영원한 삶을 누립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부인하고 거절하며 하나님께 대항하여 세상을 죄의 세력으로 어둡게 만든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기독교 복음의 중심 줄기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사단의 주된 전략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기에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려 하셨지만 사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 몸으로 막으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지만 사단은 그 일을 방해하려고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대신 내가 주는 명예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세상에서 멋지고 화려하게 살라고 시험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단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지만 그 후에도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부추겨 십자가를 지지 말고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해달라고 간청하며 십자가 지러 가는 길을 가로막게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은 사단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고 유대인들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는 자칭 유대인의 왕이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착각 속에 사람들을 미혹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낙심하여 제자들까지 버리고 죽은 선동가로 만들었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율법의 말씀(신21:23)이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나무에 달아 죽게 함으로 십자가 죽음을 철저하게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 하였습니다.   그것도 이방인 로마인들의 잔인한 손을 빌려 나무에 달려 처형당하여 저주받은 죽음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단의 전략이 들어맞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약속하신 대로 삼일 만에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셨고 우리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제 사단이 할 수 있는 남은 전략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여 부활사건을 믿을 수 없는 신화나 제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이 난다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이 세상에만 관심을 두고 살도록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사단이 애써 무시하려 하고 방해하려 하지만 사단이 하는 일은 다만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덮고 감추려고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은 바로 이 심판대 앞에 설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완벽한 삶으로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선을 쌓고 의로운 삶을 살았을지라도 그 선과 의로움은 사람들 사이에 비교되는 상대적인 선과 의로움일 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선과 의로움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고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그 은혜를 힘입어 예수 안에서 죄 씻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 우리의 죄는 십자가에 못박혔고 주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함으로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는 부활주일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고 있는가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 부활신앙은 성도들에게 죽음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쓴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죽음이란 무엇인가?’ 에서 저자는 죽음에 대한 기독교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 중에 가장 공평한 경험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됩니다.   고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 부자나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노인들만 죽는 것이 아니라 꽃도 펴보지 못한 어린 아이들도 죽음 앞에서는 면제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합니다.   죽음이 즐거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음을 가리켜 ‘원수’라고 하였고, ‘썩는 것’ 또는 ‘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하고, 젊은이들의 화려한 꿈을 한 순간 꺾어버리는 절망적인 세력입니다.  애써 얻은 것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리는 상실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사람에게 결코 즐거운 경험이 아닙니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원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은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죄의 산물인 죽음은 사람들에게서 이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의 원수인 죽음을 이기심으로 죄에게 빼앗겼던 하나님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참 소망을 가지기 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맞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처럼 거부나 비통함에 젖어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확실한 사실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다는 확실한 사실을 믿음으로써 죽음은 더 이상 패배와 두려움이 아니라 주 안에서 승리와 생명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빌1:21) 한 것은 이 세상에 더 살고 싶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나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이 땅에 살면서 성도들과 함께 주의 일에 힘쓰는 것도 좋고, 지금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도 좋으니 내가 어디에 속하던지 유익이라는 고백입니다.   

빌리 그래함은 책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천국의 첫 숨을 들이키게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거처를 이 땅에서 천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으로써 얻게 되는 가장 큰 유익은 죄악으로부터 영원히 자유하는 것입니다.   죄가 이 세상에 가져다 준 근심과 고통, 사고와 질병, 미움과 전쟁 등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온갖 인간적인 공포로부터 자유를 누립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죽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한다는 이 말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지요.   

요한계시록에서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14:13).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4) 하였습니다.  시편 116:15에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맞이하는 성도의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쉼과 자유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는 믿음이 주는 유익입니다.

두 번째로, 내세에 대한 소망 속에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삽니다.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하였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은 오늘만을 위해 살고, 내년이 없는 사람은 금년으로 끝장을 내려고 하고 내세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라 여기고 오직 이 땅에서 육신의 삶에만 전심전력할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 오직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와 평안이 삶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산다면 이 얼마나 가련한 삶이겠습니까?  그런 삶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줄 아는 삶의 방식이 아닌가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런 종류의 것일까요?   그것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를 지러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만 이 땅에서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이 약속을 따라 바라고 들어가기를 힘썼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생전에 약속을 다 받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였고 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성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 너머에는 영원한 나라가 있음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이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이 땅에서 고난과 슬픔과 억울함과 아픔을 당할 때 우리 앞에 예비 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견디고 넘어서는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셋째로, 부활신앙은 현세에 대한 책임을 더욱 견고하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세에 대한 소망 가운데 사는 성도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바울의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만 오늘 날에도 거짓 종말을 말하는 자들은 지구 종말의 날을 예고하며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고 현실을 비관하며 살도록 미혹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3, 34) 하였고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58절)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그날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날들을 헛되이 허비할 수 없습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은 다시 오실 주께서 심판장으로 오셔서 우리를 판단하실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며, 고난 당하는 사람들과 약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정직과 부지런함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더구나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자신을 향해 스스로 질문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주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그 동안 미지근하던 나의 신앙에 활기를 되찾는 부활절이 되기 바랍니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다시 힘을 얻어 기지개를 크게 펴고 잠자는 듯 하던 믿음이 깨어나 생동하는 신앙의 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잠자던 사람들 중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주 안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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