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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생명 속에 사는 삶 (살전 4: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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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생명 속에 사는 삶 (살전 4:13~18)

유명한 신학자[칼 바르트]는 우리가 잊지 말고 살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생각하라는 것과 또 하나는 죽음을 생각하라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미리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 실상은 어떻습니까? 안 죽으려고 하는 게 또한 인간입니다. 유전공학이니 DNA니 연구해서 인간이 장수하는 비결이 뭐냐 아무리 해봐도 여전히 인간은 죽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늙지 않는 약은 없나? 죽지 않는 약이 나오지 않을까'하는데 기대하지 마세요. 죄송하지만 인간은 늙어야 됩니다. 그리고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입니다. 사는 것만 신비가 아닙니다. 사실은 죽는 것도 신비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면 신비입니다. 그 녀석이 자라가는 것도 성장의 신비입니다. 여기까지만이 신비인줄 아는데 그러나 그가 잘 죽는 것도 분명히 신비입니다. 안 늙어도 걱정입니다. 안 죽어도 걱정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죽음에 대해서"잔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도 죽었다고 모두가 울고 있는데"잔다."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관은 휴식입니다. 잔다는 것은 쉰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낮에 힘써 일하고 밤에 피곤해서 잡니다. 죽음도 그 잠자는 것과 똑같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다는 말의 중요한 의미는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경험한바 입니다만 아이들은 조용히 잡니다. 그래서 가끔씩은 얘가 숨은 쉬나 싶어서 몇 번씩 들여다보곤 합니다. 분명히 숨을 쉬고 이거든요 그러면 안심하고 옆에 눕습니다. 이걸 몇 번씩 하게 되더라고요. 자는데 그 속에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뭐 어른 자는 건 확인 안 해도 압니다. 코를 드렁드렁 골다가 숨넘어갈 것같이 컥컥 하기도 하잖아요. 들여다보지 않아도'아 죽진 않았구나'알거든요. 잔다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무서워합니다.'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하는데 자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마시고 지옥 갈까 걱정하는 게 옳습니다. 또 주님 앞에 가서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까 그런 걱정을 하더라도 죽는 자체는 걱정하지 말아도 될 것 같습니다. 잠들 때'아이고 숨 막혀서 어떻게 자나?'그 걱정했습니까? 잠자는 것은 죽는 연습이라고 합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하고 죽었다 살았다 하는 거랍니다. 아무튼 잠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그 속에 생명 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잠잔다는 말은 잠에서 깰 때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어서 장례식을 하는 사람을 보고도"잠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들었다는 것은 깰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깨어날 아침을 생각하기 때문에 평안히 잠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는 것과 깨는 것, 죽는 것의 이 모든 신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하나님 안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고 깨어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죽고 살아납니다. 여기에 엄청난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를 알려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이라는 사건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정말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신비로운 사건을 우리는 소망하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부활 생명 속에 사는 오늘의 내 삶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생을 바친 수녀[마더 테레사]는<아름다운 선물>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먼저는 선교사 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지니고 사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삽니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명상가로 산다 그랬습니다. 명상이란 한 가지만 열심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랑과 정열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전혀 생각지 않는 명상을 말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쳐다보고 그리스도에게 집중하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상관하지 않는 명상가 적으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셋째는 보편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의인이면서도 죄인 속에 삽니다. 악한 사람들 속에서 보편적으로 살지만 선하게 삽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마는 죄악 된 세상에 불평 없이 흡수되어 살아갑니다.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부하건 가난하건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철저한 보편성을 지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순성을 말합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심령의학에서도 말하기를 병이 왜 생기느냐 하면 복잡성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사람이 딱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엄청난 능력, 엄청난 저항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분열 분산되기 시작하면 힘이 약해지고 병균을 이기는 저항력도 떨어집니다. 그래서 병이 걸린다고 합니다. 때로는 단순성이 중요합니다. 사랑에 대하여 단순하고 믿음에 대하여 단순하고 생의 목적에 대해서 단순하고 사명감에 대해 철저하게 단순하고 집중적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기에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하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은 동물입니다. 인간은 아는 만큼 존재합니다. 믿는 만큼 우리의 생명의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요. 거기에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가치 없던 옛 생명의 회생도 아닙니다. 죽고 나서 생명체로 태어나는 윤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며 참 생명, 영원한 생명을 증거 해주는 첫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계시요, 우리에 대한 약속이요, 우리의 생명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그 어느 때 있었던 하나의 사건정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으로 우리 속에 그 생명이 있고, 그 생명으로 우리 또한 같은 영광을 누릴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늙은 나무에서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은 해마다 새 가지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부활의 생명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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