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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지금도 향품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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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지금도 향품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눅 24:1~12)

할렐루야!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영생의 소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옆의 분과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작년 12월 말에 인도에서 20대 힌두교 승려가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여러 명의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힌두교 사원에서 독약을 들이켰습니다.
그 승려는 72시간 내에 부활할 것이라며 독약을 마셨습니다.
신자들에 의해 시내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지만 바로 사망했습니다. 
<스포츠한국 2007. 12. 26. 기사 참조>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지요.

부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도덕적인 생활, 선행, 절제, 자비 등은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4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성탄절’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기록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크리스마스 때 카드를 보내고 즐기는 것보다도 
더 기뻐하고 잔치를 벌여야 하는 때가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 째 되는 날(주일) 새벽에
여인들이 향품(향료, sweet smelling things)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 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해지기 전까지 마쳐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하루의 시작은 해가 질 무렵부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례는 시간에 쫓겨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직접적인 친분관계가 있었던 여인들은
촉박하게 진행된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보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예수님 시신에 바를 향품(향료)을 가지고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위 동굴 속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었기 때문에
굴을 막은 돌문만 치우면 시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어떻게 굴릴까’
근심하면서 무덤으로 갔습니다.(막16:3)
그런데 거기 가보니까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고(막16:4)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체’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준비해 간 것도 시신에 바를 향품이었습니다. 
여인들은 귀히 여기며 따랐던 죽은 예수를 위해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에 …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예배하는 자리에 오셨습니까?
아니면 교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주일이면 예배드리러 가야지’하는 도리를 다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부활 신앙>을 가지지 못했다면 …
죽은 예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다를 바 없는 발걸음입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곁에서 고난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상식과 경험만이 
그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도에 따라 절차를 밟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 사람들 중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신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고도 마치 부활을 믿는 것처럼 위장하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목사, 교수들이 많습니다. 
- 19세기 독일신학자 ‘파울루스’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고 무덤에서 혼수상태에 있다가 소생해서 
무덤에서 나와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 역시 독일신학자 ‘스트라우스’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 부활한 것 같은
믿음과 환상이 보여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단지 탈진으로 기절했던 것이고, 
돌무덤의 선선하고 촉촉한 공기에 다시 기력을 회복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지 않으면 성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부터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못하겠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한번 만 설교하면 되는 줄 알고 갔는데 
그 다음 주에도 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 주, 두 주 가다보니 계속 가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은퇴를 하시고 
후임목사님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인데 
제게 아예 담임목사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하려고 왔고 공부를 마치면 돌아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담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매주 설교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담임목사님은 없고, 부목사님 2분, 전도사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목사로 열심히 예배 인도를 했습니다. 
그 해 부활절이 되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힘 있게 설교를 하고 나서 부목사님 두 분과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두 분도 미국에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은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다니던 분이었습니다.
식사 중에 한 분이 제게 
“목사님, 예수님이 육체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목사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느냐고 하는데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설교를 열심히 한 저는
‘예, 물론 부활을 믿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육체의 부활을 믿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대로 육체가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 장로님 5명을 불러 놓고
“장로님들, 저는 이 교회에 설교하러 온 목사입니다. 
저는 담임목사가 아닙니다. 제게는 행정적인 권한이 없으니 
장로님들이 정해 주십시오. 저 두 부목사를 내보내던지, 
제가 다음 주부터 나오지 않겠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목사를 어떻게 교육목사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주일부터 두 명의 부목사님은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절차를 거쳐 목사가 되고 신학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해도 
부활을 믿지 못하면, 가짜입니다.
자기도 못 믿는 사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은 사기꾼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백부장에게 명령했습니다. 
“죽은 지 오래냐?”, ‘진짜 확인해 봐라’
백부장이 확인해 보니 죽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시체를 요셉에게 내놓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믿고 싶지 않았고 부활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에게 돈을 많이 주고
제자들이 밤에 와서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고 증언하라며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했습니다.(마28:11~15)

부활의 증거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를 남겼습니다.
많은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은 예수님이 죽지 않고 기절만 할 수 있을까요?
유대의 장례법 상 몰약에 적신 세마포로 시신을 고치처럼 둘둘 말아 쌌습니다.
세마포로 둘둘 말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설령 기절했다고 해도 
매장 전에 질식하여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입관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베 옷 입히기 전에 구멍 구멍을 다 막습니다. 
살았다 해도 질식해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꼭꼭 묶는 것을 볼 때마다 ‘살아날까봐 묶는 걸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 죄인이 생존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으로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은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것이 사실임을 더 강조할 뿐입니다. 
<박은주 지음, 「십자가의 진실」두란노 발행, p.120.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①“성경대로(사53:, 단9:26, 수13:7 …)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했으며
②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시고 (고전15:5)
③ 그 후 12제자에게 보이시고 (고전15:5)
④ 그 후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 주셨습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쓸 때에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람이 절반이나 살아 있었습니다.(고전15:5)
⑤ 그 후 야고보에게 (고전15:7)
⑥ 그 후 모든 사도에게 (고전15:7)
⑦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도 바울 자신도 보았다고 증거 했습니다. (고전15:1~8)

한 두 명이 보았다면 환상이라고 할 수 있어도
많은 사람이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는데 
어떻게 환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주장도 우스운 얘기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빈 무덤에 
그 몸을 쌌던 세마포만 남았다고 했습니다.(눅 24:12, 요 20:6) 

요한복음(개역)에는 ‘개켜 있다’고 표현했습니다.(요20:7)
즉‘둘둘 말려 있다’, ‘그대로 접혀 있다’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이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가져갔다면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를 벗겨 개켜 놓을 만큼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도둑이 도둑질 하고 집 정리 해 놓고 가는 것을 봤습니까?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제가 여기서 전하는 말씀이나 우리가 믿는 것 모두 헛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남들이 쉬는 휴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시간과 돈 들여 섬기고/봉사하는 … 여러분은 
정말 불쌍하고 한심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이 없다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순교자들은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보낸 ‘홍향임 선교사’도 
젊은 청춘을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에게 쏟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하고 있는데 
부활이 없다면, 그도 멍청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핵심이요, 인류 최대의 사건은
예수님이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한 부활신앙을 가져야 하고 그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잘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빈 무덤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을 찾는 여인들에게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24:6) 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누가복음 9장 22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 …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눅9:22, 눅24:7)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엉뚱한 일을 하러 간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시험에 들어 넘어질 때가 언제입니까?
말씀을 기억하지 못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성경으로부터 멀어질 때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말씀으로 
2008년을 시작해서 오늘 부활절까지 왔습니다.
연초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라는 말씀 기억하며,
“넘어지더라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닥쳐오는 세상 풍파를 바라보고
붙잡았던 말씀의 끈을 놓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도
“흔들리지 않게 영적 무장을 하라”는 말씀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흔들렸던 것입니다.

매주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살면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처럼 죽음을 찾아가는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여인들이 빈 무덤을 확인하고
천사들에게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얘기를 듣고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믿지 않았습니다.(11절) 
‘허탄하다’(nonsense-NIV)는 말은
(빌 허(虛), 아무 것도 없다는 허와 / 거짓 탄(誕), 속이는 것을 말하는 탄)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입니다.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거짓말로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3년이 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일 성질 급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12절에 보면,“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예수님이 묻히셨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만 하고’
‘놀라운 일이라 여기면서’예수님을 찾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허탄한 듯이 들려”지십니까?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참 놀라운 이야길세 …”, “참 신기한 이야기야 …”
“장사 지냈는데 어떻게 살아났을까 …”하면서 집으로 가시려는지요?

종교는 세상에 많습니다.
저마다 진리라고 주장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신약 성경 260장 가운데 100여 번 기록된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지 못하면 이단이요, 
부활을 믿지 못하면 참된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게 했고 …
-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며 …
-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죽음>의 해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소망 중에 죽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전제된 유한한 인생이지만 
부활이 약속된 영원한 생명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 때문에 성도들은 수많은 죽음(순교)과 엄청난 박해를 견뎌왔습니다.
다시 사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견디어 냈던 것입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거짓임을 증명해 보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단순히 죽었다가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것 같아서 연락했는데 깨어나신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3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운명하신다고 해서 가서 임종기도를 해 주었는데 다음 주에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잘못 알아 들으셨나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3번이나 사람을 살려내셨습니다.
① 야이로의 딸 (막5장, 눅8장)
② 나인성 과부의 아들 (눅7장)
③ 나사로 (요11장)
특별히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 죽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다시 살아난 후에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 영원히 죽지 않는 것 때문에 오늘도 예배의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어찌하여 … 찾느냐

본문 5절에 보세요.
향품을 들고 죽은 예수님을 찾는 여인들에게 
천사가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눅24:5) 고 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떤 사람은 죽음을 향해 가는가하면
영생의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의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끝입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 
죽여 버리고 태연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영원을 향한 삶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원히 사는 삶을 믿기 때문에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줄 믿습니다.

종말이 될수록, 예수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많아집니다.
교회 멀리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집니다. 
성경을 집어던지고 싶게 하는 일이 많아집니다.
세상은 점점 더 캄캄해져갑니다.
그러나 흑암이 깊어진다는 것은 새 아침이 밝아 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찾으면 안됩니다.
죽은 얘기 하지 마세요.
절망을, 낙담을 얘기 하지 마십시오.
자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산 얘기를 해야 합니다.
소망을 말해야 합니다.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이미 영생의 주인공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어디에서든지 … 버림받은 것 같은 외로움 …
목마른 고통 … 캄캄한 어둠에 갇힌 것 같은 절망이 있다 해도 …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죽음 같은 상황에서도 …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더러운 이야기, 절망의 이야기, 
목마른 이야기, 캄캄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승리의 사람으로, 소망의 사람으로, 천국 가는 사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어디에서든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을 이기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당당하게 승리자의 말을 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긴 자의 가슴을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덤을 찾지 말고 죽은 얘기 하지 말고 
생명을 찾는 산 사람으로 살게 연약한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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