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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수용의 은혜 (막 3: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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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의 은혜 (막 3:13-19)

  지난 2월 25일은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한시대가 가고 이제 또 다른 시대가 오는 역사의 교착 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명박 정부와 대통령에 대해서는 앞으로 5년이 지난 뒤 국민과 역사가 평가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의 임기가 끝나는 지난해부터 평가가 줄을 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난 5년 동안의 참여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을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사실 억울한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은 대통령의 권위적인 모습을 탈피했고, 퇴임후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는 것이 역대대통령과 다른 소박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참여정부는 마의 벽이었던 주가지수 1000을 넘어 2000을 돌파했고, 수출은 300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경상수지는 5년 연속 흑자였으며, 그리고 물가는 비교적 3% 이내로 안정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국민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대선의 결과가 이를 잘 반영해 주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에 대해 어느 한 신문사의 칼럼은 그 중요한 이유를 노무현 대통령은 통합의 정치 대신, 배제의 정치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대선전이 전개되던 2002년 9월 한 강연에서 느닷없이 ‘미국에 안 갔다고 반미냐, 반미면 어떠냐’고 말해 미국을 놀라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을 배제한 것입니다.  2003년 9월 전남 언론인과의 오찬에서는 ‘호남 사람들이 내가 예뻐서 찍었느냐, 상대 후보가 싫어서 찍었지’라고 말해 호남을 난감하고 처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에도 기업인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갔습니다.  또한 그는 강남과 부자를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미국을, 호남을, 기업인을, 그리고 부자를 배제하다보니 어느 순간 국민으로부터 멀어졌고, 그것이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 신문은 이것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제목을 달았습니다.   ‘배제의 정치는 실패한다.’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그리고 이번 한주간은 고난주간으로 보냅니다.  평상시에도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보내야 하겠지만, 이번주간은 더욱 주님의 발자취와 그분이 보여주셨던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 보내는 시기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은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배제가 아니라 수용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싫은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주장에 의해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 정치만이 아니라 모든 삶에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었던 은혜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있는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12제자입니다.  바로 본문에 소개된 사람들입니다.  여기 소개된 제자들은 한마디로 제각기 다른 사람들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골라도 이런 사람을 골랐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당시 12명은 예수님의 성품이나 인격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고, 서로를 향해서는 더욱 화합하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몇 가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출신 지방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땅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남쪽을 예루살렘지방이라 불렀고, 북쪽을 갈릴리지방으로, 그리고 중부를 사마리아지방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들 지방은 서로의 알력과 갈등으로 골이 아주 깊었습니다.  북쪽이나 남쪽 사람들은 중부지방의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혼혈족이고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쪽과 북쪽을 왕래할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그들은 일부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쪽과 북쪽은 사이가 괜찮았을까요?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남쪽은 부유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상대적으로 북쪽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남쪽사람들은 북쪽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북쪽사람들은 남쪽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늘 피해의식에 사로잡혔고, 그들을 적대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 땅의 모습입니다.  크지도 않은 땅에 이처럼 지방색으로 갈라져 좀처럼 화합하기가 힘들었고, 서로를 수용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제자들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제자들은 북쪽 갈릴리 출신이었지만, 가룟유다는 남쪽지방 출신이었습니다.  가룟유다가 그런 면에서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북쪽도 남쪽도 누구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모두를 수용했습니다. 주님에게는 지방색이라는 것이 결코 없었습니다. 기도하면서 필요한 일군을 세운 것입니다.

주님은 북쪽도 남쪽도, 유대인도, 사마리아인도, 심지어는 이방인도 수용했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바돌로메나 작은 유다와 같은 사람은 당시 엘리트에 해당하는 박식한 사람입니다.  무화과 나무아래에서 성경과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사람은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더욱 못 배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종교인들은 베드로의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을 봅니다.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주님은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다 수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갈릴리지방에서 고기를 잡으며 하루를 연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고기가 잡히면 그날은 살고, 못 잡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너무도 가난했고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제자 가운데 마태와 같은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넉넉하고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당시 세리는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넉넉했습니다.  주님은 모두를 다 수용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주님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들의 성격도 다양했습니다.
본문에서 성경은 야고보와 요한을 ‘보아너게’라고 그 별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아너게라는 말은 ‘우뢰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만큼 거칠고, 강하고, 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지방에 가셨을 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자 이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다 쓸어버리자고 제안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렇게 거친 사람들이 나중에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모두 부드러운 사람들이 되긴 했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들에 비해 제자가운데 안드레나 빌립과 같은 사람은 온순한 사람, 조용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들입니다.   한쪽에서 화를 내면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한쪽에서 소리를 지르면 조용히 앉아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거친 사람도, 조용한 사람도 다 받아드렸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정치색의 차이도 다양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처럼 제자 중에도 보수와 진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시대에 대표적인 정치 집단 중에 열심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압제에 있는 유대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 결성한 진보적인 정치 단체입니다.   이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여기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몬과 다대오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처음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게 된 것도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를 구원한 정치적인 메시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너무도 선명한 정치색깔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보수 성향을 가진 다른 제자들과 잘 맞지 않았습니다.  열심당원을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대부분 정치와는 무관한 제자들이었고, 마태와 같은 사람은 보수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도저히 화합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모두를 수용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주님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배신자까지도 수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열두 명의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를 잘 압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또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당시 십자가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수제자로서 완전히 스타일을 구긴 사람입니다.  말이나 앞서지 말 것이지 그는 누구보다도 말로서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이에서 섬긴 인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주님을 배신해도 자기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
자들도 주님이 잡히실 때 대부분 스승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던 비겁자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수용하고 받아줄 수 있단 말입니까?  앞서서 말한 모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바로 배신자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달라도, 출신이 달라도, 가진 자나 없는 자도 어쩌면 그냥 덮어두면 갈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신자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수용하기란 힘듭니다.  조폭세계에서는 배신자를 가장 무섭게 다룬다고 합니다.  신뢰를 깨는 것이 가장 참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세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는 배신자를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요, 우리가 경험하는 현장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수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수용의 은혜를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사건이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족식이요, 다른 하나는 성만찬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이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주님은 잠시 후 그 24개의 발이 어떻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결과를 알고 사랑하기란 힘든 것입니다.  모르면 그래도 넘어갈 수 있지만 알면서 섬기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힘든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배신자들이지만 수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족식이 거행되는 성경을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아도 가룟유다를 배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주님의 배제하지 않는 사랑과 모두를 수용하는 행동은 성만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제 우리가 이번 주에 성찬예식을 행합니다.  그것은 분명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에서 머물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 주님이 성찬예식을 행한 대상자는 바로 제자들입니다.  그 제자들은 곧 주님을 배신하고 떠날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떡을 떼어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잔을 들고 받아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성만찬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역사와 기독교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되고 지켜져야 할 가장 중요한 예식입니다.  또한 주님이 조금 후에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야 하는 몸이요, 피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아시면서, 또한 영원한 의식을 처음 규정하면서 배신자인 제자들에게 받아먹으라고 하신 것은 그들을 한번만이 아니라 영원히 용서하겠다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흘린 피와 찢긴 몸으로 모두를 수용하겠다는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주님은 그 어떤 사람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나온 모든 사람을 수용했습니다.  그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우리가 가장 귀하게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특히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가장 크게 기억할 주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수용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이 은혜 때문에 바로 지금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주님에게서 수용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몹시 실망시키는 자요, 아프게 하는 자요, 탄식하게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용납하셨습니다.  배제하지 않고 수용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주님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겠다는 은혜의 상징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모두를 수용하며 부르셨습니다.  직위를 막론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인종을 떠나서, 심지어는 주님을 실망시키는 배신자라도 수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받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기에 우리도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누구도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외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고, 상처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멀어진 자들이 없어야 합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때에 혹이라도 우리에게서 멀어진 자가 있나 살펴야 합니다.  모두를 수용하고 용납하는 통합의 신앙, 수용의 삶으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미국 대통령가운데, 미국의 정치인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미국 역사상 링컨만큼 뛰어난 지도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은 2월 12일인 링컨의 생일과 워싱턴의 생일은 22일을 기념하여 2월 셋째 주 월요일을 대통령의 날로 기념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링컨에게도 천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링컨의 변호사 시절부터 줄 곳 함께 했던 에드윈 스탠톤(Edwin Stanton)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링컨을 향해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 혹은 ‘고릴라의 원종’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는 막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
나 링컨은 그를 내각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참모들은 원수 같은 스탠톤을 기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의 추진력이 당시 난제인 남북전쟁을 해결할 최대의 적임자라고 말하면서 그를 용서해 주었고, 수용했고, 최대의 예절로 그를 대해주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읽은 스탠턴은 그 뒤 링컨과 미국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수고했고,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남북전쟁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링컨대통령이 암살자의 흉탄에 맞아 쓰러졌을 때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이 스탠톤이었고, 제일 많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 사람이 스탠톤 장관이었다고 합
니다.  그는 링컨대통령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면서 ’여기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통합의 힘, 수용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개인과 공동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가를 보게 합니다.  배제의 정치는 실패하지만, 통합과 수용의 사랑은 개인을 넘어 민족공동체에 큰 역사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수용의 은혜, 이것이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주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십자가로 가까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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