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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은 생명의 능력 (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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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생명의 능력 (요 11:25-26)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셨다. 그렇기에 지금도 살아 계신다. 죽음을 이기는 방법은 부활이다. 부활은 생명의 능력이다. 부활은 창조처럼, 그 핵심이 생명에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독특한 2가지 교리가, 창조와 부활이다.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사람들은 창조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한다. 창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성의 산물인 진화론은,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증거가 전혀 없지만, 오히려 쉽게 받아들인다.

창조의 진리는, 믿음이 없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창조는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이적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진리 하나만 인정할 수 있다면, 부활을 비롯한 예수님의 모든 이적들은,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정도의 이적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만큼 믿기 어려운 것이 부활이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한다. 죽음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성령 받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부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부활은 이해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생각할 때, 어떻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말이 안 된다.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실망하여 엠마오로 내려갔고,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갔다.

부활의 핵심은 생명에 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생명이 임하면 죽은 나무에도 꽃이 피고, 죽은 사람들도 살아난다. 그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들이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죽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도 다시 살아난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어느 날 우리도 살다가 죽게 되면,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부활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하나님의 승리다. 죽음에 대한 승리요, 죄에 대한 승리이며, 사탄에 대한 승리다. 그냥 승리가 아니라,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다. 

1. 부활은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다(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음’이라는 글자는 모든 인류의 비극이다. 인간은 두려움과 공포를 안고 살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이 불행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는 확실하게 죽는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 사실은 너무나 확실하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류는 다 죽었다.

제왕도 죽었고, 영웅 호걸도 죽었으며, 미녀들도 죽었다. 이 세상에 죽음같이 평등한 것이 없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다. 죽음은 왕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5대 독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새색시라고, 새신랑이고 봐주는 일이 없다. 어린이라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 관계를 끊게 만든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으로부터 영원히 나를 단절시켜 버린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죽음이다. 죽음이 결부되면, 유쾌하다가도 심각해지고 만다. 어느 인생이 죽음을 생각할 때 즐겁겠는가? 자신의 죽음으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냉동실에 보관한 후 입관, 발인을 거쳐, 차디찬 땅속에 파묻거나 화장터에서 태워진다고 생각해 보라.

기분이 좋지 못하다. 아무리 자식들이 울어주고, 형제들이 울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걸 생각하면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다. 그러면 왜 죽음이라는 불청객이, 인류에게 찾아오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죄 때문이다.

인류는 죽음을 이겨보려고, 죽음이 법칙을 깨뜨려 보려고, 온갖 몸부림을 다 쳐보았다.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먹고 죽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죽고 말았다. 결국 인간은 죽음의 존재가 되고 말았다.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인류는 무덤 문화를 발전시켰다. 

애굽의 피라미드를 본 사람은,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다. 5000년 전에 만든, 쿠프 왕의 피라밋은 높이가 160m나 되고, 길이가 230m나 된다. 돌 하나가 평균 2.5톤이나 되며, 큰 것은 20톤이 이상이 된다. 이 돌을 어떻게 깎고, 어떻게 옮겨서 무덤을 쌓았는지, 현대 건축학도 감탄하고 있다. 

이런 무덤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 10만 명의 노예가 20년에 걸쳐 만들었다. 얼마나 무덤에 신경을 썼는가? 불로초를 구하려 했던 진시황제도, 그것이 헛된 일 인줄 알고, 무덤 만들기에 치중을 했다. 그의 평생 39년 동안 만들었던 무덤! 정말 대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무덤에 신경을 써왔는가?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무덤 속에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무덤을 죽은 후에 생활공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덤에 애착을 가지고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같은 곳에선 왕이 등극하자마자, 무덤을 만들기 시작한다. 자기 재위기간에 수 십년 동안 무덤을 만든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모든 유품을 무덤 속에 넣어 준다. 자기를 모셨던 신하들도 무덤(피라미드)속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저주스런 죽음의 법칙을 깨뜨리시고, 영원한 생명의 주로 부활하셨다. 물론 나사렛 예수도, 죽음의 독화살을 맞았다. 가장 비참한 죽음, 가장 저주스런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이 어찌나 비참하고 치욕적이었든지, 그가 죽었을 때 따르던 자들이 다 낙망하였다.

그러나 안식 후 첫날 새벽, 마침내 주님의 무덤 문이 열리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죽음의 법칙을 깨뜨리고 일어나셨다. 영원한 사망권세를 박살내시고, 영원한 새 생명의 주로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승리의 흰옷을 입고, 영광의 주로 부활하셨다. 

바로 이 영광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과연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죽어도 사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2. 부활은 영생하게 하는 능력이다(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육이 산 사람이 아니고, 영이 산 사람을 의미한다. 거듭난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육신이 살았다고 하지만, 영은 죽었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영생이 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요10: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다. 죽음은 더 나은 세계로 옮겨가는, 하나의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D. L. 무디가 임종할 때였다.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무디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보라 영화롭도다!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임하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 이렇게 외쳤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여러분,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났다, 할지라도 믿지 마십시오! 무디는 결코 죽지 않았다. 이렇게 하늘로 올려 가지 않습니까?” 그는 환희와 확신에 찬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 어떤 가정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두 아들의 손을 꼭 쥐고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큰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Good bye!(잘 있거라!)” 작은 아들은 예수님을 잘 믿었다. 그에게 이렇게 작별인사 했다. “얘야, See you again!(또 만나자!)” 왜 서로 다른 작별인사를 했나? 큰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까, 그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래서 큰아들은, 어머니가 있는 천국으로 올 수 없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예수님을 믿으니까, 어머니가 계신 천국으로 언젠가는 오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주안에서 만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 안에서만 생명이 있다. 예수님 밖에서는 생명이 없다.
  
아프리카에는 ‘망구스’라는 동물이 살고있다. 이 망구스는 저 무시무시한 코브라 뱀을 공격하는, 코프라의 천적이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다 코브라를 두려워하는데, 이 망구스는 무서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코브라와 싸워서 코브라를 잡아먹기까지 한다.

이 망구스의 몸에는, 뱀의 독을 해독하는 알파뉴로톡신이라는 물질이 있어서, 코브라에 물려서 그 독이 몸 안에 들어와도, 해독할 수 있기에 죽지 않게 된다고 한다.

우리 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피가 우리 안에 있으면, 모든 죄를 다 씻어낸다. 그 죄가 더 이상 우리 안에서는, 독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사망의 삼키는 것도 이길 수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다. 일단 사망이 이긴 것 같다. 그러나 삼일이 못 돼서, 무덤 밖으로 토해내고 말았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키었다가, 물고기가 그를 토해낸 것과 같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단 죽어 무덤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그 무덤 속게 가둬놓을 수 없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토해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부활하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3. 부활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보여주는 능력이다. 

이 땅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말과 종교가 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말이 진리라고 하면, 죽음을 정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 구세주일 뿐이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다. 마호멧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다. 중국 북경에 가면,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라를 보려고, 뱀처럼 길게 줄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소련 모스코바 붉은 광장 한 쪽에는, 레닌의 미라 시신을 보려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부활을 선물로 주신 우리의 생명의 구세주가 되셨다. 빈 무덤을 부활이다. 우리는 주님의 빈 무덤을 자랑한다. 최고의 자랑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확실히 다른 점이다. 빈 무덤은 부활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다.

이 땅에는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하는 자들이 많다. 만일 자신이 구세주라고 하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주장했지만,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부활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구세주가 될 수 없다. 부활하지 못한 자들은 가짜일 뿐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셨다. 부활은 생명의 능력이다. 거짓과 위선과 속임은 오래가지 못하고, 드러나는 날이 온다. 그렇게 드러나는 날, 거짓으로 속인 사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수치와 심판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1,440년 어느 날,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며, 또한 문헌학자였던 ‘로렌조 발라’라고 하는 사람이,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다. 700년 동안이나 진품으로 알았던, 그 누구도, 감히 의심치 않던 콘스탄틴 기증서가 거짓문서임을 밝혀냈다.

로마 교황청의 권위를 드높이고, 로마교회에 막대한 토지소유를 정당화하게 하기 위한 ‘콘스탄틴 기증서’라는 문서가 가짜였다. 그 내용은, 심한 나병에 걸렸던 콘스탄틴 황제는, 자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로마의 감독 실버스타 1세에 의해서 병 고침을 받고 보니, 그 은혜에 감사 표시로 로마에 있는 궁궐의 터와,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많은 땅을 로마 감독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자기의 귀한 것을 아끼지 않고, 모든 땅을 로마감독에게 바쳤으니,

여러분들도 모든 재산을 로마 교황청에,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 바쳐라. 이렇게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그 문서가 가짜였다. 중세시대에 있어, 하나님 교회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교회에서 어떤 것이 결정되어지고, 문서로 남으면, 그것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백성들을 기만하고, 눈속임수로 재물을 착취하기 위해, 거짓 증서를 만들었다. 로렌조 발라가 그 콘스탄틴 기증서를 깊이 살펴보니까, 그때 4세기경에 썼던 라틴어하고 8세기에 썼던 라틴어가 많이 변형이 일어났다.

그런데 4세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8세기에 쓰던 말로 써놓았다. 그래서 거짓으로 드러났다.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께서, 자신도 죽음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다. 나사로의 부활은, 하나님의 기적에 의한 특이한 사건이었다. 

부활의 능력을 보이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참 구원자임을 증명해 주는 일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죽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부활, 약속된, 생명의 종교를 믿는다. 예수님이 계셨기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

결론이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믿음 앞에서 서게 될 때, 모든 문제가 안개 걷히듯이 다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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