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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어찌하여 우느냐?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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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우느냐? (요 20:11~18)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모두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주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울다가도 춤을 출 수밖에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메시지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는 주일날, 이류 역사상 가장 먼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눅8:2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 아닙니까?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노리개감으로 버려진 쓸모 없는 막달라 마리아였지만, 세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주님은 그를 있는 모습 그대로 끌어 앉아 주셨습니다. 그 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늘 자신을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살았던 그녀는 남들이 다 도망가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의 현장에서도 결코 주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발라드릴 향유를 준비해 가지고 남들이 무서워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무덤을 향하여 새벽에 길을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무덤 앞에 이르자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은 무덤이 열린 채 마땅히 그 속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는 없어진 시체를 확인하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립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없어 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누가복음 24장 11절에 보면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주님의 부활을 깨달아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의 말을 허탄케 여기며 믿지 않았습니다. 허탄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빌 虛' 즉 아무것도 없다는 '허'와 '거짓 誕' 혹은 '속일 誕'으로 이루어진 '허탄'이란 말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생시에 그토록 강조하셨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생각치 않았습니다.

3년 동안이나 주님의 제자로 주님을 따랐건만, 그리고 주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그 엄청난 사실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건만, 심지어 제자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 역시 빈 무덤의 현장까지 왔지만, 어느 누구 한사람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안타깝게도 주님이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당시의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였던 사를르드 푸코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한때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장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하여, 상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며 사는 군인으로 있다가 회의를 느끼고 제대를 합니다. 그리고 수도사가 되어 당시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베스로 들어가, 1916년 12월 한 토착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5년 동안 그곳에서 그곳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사하라의 불꽃'이란 책 속에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오늘 이 아침!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푸코의 답변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푸코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부족함 없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우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를르 드 푸코'는 크리스천들이 이처럼 결정적일 때 오히려 비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보다는 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오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시 빈 무덤을 찾은 마리아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11절 상반 절에 보면 "마리아는 무덤밖에 서서 울고있더니" 여기에서 `울다'는 동사 klaio는 단순히 울먹이거나 혹은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을 치며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 간장이 끊어지듯 애곡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되돌아간 막달라 마리아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애곡하였습니다. 이른 새벽 아직까지 거의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각에, 골고다 언덕으로부터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울려 퍼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다는 창녀였기에 남편도, 자식도, 번듯한 친구 한 명도 없었을 그 가련한 여인이 울부짖는 애곡 소리는 얼마나 애절합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그렇게 통곡하고 또 애곡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염없이 우는 여인을 향해 13절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는 이 음성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의 음성이 아닙니까?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모습이셨고 음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묘지 관리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마리아야!! 동산지기라면 마리아의 이름을 알겠습니까? 그제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뵙는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표현이 있습니다. 17절 상반 절에 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여기에서 '만지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을 때에 가만히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유독 '나를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계속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눈앞에 저 처절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그리고 무참하게 죽으신 그 주님이 이처럼 다시 살아났는데 그 감격, 그 기쁨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고서 너무나 기뻐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진 것입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앞으로도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이 순간에 집착하거나 머무르려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길로 제자들을 찾아가 외쳤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지 순례를 하는 동안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다니면서 보았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사막 같은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뜨문뜨문 앙상한 나무 몇 그루가 갖은 풍상을 힘겹게 벼텨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뿐 너무나 비참한 먼지만 날리는 모래밭 같은 곳이었습니다. 모래 속에서 꽃이 필수 없는 것은 모래는 생명인 물을 머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무리 물을 뿌려 주어도 이내 흘러 내려 버리거나 금방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생명을 머금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모래밭은 언제 어디서나 황폐함과 죽음의 대명사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창녀와 같은 인생으로 살던 그에게 부활의 참 생명을 머금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심령이 생명으로 충만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막달라 마리아의 그 변한 참 생명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녀의 여생이 얼마나 값지고 보람되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자기에게 부활의 승리를 주신 예수님을 본 마리아는 그의 삶의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아마 성경은 그를 더 이상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사는 동안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는 감격을 세상 앞에 아름답게 드러내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우리 모두가 부활을 기뻐합니다만, 이제 우리의 숙제가 있습니다. 과연 나도 이런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확신이 서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두 주간 새벽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은 향나무처럼 사셨습니다. 향나무는 찍혀도, 찍혀도 향을 발합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을 발라줍니다. 향나무는 흉기를 향기로 바꾸어줍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용서의 향기였고 사랑의 향기였습니다. 축복의 향기였고 인내의 향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흉기가 향기로 바뀐 사랑의 현장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을 흉기로 찌른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찌라도 당신의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말없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정로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지름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역설적이지만 가장 쉬운 길이었습니다. 헨리 밀러라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참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에는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자에게 우리가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은, 결국 가장 어려운 길이 가장 쉬운 길이라는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이 곧 부활의 길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이 마치 제철을 만난 듯이 이리저리 교회를 흔들고,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며 사회도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흔들어대고 있기 때문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숨이 막히지 않습니까?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사건들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어떻게 이제 갖 초등학교를 다니는 여아를 그렇게 난도질해서 이곳 저곳에 버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망과 고통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희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어둡고 암담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낙심하거나 비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존귀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를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고 못 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통곡하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이 부활의 참 기쁨을 그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지난 날 그녀는 자신의 심령이 사막처럼 황폐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에 '부활의 기쁨'을 담기 시작할 때 그는 인생의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로 비관하지 마십시오. 허무를 가지고 한숨쉬면서 눈물을 짓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믿습니까? 할렐루야.

오늘 부활의 이 아침! 부활의 능력을 입혀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타성에 젖은 모든 묶여 있는 것들이 무덤을 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풀려져야합니다. 질병에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물질과 사업이 묶인 것도 풀려지기를 원합니다. 이제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 바람이 우리 가정과 한국교회와 우리사회를 흔드는 모든 세속의 바람들을 무력화시키는 거룩한 태풍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증인 자로 값진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나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세상 앞에 쏟아 놓는 삶이 날마다, 날마다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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