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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신앙 (눅 24:13~17, 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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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 (눅 24:13~17, 25-35) 

  ‘엠마오 도상’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렘브란트’라는 유명한 화가입니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렸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몹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행복이 깨어져버렸습니다. 사랑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와중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죽음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그가 첫 번째 그린 그림이 ‘야경’이라는 작품입니다. 지금 암스테르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세계적인 그림을 보는 이들마다 ‘렘브란트’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이 그림은 가격이 얼마나 됩니까?” 그는 말합니다. “내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깨달은 귀중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두 번째 그린 그림이 바로 ‘엠마오 도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숨을 거두신 후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데, 너무 낙심해서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동행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 화폭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나무들이 마치 약동하는 부활의 생명을 보여주는 것 같은 필치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18종류의 성경을 깊이 탐독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림을 완성한 후에 말했습니다. “나는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깨닫고 이 그림을 그렸노라”. 

  ‘렘브란트’는 인생의 허무와 좌절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엠마오 도상’이란 위대한 작품을 내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방황하던 한 인생에 목표를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작품을 내어놓도록 그를 이끌어간 것입니다. 그의 삶이 뒤바뀌어졌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들이 부활의 신앙을 소유함으로써 인생이 바뀐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신, 그리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들의 삶에 동행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다시 언젠가는 부활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과거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 오늘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 그리고 미래에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신앙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 부활의 신앙이 주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부활신앙만 가질 수 있다면 삶의 어떤 역경이나 위기 앞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은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령출신의 ‘월레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작가가 되길 원했는데, 그는 평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증거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탐독했습니다. 어디 예수 부활의 증거가 있느냐? 이거 다 엉터리 아니냐? 제자들이 꾸며낸 헛소문 아니냐? 그가 성경을 읽고 또 연구하고 또 조사했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성경을 읽다가 그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 불신자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부활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서 ‘벤허’라는 위대한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부활신앙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조이 맥돌이라는 주석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7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덤에 무덤이 인봉이 끊어진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묘소에 장래지낸 후에 혹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갈까봐, 그리고 훔쳐간 뒤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소문을 낼까봐 대제사장들이 두려워서 로마 군병들로 하여금 철통같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인봉을 붙여놨습니다. 아무도 돌을 굴릴 수 없게……. 그런데 그 인봉이 뜯어지고 예수님은 그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빈 무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가보니 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무덤이 있고, 공자도 무덤이 있지만,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가보면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무덤입구를 막았던 그 큰 돌을 누가 옮겼을까? 적어도 한 2톤 정도의 큰 돌이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옮길 돌이 아니었습니다. 감히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와서 그 돌을 옮겼을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로마 군병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입니다. 
  네 번째는 로마병정들이 기절하거나 도망쳐버린 사건입니다. 세계적인 가장 강력한 군대인 로마병정들이 왜 도망쳐 버렸을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 부활의 증거입니다. 

  다섯 번째는 제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예수님의 겉옷인 세마포가 잘 개여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간다고 치면 그 겉옷은 왜 벗겨서 거기다 개어 놓고 갔겠습니까? 

  여섯 번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도마는 자기의 손을 들어서 예수님의 그 창자국난 상처에 손을 대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니까 500의 형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곱 번째는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사도바울의 변화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워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담대해져서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변화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었을까요? 복음서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향료를 발라드리려고. 그러나 가보니 이미 돌문은 굴려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고,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너무 슬퍼서 “우리 선생님 어디 가셨나?” 그들이 슬퍼 울고 있을 때, 천사가 와서 말합니다. “여인이여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너희가 찾는 그 주는 그가 말씀하신대로 이미 부활하셨느니라. 그는 여기 계시지 않느니라. 갈릴리로 가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했던 것입니다. 자 오늘 여기 예수님을 따랐던 두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광경을 오늘 본문 속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오늘 10절에 보니까 그들의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기대하던 것들이 허물어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역력했습니다. 몹시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장사를 해도 밤잠 하나 안자고 장사를 해도 돈만 벌면 피곤한 걸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예수님이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고 나니 그들은 맥이 빠져 버렸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먼지가 풀석이는 그 시골길을 둘이 걸어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역력했습니다. 실망의 빛이 역력했습니다. 

왜 그들은 그런 실패자의 모습으로 엠마오로 내려가게 되었을까요? 잘못된 기대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예수로 알았습니다. 21절에 보니까 우리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우리는 그를 바랐노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억압되어 있습니다.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예수가 정말 정치적인 예수가 되어서 많은 군사를 이끌고 능력으로 와서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그런 예수님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잘못된 오해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온 인류를 죄악에서 구속할, 그리고 십자가에 고난 받으실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은 예언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한동안 잘 나오다가 갑자기 안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목사님들이 심방 가셔서 “왜 교회 안 나오십니까?” 그러면 이유가 이렇습니다. “뭐, 자식 사업도 안 되고 또 자식 한 집은 이혼하고, 누구는 어떻고, 내가 교회를 좀 나갔는데 왜 우리 집안은 이렇게 안 되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복 받기만을 바라십니까? 진정한 축복은 고난 후에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 (노 크로스, 노 크라운!)”

  그러나 우리는 복만을 바랍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고 교회 몇 개월 나온 지도 안 되었는데, 교회도 안 다니는 내 자식들이 다 복 받기를 원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다가 실망해서 실패의 길로 가는 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 가서 헌금도 했는데 왜 우리 큰 아들이 사업이 안 되냐는 말이요.” “왜 둘째 아들이 직장에서 나왔냐 말이요.” “왜 셋째아들이 시험에 떨어졌느냔 말이요.” 그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예수 안 믿는 큰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이 잘못된 것을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복을 주시기 이전에 그 복을 받을 만한 준비된 그릇인가를 확인하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큰 준비된 그릇이 있을 때 거기에 복을 부어 주시지, 그 그릇은 깨어진 그릇인데 구멍 난 그릇인데 거기에 어찌 복을 부을 수 있겠습니까? 줘봐야 그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준비되지 않는 사람에게 복이 올 때 잘못되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로또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 한 10명 정도를 몇 십 년을 통해서 조사해 봤더니 하루아침에 몇 십억씩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중에 대부분은 망했습니다. 다 이혼하고, 가정이 파탄 나고, 다 노숙자 생활하고 있더랍니다. 그들은 복을 누릴 자격이 없었습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갑자기 부어주는 복은 저주와 재앙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을만한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축복의 메시아, 형통의 메시아만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15~16절 말씀을 한번 읽어볼까요?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참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사모하던 예수님이 지금 옆에 같이 걸어가고 계시는데 그분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습니다. 무엇이 우리 눈을 어둡게 했을까요? 내 이기적인 욕망이, 내 욕심이, 그리고 자신에게 사로잡힌 생각이 내 눈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주님은 분명 내 안에, 내 심령 속에, 내 가정에 임재 해 계시는데, 우린 주님이 날 버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 나를 떠났다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의 어두워진 눈이 밝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왜 실망했을까요? 불신앙 때문입니다. 25절에 보니까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랬습니다. 미련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공동번역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미 이 땅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했는데, 그들은 그걸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갈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오해와 불신앙으로 인해서 결국 그들은 실패자가 되고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예수님이 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는 그들을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그들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된 말씀들을 하나하나 풀어 잘 설명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을 때 이 제자들은 그 동행하시는 그분, 그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함께 음식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나누어주는 그 주님의 손길 속에서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떡을 떼어주시는 그분의 손길 속에서 최후의 만찬의 떡을 떼어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 오병이어를 들고 기도하시고 오천 명에게 나눠주시던 그 주님의 손길을 그들은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주님이 성령으로 그들에게 임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깨닫고 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령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마음이 냉랭하십니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내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라고 그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더 이상 이제 엠마오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희망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33절~3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오늘 혹시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에 낙심한 분들 계십니까? 절망에 빠진 분들 계십니까? 오늘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시고 여러분의 영안이 열려지시고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신앙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들은 길을 바꿨습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1제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경험한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삶의 변화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을 바꾸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사람이 세 가지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먼저는 할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입니다. 

   여러분! 할 일이 있습니까? 행복한 줄 아십시오. 할 일이 없으십니까? “아이고 어머니!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그건 가장 불행한 것입니다. 임종할 날이 점점 가까웠단 이야기입니다. 건강해야 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욕이 있어야 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 가능하면 교회에서도 밥 퍼주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퍼 주는 거 먹는 분들도 행복하지만, 이왕이면 밥 퍼 주는 사람이 되면 더 좋은 것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 할 때 일할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입니다. 또 한 가지 행복은 사랑할 대상이 있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할 가족이 있습니다. 내 아내와 남편이 있습니다. 자녀와 부모가 있습니다. 내 이웃과 성도가 있습니다. 그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세 번째는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소망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칸트는 한 마디 더 부언합니다. 앞을 내다보시는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할 일도 알게 되고 사랑할 대상도 발견하게 된다. 그랬습니다. 문제는 소망입니다.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쥐를 캄캄한 항아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하루를 못 견디고 쥐가 죽었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캄캄한 항아리 속에 작은 구멍하나를 뚫어놓았습니다. 밖에서 햇빛이 들어갑니다. 쥐는 일주일 후에 뚜껑을 열었는데도 살아있더랍니다. 쥐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빛을 보는 한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슨 걱정,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1960년대는 미국이 참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을 10년이나 지루하게 끌고 왔거든요. 지금도 이라크 전쟁 때문에 미국이 발도 못 빼고 많은 물자를 소모하고 대통령은 그것 때문에 인기를 잃어버렸습니다. 베트남 전쟁 또한 오래 지속되니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전쟁이 진행되던 1970년 미국 인디에나 주에 한 고등학교 교사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아주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아주 믿음이 좋은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음악을 위해 뭔가 봉사하기 위해서 학교 교사직을 사임합니다. 그런데 너무 경제적인 여건이 어렵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음울했기 때문에 뭔가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작곡도 생각대로 되지 않고 모든 일이 가로막혀 버렸습니다. 참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봄날 마침 자기 부모님을 모시고 자기 사무실에 차를 타고 도착을 해서 문에서 내리는데, 아버지가 먼저 차에서 내리면서 아스팔트를 뚫고 무언가 돋아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야 이것 봐라! 새싹이 돋았네!”그랬습니다. 부부가 그것을 보고 “벌써 봄이 왔네요. 아버님” 그렇게 서로 이야기했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 가정에 첫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자기 가족들이 해쳐나갈 미래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하던 이 아내의 마음속에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임했습니다. 그가 가진 걱정과 근심, 염려가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임재의 기쁨이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순간 펜을 들고 노래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빌과 글로리아 게이터라는 이 부부의 ‘그가 살아계시네’라는 유명한 찬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살아계신 주' 그것을 원어로 보면 'Because he lives'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 근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실 줄로 믿고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이 오늘 살아계셨다면, 오늘 부활하셨다면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그분이 살아 계시다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분이 내 소망이 되신다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우리의 소망되신 부활의 주님을 여러분 마음속에 영접하시고 이제는 이 승리의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이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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