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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한복음 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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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완성하시기 위한 자신의 마지막 사역 즉 십자가에 달려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할 일만 남기고 계실 때 그 일을 암시하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하시는가 하면(요14:12)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고도 하시고,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요14:19)는 알쏭달쏭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16:12-13)고 하셨지만 그 말씀은 더 이해하기 어렵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앞서 하신 그 말씀을 또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절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그러자 제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했습니다(본문 17-18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날이 임박했으며, 그러나 곧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인 줄을 제자들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의 그 가려움을 긁어주셨습니다. 본문 19-20절입니다: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셔서 대답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즉 당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하겠으며 예수님을 미워하고 제거하는 데 성공할 세상은 기뻐하겠지만 그 슬픔과 기쁨은 머지않아 곧 뒤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고, 그것을 목도한 무리는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갔지만(눅23:48), 예수님께서는 사흘 째 되는 날 새벽에 무덤에서 살아 나오시고 그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모인 곳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는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셔서 제자들을 기뻐하게 하신 것입니다(요20:19-20).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 말씀의 뜻을 그렇게 풀어 설명해주시고는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본문 21절의 말씀입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비유말씀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여인들은 모두 아이를 가진 사실을 확인하는 그 순간부터, 그리고 점점 몸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아이를 날 때 겪을 고통에 대한 근심에 싸이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후의 그 기쁨을 생각하며 그 근심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이를 낳은 후에는 낳을 때의 그 끔찍했던 고통은 어느새 잊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기쁨은 이렇게 그를 따름에서 오는 그 어떤 고통도 다 잊게 할 만큼 큰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의 비유가 갖는 의미는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가 오시고 새 이스라엘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는 사고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예수님의 이 비유말씀을 듣는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통해서 단순히 당신의 죽으셨다가 다시 사심에 대해 설명하려 하셨다기보다는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당신께서 참 메시야이심을 확정적으로 알리시며 새 이스라엘의 탄생 즉 당신께서 생전에 전하고 다니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사건으로 설명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새 이스라엘의 탄생과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진행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 22절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이 돌이킬 수 없는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우리가 새 이스라엘의 백성이 되는 기쁨의 확고함을 가리키신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근심이라는 것이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그 어떤 세상의 근심걱정과 고통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기쁨이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뜻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본문 23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앞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아 알게 하신다면 더 이상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본문 17절) 하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의 말씀의 뜻에 관해 묻는 일 대신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고 받는 일만 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3절 하반절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서 더 이상 그의 존재와 그의 사역과 그로 인한 은혜에 대해 아무 의심 없이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구하는 것을 다 주실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지 못할 때는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의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기 위한 은혜의 역사임을 바로 깨달아 알게 되면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하나님께 구하고 또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요3:16절에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그 어떤 청도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구하는 대로 다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입니다. 본문 24절을 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정의 사랑을 받는 그런 백성들이 되었음을 확증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무엇이든지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며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다 얻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새로운 마술적 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 때문이며 그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이미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요14:11 이하를 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11-14)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구하는 바를 친히 행하실 것이며 그는 아버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아들의 행하시는 바를 같이 행하시며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자상하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유일하시고 지극히 사랑받으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우리가 원하는 바를 다 얻을 수 있는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할 때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도 있지만 또한 우리가 할 일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또 주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요15:10과 요15:1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항상 그 열매를 맺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무엇이든 다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 해도 구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하는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하셨고, 23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수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하신 소통의 길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예수님 자신이 가르치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의 주권자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신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의 승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거짓과 무지를 파하시고 진리를 드러내시며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기쁨을 끊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한 자들의 궤계와 술수와 거짓 승리가 오래 가지 못하고 무너지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한 세상의 기쁨도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과 근심도 오래 가지 않고 바뀌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근심을 충만한 기쁨,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제 이 세상이 죄악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신 세상으로 바뀌었음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고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게 하셔서 우리에게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을 말씀하시면서 “조금만 있으면”이라는 말씀을 함께 하신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6절부터 19절 네 절 속에 “조금만 있으면”이라는 말씀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대단한 강조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이 길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근심과 기쁨의 교차 또한 순간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본문 20절 상반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곡하고 애통하던 이들은 기뻐하게 될 것이고 기뻐하던 자들은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 근심과 기쁨의 주체들의 뒤바뀜도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조금만 있으면”이라는 말로 “근심”과 “기쁨” 사이의 간격을 표하셨다는 사실은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서 믿음의 인내와 용기를 요구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을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오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결단과 실천과 견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부활신앙을 소유한 주의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악한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며 그의 몸 된 교회를 헐뜯고 짓밟기를 기뻐하는 오늘날 그로 인해 우리의 근심이 크다 할지라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고 확장시키기 위한 해산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부활신앙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다시 한 번 확고히 다지는 이번 부활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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