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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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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17-27)

부활절을 맞아 예배하는 여러분들께 부활의 신앙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기쁨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소망이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콘택트」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됩니다.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도와준 신부님이 어린 엘리를 위로하느라고 많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만 그 깊은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란다.” 이렇게 위로하려고 들지마는 엘리는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사인은 이렇습니다. 아버지는 본래 심장병이 있었습니다. 자주 발작을 하고 어려운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심장약을 먹어서 진정시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 때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문은 닫혀 있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은 약을 먹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엘리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화장실에 심장약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섭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 오직 화장실에 심장약을 준비해 놓지 못한 탓이다, 만일에 거기에 심장약을 준비해놓았더라면 아버지는 안돌아가셨을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죽음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죽음은 결코 사고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안죽을 것인데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어떤 일로 인해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원망합니다. 아쉬움도 있고 유감도 있고 때로는 일생토록 풀지 못하는 한이 있습니다. 안 죽을 것인데 그 때문에 죽었다, 합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을 품고 한평생 그 한에 시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의 우리문화 속에, 생활풍습 속에 아주 좋지 못한 악습이 있습니다. 죽은 자의 죽은 원인, 사인(死因)을 산 자에게 묻는 못된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어미 없는 어린아이가 막 웁니다. 아이들이야 우는 것이 버릇이고 우는 것이 상투적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우는 것을 보고 “저놈이 저러니까 지 애미가 죽었지”합니다. 남편을 여읜 사람,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어렵게 어렵게 삽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어쩌다 마음에 안들면 “저것이 저래놓으니 생때같은 내 아들이 죽었지.”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죽은 자의 사인을 산 자에게 묻는 못된 문화적 버릇이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여러분, 죽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죽음의 보편성을 인정하여야 됩니다.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여야 됩니다. 누구나 죽고, 언제나 죽고, 다 죽습니다. 거기서부터 생각을 하여야 됩니다. 좀더 깊이는 그 사건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음을 아는, 그러한 생각을 하는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큰 드라마,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요, 때로는 이해가 잘 안될 때가 있더라도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서 그 죽음이라고 하는 사건 깊은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다고 하는 것도 알아야 되고 또 알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죽음이라고 하는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믿고 알 수 있으면 얼마나 더 소망적이고 능력있는 생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있음을 믿고 또 믿을 수 만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평안한 생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 없으시어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시어 내가 이렇듯 애달프게 간구하는데도 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나의 사랑하는 자를 데려가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오히려 기도의 응답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사로라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나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서는 이 사람이 기둥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가정으로 말하면 좀 이지러진 가정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손녀... 이렇게 있어야 정상적인 가정이라 하겠는데 이 집은 오빠가 있고 누이동생 둘이 있습니다. 이것부터가 사실은 불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 오라비된 책임이 막중합니다. 그런데 이 오라비가 죽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성경은 증거합니다. 3절에 보면,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11:3).” 주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신 사람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만나신 사람들 중에서 제일 사랑하시고 또 사랑을 받으신 사람이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이 집에 유숙하신 것같습니다. 나사로네는 그때마다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가정의 가장 중요한 자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높은 차원의 말씀입니다.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병들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은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누이동생들이 와서 제 오빠를 치료해주시기를 청했을 때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다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15절)”의 표현입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갔더라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지, 병 고쳤을 터, 그럼 안 죽었을 터, 그런데 내가 안 갔기 때문에 죽었다 - 오히려 그렇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저 앞에 있는 것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불평투로 하는 말 좀 들어봅시다.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 애닯게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음을 기뻐하노라, 말씀하십니다. 

스티븐 코비라고 하는 교수가 쓴 「소중한 것 먼저하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First Things First」 - 이 책에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나옵니다. 어느 교수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숫제 실물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커다란 쇠통을 갖다놓고 통을 큰 돌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이제 이거 가득찼는데 여기에 다른 것을 더 넣을 수 없을까?” 더 넣을 수 없겠다고 학생들이 대답하자 교수는 자갈돌들을 틈틈이에 넣었습니다. 자갈돌들이 큰 돌들 사이사이에 하나둘 들어갑니다. 한참이나 들어갑니다. “이제 다 찼을까?” 이제는 더 채울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학생들이 대답하자 그는 “아니다”하고 이번에는 모래를 갖다 넣습니다. 모래가 술술 들어갑니다. 여기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대답합니다. “틈새는 항상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큰 돌들에는 자갈돌 들어갈 틈이 있고 자갈돌들에는 모래 들어갈 틈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다”하고 교수는 말합니다. “이것은 큰 돌을 먼저 넣었기 때문이다. 가령 모래를 먼저 넣었다면 그 뒤에 아무것도 더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 무엇부터 생각하느냐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세상을 생각하고, 인간을 생각하고, 죽음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안 죽었을 건데요, 이렇게 말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부활부터 생각하십니다. 영원한 생명부터 먼저 생각하시고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하시고 또 “이 자리에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라” 말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그것부터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24절에서 마르다는 말합니다.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육은 죽지만 영은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영혼불멸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큰 오해가 바로 이 immortality입니다. resurrection과는 전혀 다릅니다. 영혼불멸이라고 하는 것과 부활은 다릅니다. 영혼불멸은 일반적인 것이고 자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부활이라는 것은 차별적이고 그리스도적인 것입니다. 오늘 25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부활이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만이 부활이요, 그리고 예수님께 연합한 사람들에게 그 부활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적 생명을 생각합니다. 이것은 차별적이고, 구원론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생명의 문제, 다시 정리해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먹고 자고 입고 살다가 언젠가는 심장이 멎고 호흡이 멎고 뇌파가 멎으면 죽습니다. 생리학적 생명입니다. 그리나 우리에게는 영적 생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 그것이 살아 있어서 우리 몸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육체의 생명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부활 생명을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독립운동가, 정치가, 외교관, 교육가이자 교회에서는 장로님이었던 이상재(李商在) 선생에게 일본의 어느 기자가 짖굿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간디는 평소에 스스로 백세까지 산다고 늘 말하였는데 선생님은 몇 살까지 사실 것 같습니까?” 그러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한 번 났으면 영원히 살지 죽기는 왜 죽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정신을 말하는 것이고, 영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목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덕적 변화, 때로는 이것을 부활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참 부활이란 그리스도적 생명의 차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신령한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음과 현실을 다 흡수해버리는 온전한 생명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느 집에 무남독녀 외딸이 있었는데 하도 개성이 강하고 고집이 세어서 그 아버지 어머니도 그 딸이 늘 걱정이었습니다. 저거 시집갈 수 있을까, 저거 사람 될까 - 그런데 어쩌다가 이 딸에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더니 이 딸은 그 부모의 표현대로 늑대가 양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온순해졌는지 “쟤가 저렇게 달라질 줄 몰랐습니다.” 라고 부모는 감동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더니 이 딸은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공부도 해야겠고, 사업도 해야겠고, 유학도 가야겠고… 그저 뻥뻥 큰소리치고, 남편 앞에서도 나는 나대로 살 거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랬는데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이것 하나 낳아놓고 들여다보니 너무나도 좋은 것입니다. 그 바람에 자기생각 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고보니 딴 생각은 온데간데 없는 것입니다. 그저 행복하기만 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중생’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생, 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을 보면서 그 생명으로부터 내 존재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될 때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 알아야 합니다. 자, 한 생명을 만날 때 이렇게 사람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겠습니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과 현실을 다 흡수하고 초월하는 창조적 생명력이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의 부활에 하나가 되므로 나의 생명도 부활하게 되는 원리를 말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후기 작품인 「에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느끼지 않고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객관적 관찰만을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여러분, 보고 알고 느끼고 감격하고 거기에 생명을 위탁할 수 있을 때 이것이 참 신앙이요 참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과 오순절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오순절 없는 부활절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객관적 사건인 부활이 성령의 역사 안에서 주관적으로 나에게 와서 확 부딪힐 때, 체험될 때 부활생명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생명이 죽음을 흡수해 버리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흡수하고 부활이 사망을 흡수하고 소망이 절망을 흡수해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부활생명과 함께할 때 온전한 부활생명의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 주도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믿어서 영주도적 인간으로 살고 또 영주도적 인간이 이제는 생명주도적 인간으로 삽니다. 사망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부활생명, 그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부활신앙을 얻고, 부활신앙이 확실하게 우리의 온인격을 사로잡을 때 부활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거듭거듭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세상을 보는 눈,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 그리고 부활생명,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여러분이 이 부활을 믿는다면 이제는 우리도 부활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육체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극복하고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를 육체 주도적 삶에서 영주도적 삶으로 부활 생명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 같이 세상을 이기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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