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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욥 14:14~15, 마 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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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셨느니라 (욥 14:14~15, 마 28:1~6)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믿음의 뿌리가 되며, 우리 가정의 소망이 되며, 우리 사회의 새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 가장 놀란 존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로마군인일까요? 유대인 관원들일까요? 제자들일까요? 예수님의 어머니일까요? 다 아닙니다. 가장 놀란 존재는 마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심으로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데 영원히 살게 하셨으니 마귀가 가장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죽으셔야 인간의 죄가 계속 있을 터인데 죽으셔서 죄가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영원히 죽게 하는 것이 마귀의 일인데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되었으니 마귀가 가장 당황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6:10에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한번으로 영원히 죽으신 것입니다. 또한 한 번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사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 우리 부활의 증거가 되셨다는 말입니다.

  하얼빈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기념관에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안중근 의사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분도 어머니에게 부치는 글’이라는 편지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레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중략) 

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 올림.” 저는 안중근의사의 편지를 보면서 한참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분은 부활과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스크루지 현상’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뻔했다가 다시 한 번 삶의 기회를 얻게 되면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 뻔한 경험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하면 완숙한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진주문에 새로 도착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 질문을 하면서 천국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합니다. “장례식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당신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는가?” 첫째 사람은 유익한 삶을 산 의사요 가정적인 남자였다는 소리를 들으면 만족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사람은 훌륭한 교사였으며 현모양처였으며 지역 사회의 보배라는 소리를 들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사람은 내가 가장 듣고 싶은 소리는 ‘이것봐, 이 사람 살아서 움직여!’라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좋은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공항에서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보잉 747 비행기는 가장 큰 비행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큰 비행기를 작은 예인차가 끌고 다닙니다. 부두에 가보면 아주 큰 컨테이너선을 작은 예인선이 끌고 부두로 들어옵니다. 작지만 동력이 살아 있는 것이 동력이 죽은 큰 것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른 대로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낫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의 힘을 더해 줍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까? 살아 있으십시오. 살아 있다는 것, 다시 산다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이 복을 주십니다. 오늘 아침 부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 보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활의 첫 번째 증거는 빈 무덤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개켜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개켜 있다”는 말은 ‘그대로 접혀 있다’는 뜻입니다. 세마포는 사용하지 않은 상태로 손 댄 흔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마포는 시체를 위한 천입니다. 무덤은 죽은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는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비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증명하고, 선포하기 위하여 한 말입니다.

  오래 전에 애급 사막의 성 마카리우스 수도원에 갔을 때 그 곳에는 세례요한의 뼈가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아침마다 기도를 드리러 오면 요한의 뼈 앞에 와서 입을 맞추곤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뼈가 소장되어 있다는 곳이 그곳 뿐이 아닙니다. 다른 많은 곳에도 세례요한의 뼈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예수님 뼈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뼈가 소장되어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가짜입니다. 백스터(Sidlow Baxter)는 “만일 그리스도의 유해 중 하나라도 발견되었다면 기독교는 이미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절대 발견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절대로 산산조각이 아니 않습니다.

  성경은 부활이란 말을 401회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책입니다. 부활은 무덤이 비었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이 차 있을 리가 없습니다. 뉴비긴은 “만일 첫 번 부활절 아침에 그 무덤이 비어질 수 없었다면 교회는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빈 무덤은 교회의 시작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의 인사였습니다.

  모든 종교에 신앙의 대상이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는 80세에 죽었습니다. 유교의 공자는 73세에 죽었습니다. 이슬람교의 마호멧은 63세에 죽었습니다. 기독교의 예수님은 33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무덤이 없기에 가장 오래 산 것입니다. 가장 오래 사신 그 분을 가장 많이 믿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열 명의 옛날 고조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담은 930세를 살았습니다. 셋은 912세를 살았습니다. 에노스는 905세를 살았습니다. 게난은 910세를 살았습니다. 마할랄렐은 895세를 살았습니다. 야렛은 962세를 살았습니다. 에녹은 365세를 살았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라멕은 777세를 살았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950세를 살았습니다. 에녹은 그 중에서 제일 단명했습니다. 다른 고조들이 900세 이상을 살았지만 그는 그들의 절반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365년을 산 에녹이 제일 오래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위인들의 무덤은 요란합니다. 엄청나게 크게 꾸며 놓습니다. 심지어 이미 죽었지만 산 사람처럼 자는 듯이 만들어 놓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레닌, 중국의 모택동, 베트남의 호치민, 북한의 김일성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어놓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이 아무리 요란해도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그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계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보존하고, 꾸밀 필요가 없으므로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없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하는 증거입니다.

  피라미드와 같은 무덤은 인류문화에서 인간은 영혼을 굳게 사모한다는 증거입니다. 영혼 사모하는 인류는 무덤을 만들어 부장품을 많이 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주 부장품들이 무엇인지 아세요? 먹는 것을 위한 것들입니다. 그릇, 주전자, 숟가락 등이 제일 많습니다. 그리고 옷이나 장신구들입니다. 거대한 왕릉들은 거의 다 파헤쳐집니다. 도굴꾼들이 부장품들을 다 훔쳐 갑니다. 죽어서도 먹고 살라고 부장품으로 그릇, 주전자, 숟가락 등을 넣어 두었는데 다 훔쳐가니 못 먹고 영원히 죽잖아요? 투탕카멘의 부장품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 전 예루살렘 북방 60마일 떨어진 도단에서 발굴한 2세 아이의 유골도 그 아이와 함께 부장품들이 발굴되었습니다. 4,000년 전의 주전자와 그릇들입니다. 당시의 관습대로 종을 자기 상전과 함께 묻었기 때문에 종의 그릇까지 출토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도 없고 이런 부장품들도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평소에 몇 가지 유감과 아쉬움이 늘 있었습니다. 첫째는 호화 묘지입니다. 살아계실 때 잘 해야지 돌아가신 다음에 묘지를 호화롭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결혼식이나 빈소에 화환들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그렇게 하지만 좀 더 실용적인 것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비싼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는데 너무 비싼 옷은 아이들 자신이 비싼 줄도 모르고 조금만 지나면 못 입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는 음식을 시켜놓고 혹은 뷔페식당에서 너무 많이 가져와 남기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한 끼가 아쉽고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호화 분묘는 지양합시다. 예수님도 가지시지 않은 묘지를 너무 호화롭게 가지는 것은 미덕이 아닙니다. 필요 없는 것들, 중요하지 않은 것에 과용하거나 희생하는 것은 신앙적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둘째,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은 우연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1에는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나타내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과 예수님의 말씀, 이 모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복음서에는 14번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하여 언급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에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성경대로’입니다. 살아나셨다는 말은 ‘에게르타이’라는 말로 현재완료형입니다. 이 말의 뜻은 성경에 예언한 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뜻합니다.

  사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생명 때문입니다. 부활하실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생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살아나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에스겔 37장에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마른 뼈들이 살아나고 군대가 됩니까? 생기가 들어가니 살아나고 군대가 됩니다. 생기는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숨을 주셨습니다. 제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부활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35에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58에는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부활하면 영원히 삽니다. 영원이란 시간 속에 부활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지 않으면 영원하지 못합니다.

  계시록 2:8에는 서머나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영원히 사실 분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살지 못할 것 같으면 말도 못합니다. 말을 해도 듣지 않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죽음이라 말씀하지 않고 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주님이며,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장례식을 집례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만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블랙우드(Andrew Blackwood)는 부활사건 이후 신약에서 염세적인 구절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큰 외손자가 초등학교 1학년인데 요즘 자동차를 알아서 세계 최고급 자동차만 섭렵하고 있습니다. 페라리와 롬바르기니를 좋아해요. 이걸 자기가 사겠다고 하네요. 그런데 한 번은 “할아버지도 이 차 좋아?” 그래서 그렇다고 하니 저도 한 대 사준데요. 저에게 사준다고 해도 탈 수는 없지요. 타면 시험 듭니다. ‘뉴스 후’에 데뷔할지 모릅니다. 사준다니 고맙지만 전혀 기대하지는 않아요.

  찌들게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게 해주겠다고 하면 믿어집니까? 병약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건강 강좌를 한다면 호소력이 있겠습니까? 자기 팔자도 피지 않는 사람이 남의 팔자를 봐준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점쟁이들의 말이 다 믿어질까요?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께서 경제를 확실히 살리겠다고 하니 믿어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면 안 믿어지지만 경제를 아는 분이니까 믿어보고, 기대하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게 하겠다고 하면 믿어지고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살아나신 분이니까요. 자기도 못살고 죽은 사람이 영원히 살게 하겠다고 했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분이 준다면 믿어도 괜찮습니다. 살아나신 분이 영생을 말씀하니 믿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활은, 영생은 확실하고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결론 

  부활을 믿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옛날 일본의 영토였던 유구열도 아마주사에서 거대한 무덤을 한 선교사가 발견하였습니다. 발견된 돌 위에는 “여기 11,111명의 그리스도인의 머리가 묻혀 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1937년에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살 것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따로 잘라 무덤을 만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할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부활은 본능일 뿐 아니라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미래적 확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부활의 증거이며 첫 열매입니다. 이사야 26:19에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52에는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24에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것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한 결 같이 미래적 부활인 우리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보세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굉장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고백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 삶의 확실한 활력입니다. 우리 죽음의 확실한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소망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게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의 사업, 우리의 가정, 우리 육체의 건강의 부활도 함께 우리들의 현세의 은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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