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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우리에겐 승리의 노래가 있다 (요 20:2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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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승리의 노래가 있다 (요 20:21- 23)

“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우리의 고백이요, 찬양입니다.
여러분 모두 부활 신앙으로 죽음의 권세도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아는 것과 부활 신앙을 가지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알고 있을 것입니다.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안다고 부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던 제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죽는다 하여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는다고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아멘!” 하는 성도들 중에 부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부활한 예수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이 여러분 안에 있고 그것 때문에 어떤 고난을 당하고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알고 또 믿지만 그 부활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정말 자신 없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제자들이 바로 부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낙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부인하고 도망갔던 죄책감 때문에 예수님을 피하여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사람들에게 전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안 믿으면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나갔다가 붙들려 옥에 갇혀 매맞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집 바깥으로 나올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뭐하고 있어? 빨리 나가서 나의 부활을 전해야지!”하고 몰아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나가지 말라고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는데, 기다리기는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합니까? 성령님이 오시기 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아직도 부활 신앙이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입니까“ 내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분병히 믿는 것과 함께 성령님께서 내게 임하셔야 부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고 비로서 내 증인이 되라라”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은 권능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 그것을 내가 믿는다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고 권능과 관련이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가 않는 것은 권능과 관련이 있는데 그런 권능은 성령이 임하시면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신앙은 부활의 믿음 위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내가 그동안 알고 믿었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내 인생 전체를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니 그들의 신앙이 달라졌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것은 결심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직 영생의 눈이 뜨여야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였을 때, 제자들은 비로서 영생의 확신이 생겼고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영생, 천국, 부활, 그 전에도 이미 수없이 들었던 말입니다. 그러나 조그만 유혹이나 시험거리 하나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 영생에 대한 눈이 열려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구나. 영생이 분명히 있구나. 부활의 영광을 성령의 역사로 분명히 눈을 떠야 비로서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확신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우리가 누리는 가장 놀라운 역사가 부활 신앙인데,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 나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짐과 동시에 가장 놀라운 일이 평안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혼자서 조용히 묵상할 때 내 마음 속에 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자신들을 죽이려하는 사람들 앞에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순간에도 계속되는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강을 주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제 너희를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 앞에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혼자서 조용히 묵상할 때 내 마음에 임하는 평안이 아니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임하는 평안을 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으로 주시려는 역사입니다.
이 평강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가능한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였습니다. 부활 신앙의 핵심은 죽음도 흔들 수 없는 평안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지면 어떻게 죽음도 두렵지 않고 평안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 안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무엇이 또 두렵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고 다시 사는 사람입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기에 죽음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까 더 이상 죽는 것이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부활 신앙을 갖지 못했구나 여전히 죽는 것이 두려워하신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분명하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너는 정말 믿느냐?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초대 교회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폭군 네로 황제의 무서운 박해를 피하여 카타콤베라 부르는 지하 무덤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카타콤베가 만들어진 곳의 토양은 응회질이라 부드러워 맨손으로도 파낼 수 있지만, 일단 공기가 닿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응회암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시체의 썩는 냄새와 썩은 물을 완벽하게 흡수하기에 산 사람들이 지하 묘소 속의 지하도를 왕래할 수 있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죽은 것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카타콤베에서 살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죽음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거기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면서 그들은 진짜 부활의 주님,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죽음 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님을 좇아 진리를 따라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신들을 핍박하는 로마를 복음화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부활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 역사학자는 로마의 초대 교회 성도들은 박해 때문에 카타콤베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카타콤베에 들어 갔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상처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상처받기 쉬운 자아를 붙잡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역그 말은 너무 형편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역시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기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답답하고 절망스런 처지에 지금 있습니까? 어둠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에 눌려 지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반드시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여러분, 이것이 우리 영혼이 사는 길이고 우리 가정이 사는 길이고 그리고 우리 인생에 예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길입니다. 부활 신앙은 십자가가 분명한 사람에게 오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떤 처지에서도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부터 샘솟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약 1:1-2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사실은 말도 안되는 교훈이지요. 여러 가지 시험이 생기면 어떻게 온전히 기쁠 수가 있나요? 내가 주인인 사람은 이해가 안되지만 예수님이 내 주인인 사람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에게 이길 수 없는 시험, 결딜 수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운 일이 계속 닥치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고난이 닥칠 때, 두 종류의 “또 왔네!”가 있습니다. 첫째는 괴로워서 “고통스런 일이 또 왔구나!” 탄식이 있습니다. 둘째는 기뻐서 “또 왔구나! 축복의 기회가 또 왔구나!” 하는 믿음의 감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괴로울 때 괴로워하고, 기쁠 때 기뻐한다면 부활을 믿는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마음에 오직 하나의 소원만 있었습니다. ‘영생의 복음, 부활의 소식을 전해야 하겠다.’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23절)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제자들에게 그저 전도하러 나가라! 나의 부활을 이제는 전하러 나가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들이 이제 나가서 누구죄든지 사하면 사함을 받고 그대로 두면 그들의 죄가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주시니까 그들이 그렇게 사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권세가 보통 권세입니까?
사람을 죄와 저주에서 건져낼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나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아, 지옥에 갈 자가 천국 백성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님을 받고 나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 것은 단순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죽었던 예수님이 살아났어요.” 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전한 부활 메시지는 사실상 전도 메세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성경의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신 후 승천하셨지만 약속대로 성령으로 다시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성령이 임하실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듣고 하루에 3천명씩 5천명씩 구원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놀라운 권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병을 고쳐주는 일도 말할 수 없는 보람입니다. 경제적인 궁핍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일도 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돕는 호스피스 사역도 그 보람이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죄도 사해주고 영원히 지옥에 갈 자를 천국 백성되게 하는 일은 어떻겠습니까? 엄청난 축복이지 않습니까? 내가 한 사람의 죄를 사하여서 그 사람이 지옥 가지 않고 천국갈 수 있는 권세를 받았다면 무엇으로 설명해야 되지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열망 하나 가지고 뛰쳐나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누구든지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는 죄에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제자들은 더 이상 집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명의 복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부활 신앙은 사명이 축복임을 깨달은 신앙입니다.
성도들은 누구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영국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지도자였던 챨스시므온은 유명한 목사님입니다. 엄청난 반대 속에서도 케임브리지 대학 내의 성삼위 교회 강단에다 성경 말씀을 되찾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십니다. 

  어느 날 그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늘 대학 내에서 많은 불평과 경멸의 목표가 되어버린 나는 많은 논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나머지 조그만 신약 성경 책을 손에 들고서는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 하나로서 위로해 주시면 좋겠다고 기도하였다. 그리고서 성경을 펼쳤더니 바로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는 구절을 보게 되었다. 시몬은 나의 이름 시므온과 같은 것이므로 이 말씀이 내가 필요로 하는 말씀이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다니 얼마나 큰 특권인가?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기뻐 펄쩍 펄쩍 뛰면서 '주님 십자가를 내게 지우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때부터 핍박은 나의 이마에 둘리어진 영광의 면류관이 되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성경대로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통치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에 전도자를 잡아 가두고 죽이면 기독교는 없어질 줄 알았습니다. 전도할 사람이 없는데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겠는가? 복음의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다는 것을 그들이 몰랐습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것은 사람인 전도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여도 교회는 더 부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부흥과 전도의 역사가 사도들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전도하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련 작가 솔제니친은 스탈린 치하에서 체제를 비방하는 반역자로 몰려 시베리아 집단 강제 수용소에서 특별 범죄자로 구분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식구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자신은 하루 열 네 시간씩 노동하고 병까지 들었습니다. 암에 걸렸습니다. 매일 계속되는 혹독한 추위와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마침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죽으려 해도 죽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수가 모여 있는 시간에 출구 쪽으로 도망가는 행동을 하여 간수가 그를 쏘도록 계획하였습니다. 

  어느 날 결심하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빠져 나가 철조망 쪽으로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혀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 앞 길을 막고 앉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에 십자가를 그어주며 그것을 바라보라고 한 후 가는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걸음을 멈추고 그 십자가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는 이미 십자가를 아는 지식인이었고 성경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솔제니친은 그 사람이 바닥에 그어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에 알지 못하는 힘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임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놀란 솔제니친은 그가 예수님이 보낸 천사라고 생각하여 탈출 시도를 중지했습니다. 

  그 때 그 수용소에 코른벨트라는 젊은 유대인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도 스탈린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했다고 해서 체포를 당한 사람인데, 한 그리스도인의 간절한 전도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에게 많은 박해를 당하던 터라 처음에는 예수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얼마 후 모진 고문에 의해 죽은 사람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는 숨을 거두며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합니다. 나를 받아주시고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그 순간 코른벨트는 강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그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가 예수를 받아들이고 영혼의 자유와 평안을 얻고 나서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는 이 놀라운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결심이고, 또 하나는 나에게 기쁜 소식이었던 이 복음을 나도 전하면서 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수용소 안에 온갖 부정이 횡행하였지만 그는 의사로서 일체 부정한 일에 협조하지 않고 신앙인답게 살아갔습니다. 

  그 때 암으로 고생하는 솔제니친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수술 환자 명단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사는 그를 수술하기로 결심하고 수술을 했습니다. 마취제도 없고 진통제도 없이 수술해 놓고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밤새도록 옆에 앉아 간호해주며 자신이 만난 예수를 전했습니다. 아픔 속에서도 솔제니친은 누워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이 알려지자 규칙을 어겼다고 해서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박해가 왔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이 의사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집단 수용소 안에서도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그 부활의 역사는 솔제니친을 통하여 세계 모든 사람에 증거되었습니다. 

때때로 마귀 세력이 우리를 무섭게 합니다. 너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지면 언제나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노래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것이 우리의 노래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미 우리 안에 승리의 노래가 터져 나오게 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이미 들어서 알지만 성령님으로 제게 오시옵소서. 그래서 제가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하여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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