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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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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 (요 20:11~18)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 부활의 새벽 시간, 주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모신 무덤으로 달려온 첫 번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사실 죽음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할 수 없다. 동업, 동행, 동거, 동속이 안된다. 그래서 죽으면 무덤에 버린다. 망각하고 잊어버려야 한다. 사랑한 사람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특별하다. 무엇이 다른가?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죽은 자의 무덤에 찾아왔다. (요20:1)
요20:1 “안식일이 끝난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라 하였다. 여인이 새벽 시간 어두울 때 무덤을 찾은 것은 특별한 용기다. 어디에서부터 이런 용기가 왔을까? 어두운 미명에 묘지를 찾는 여인. 당신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둘째, 되돌아가서 제자들을 모셔 왔다. (요20:2~3)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와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 인봉되어 있어야 할 무덤 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달려갔다.(요20:2)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제자에게 가서 말하였다. “주님의 시신이 어디 계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전하므로 제자들은 무덤으로 오게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지런하다.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로 모셨는지 알기 위해 달음질치는 새벽을 보냈다. 주님을 찾기 위한 열정이 여인을 뛰게 만들었다. 

셋째, 무덤에 서서 울며 주님을 찾는다. (요20:10)
요20:10을 보라. 막달라 마리아 때문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온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세마포만 남아있는 빈 무덤에 더 이상 제자들은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에 머문다.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라고 적고 있다.
인생의 끝, 희망의 끝, 생명의 끝을 상징하는 무덤에서 무엇을 더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희망을 찾는다. 생명을 찾는다. 아니 주님을 찾는다. 시신이라도 좋다. 울면서 주님을 찾는다. 찾아서 그 주님의 시신을 모시려고 한다.

넷째,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찾는다. (요20:15)
무덤을 살피며 주님을 찾는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이름을 불러 주셨다.
“마리아야!” 그 음성을 듣고 “랍오니”하고 대답하는 마리아는 주님을 잡으려 한다. 그런데 주님은 만류하신다. 주님을 만지지 못한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그런데 이것은 마리아에게 얼마나 서운한 말씀인가? 무덤을 찾은 용기와 열정, 눈물은 모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가? 울면서 울면서 주님을 찾는 갈망의 서성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 주님을 무덤 안에서 만난다. 그 환희와 그 기쁨은 측량할 수 없다. 어떻게 그 주님을 놓을 수 있는가? 주님을 만지고자 손을 내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 손을 잡아 주었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만지지 말라.” 하신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남자 제자들에게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심지어 “네 손을 넣어보라. 만져 보라.”(요20:27)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면서 왜 만지지 못하게 하는가? 예수님이 아직 승천하지 못해서 영화의 몸이 더러워질까 보아서인가? 부활의 몸을 육체의 몸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기에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아니면 내 속의 부활을 한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되는 것이기에 만지지 말라 하셨는가? 어떤 이유를 대든지 설명이 안된다. 그래서 마리아는 거절 당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사모하고 갈망하고 사랑한 주님을 만지지 못한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

다섯째, 오히려 가서 전하라는 말씀을 듣는다. (요20:17)
주님을 붙잡고 싶은 마리아의 소망을 거절하신 주님은 사명을 맡기는 말씀을 하신다.
요20:17 “너희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다. 가서 전해야 할 이 사명의 내용 속에는 훗날 주님을 만질 수 있는 약속이 담겨 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기에 만지지 말라 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만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 주님을 만나서 교제하며 그 사랑의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기쁨과 행복을 어디에 비길 것인가? 그러나 그 행복, 그 기쁨은 잠시 유보해야 한다. 먼저 가서 전해야 한다. 주님이 부활하셨고 주님이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신다는 것을 전해야 한다. 제자이면서도 부활의 주님, 승천의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서 가서 전하는 것이 긴급한 사명이다. 사명을 위해선 주님을 붙잡는 기쁨이 유보되어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수준 높은 여인이다. 능히 사랑의 교제를 뒤로 하고 사명에 깨어 있어 가서 전한 여인이다. 아2:7을 보라.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어다.”고 한다. 그러나 아2:10, 13에서 사랑하는 이가 말한다.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라고 하였다. 사랑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포도 농장으로 가고 포도원을 하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할 때이기에 일어나서 가자고 노래한다. 

윤남욱 목사는 주님이 20일간 찾아와서 방문한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그는 자신을 신부로 여기는 신랑이신 주님 앞에 신방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신방을 보여주지 않는다. 주님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며 윤 목사님께 군복을 입혀 준다. 신방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할 때다. 모든 영혼들이 죽어가는 이 세상 속에서 사단에게 유괴된 영혼을 어서 찾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야 한다. 한 명의 영혼이라도 구하기 위해 우리 함께 싸우러 나가자.”

그렇다. 지금은 전해야 한다. 웨딩 드레스를 입은 것을 꿈꾸기 보다 영적 전사의 옷을 입고 부활과 승천, 재림의 주를 전해야 한다. 윤남욱 목사는 이것을 보고 “주님 신혼의 꿈만 꾸고 있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회개하였다. 

그렇다. 전도가 우선이다. 나를 정말 사랑하기에 그리고 신뢰하기에 거룩한 일을 맡기는 것이다. 가서 전하라는 것이다. 이제 맡겨진 일을 무겁다고 말하지 말고 기뻐해야 한다. CM장으로서, CM원으로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소그룹 전도하는 것, 재물을 드려 헌신하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사랑하기에 주님의 소원을 먼저 이루어드리는 것이다.

여섯째, 일러 준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르라. (요20:18)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리아는 진정으로 일러준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의 일러준 말대로 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보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으라 하셨다. 또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 심지어 손가락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게 축복된 말, 친절한 위로의 말, 권세를 주시는 말을 듣고 보았고 만졌으면서도 믿지 못한 자들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 이 여인과는 너무도 다르게 모두 부활의 주님을 전하지도 않았다.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은 복음을 전할 때 믿는 자는 죄가 사하여지고 믿지 않으면 죄로 인해 심판을 가져올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다. 이런 권세의 말씀을 듣고도 제자들은 엉뚱한 행동을 보였다. 

요21: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라고 하였다. 그들은 복음 전하기는커녕 고기 잡으러 갔다. 부활의 주님이 저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도록, 보고도 만지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아직도 천방지축이다. 

부활의 아침에 우리는 달라야 한다. 엉뚱한 말, 엉뚱한 행동, 엉뚱한 일을 하는 불신의 제자가 되지 말고 우리 모두 마리아를 배우자.

눅7:46~50의 말씀을 보면, 마리아는 죄를 용서 받은 경험, 사함을 받은 체험이 컸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용서 받은 이 여인은 주님의 사랑을 크게 받았다. 사랑함이 많은 마리아는 오직 순종하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하였다.

나는 천국에 올라가서 마리아를 만나면 보고 싶다. 안식 후 첫날 아침 부활의 증인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부활의 주님을 전한 마리아여, 왜 주님을 만지려 했느냐고 그리고 거절 당하고 주님이 가라, 전하라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고 묻고 싶다. 분명코 마리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겠지요.”

“가서 전하라.”는 이 전도의 명령 앞에 부활절 아침을 맞은 성도들의 진정한 모습은 세상으로 달려가 부활을 전하는 마리아가 되는데 있다. 사망 권세, 허무, 염려, 절망에 있는 자들에게 전하는데 있다. 부활은 인생의 신비, 신앙의 신비, 우주 안에 최고의 신비, 신비 중의 신비다. 부활을 믿는 신비, 그 신비가 역사의 현실을 믿는 자에겐 두려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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