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11-31)

  • 잡초 잡초
  • 291
  • 0

첨부 1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11-31)

  지난 2월 말에 연초의 각종 집회와 부흥회 등 여러 가지 교회 행사들이 끝날 무렵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고 기억됩니다.
  몇 주일째 계속 낮밤으로 수고하신 교역자들에게 저녁이라도 한 끼 대접할까 하고 목양실에 갔더니 마침 한 예닐곱 명의 남자 교역자들이 있어서 다들 함께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미리 공지한 회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 교역자들 중에 약 반수 가량은 그 시간에 심방이나 교구 농구연습 등으로 인하여 자연히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저녁 시간에 목양실 사무실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교역자들보다는 그렇게 열심히 사역하느라고 저녁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던 교역자들이 훨씬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저로서는 참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밥을 먹으면서도 제 머릿속에는 '오늘 여기 오지 못한 교역자들이 나중에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아쉽고 섭섭해 할까?'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무국장 목사님에게 말해서 그날 오지 못했던 사람들만 다음 주에 따로 저와 같이 저녁식사 할 시간을 잡아 놓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금요일 저녁의 우연한 회식 현장에 없었던 교역자들이 처음에 갔던 교역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더 이상은 못 먹겠습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배부르게 비싼 고기를 먹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예수님 공생애의 하이라이트요 또한 신자의 신앙에 있어서도 핵심이며 정점에 해당됩니다.
  보통 생각에는 부활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시간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 예수님의 부활을 훨씬 더 쉽게 믿을 수 있는 어드밴티지를 누리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예수님 부활의 현장에 없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 부활신앙을 더욱 풍성하게 소유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확증해 주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최고의 소망을 가져다주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들이 비록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직접 겪어볼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 현장의 목격자들보다 훨씬 더 확실한 부활신앙을 과연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활현장에 가까이 있어도 자기감정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그저 혼란에 빠지고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1절부터 18절에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 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즉 오늘날 주일의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부으려고 무덤을 찾아 왔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 무덤이 열려 있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뜻밖에 그런 빈 무덤을 대하게 된 마리아는 슬픔이 복받쳐 올라 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대표적인 반응은 '두려움'이었던 것에 비하여, 여자인 막달라 마리아에게서는 '슬픔'이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사실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20:1)만을 보고 즉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연락을 했으며,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고는 그것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그들은 그 사실을 무덤 밖에 있던 그녀에게도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20:10)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0066CC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기만 하다가 드디어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그제야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천사들이 그녀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했으니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를 본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울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그녀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더라면 예수님 시체 있던 곳에 천사가 대신 와 있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자신의 슬픈 감정에만 완전히 사로잡혔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그와 같은 심정의 상태는 이어지는 사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무덤 곁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도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았다고 했습니다.
  겨우 며칠 지났다고 잊어버릴 얼굴은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예수님의 시체에 자기 손으로 향품을 부을 기회가 사라져 버렸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 너무나도 실망하고 비탄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나머지, 바로 눈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누구를 찾느냐"고 말을 걸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만 완전히 몰두된 막달라 마리아의 상태는 그 후에도 또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늦게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랍오니"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나를 붙잡지 말라' 혹은 '내게 매달리지 말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은 자기감정에 치우친 막달라 마리아의 행동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짐으로써 자신의 심정에 어떤 만족을 얻고자 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기가 직접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부을 기회를 잃어 버렸다고 완전히 낙심에 빠져 있다가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자 그 예수님과의 감각적인 접촉을 통해서 스스로 위로를 받고 싶어 했던 것이었습니다. 

  본인으로서는 그 같은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에게는 결코 올바른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믿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이겠지만 감정에 치우친 믿음이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명백히 일깨워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항상 울부짖어야 되고 무언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몰입해야 제대로 은혜 받은 느낌이 드는 신앙이란 바로 감정에 치우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감정 중심의 신앙이란 막달라 마리아와 꼭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그것은 우선 예수님 중심의 신앙이 되기보다는 자기중심의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의 기분이 충족되어야만 무언가 후련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본인의 개인적 욕심이 앞서는 일종의 이기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신앙은 거짓 그리스도의 영에 넘어갈 위험도 다분해집니다.
  감정만 앞서는 심령의 상태는 참된 영을 분별해내는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이단의 영을 예수님의 영과 혼동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현장에 제일 먼저 도착했고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했던 막달라 마리아였지만 바로 이런 실수와 혼란에 빠짐으로써 예수님께로부터 '나를 만지지 말라'고 경고를 받게 되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빠져버린 신앙이 아니라 성령의 깨우쳐 주심을 받아 분별력 있는 신앙을 지키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목격자의 증언을 직접 전해 들어도 자신의 이성에만 의존하면 끝내 의심과 불신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24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에 "24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앞의 본문 19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오심으로써 당신의 육체적 부활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때 하필이면 왜 도마만 그 자리에 없었는지 그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하여튼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도마에게 증언해 주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웬만하면 도마로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의 친근한 동료들이 증언한 일이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앞에 나타나서 자기에게 해 준 말이 아니라 삼년 동안 한 솥밥을 먹고 동고동락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마음속까지 빤히 들여다 볼만큼 가까워진 동료 제자들이 자기에게 해 준 말이었습니다.
  그것도 한두 사람도 아닌, 열 명의 모든 제자들이 다같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한 목소리로 증언해 주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라면 자기와 절친한 친구들이 열 명이나 이구동성으로 해 주는 말이라면 "아, 정말 그랬는가 보다."라고 믿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도마는 그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마는 아무리 다른 사람들 열 명 아니라 백 명이 꼭 같이 믿고 증언한다 해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 납득할 수 없으면 어떤 사실이든지 믿을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기의 이성적인 사리 판단만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판단하고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척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믿겠다."라는 정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한 술 더 떠서 "내가 그 못자국 난 옆구리에 직접 내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공개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자기의 이성적인 사리 판단만을 내세우던 도마에게 결국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그렇다면 네 소원대로 네 손가락을 내 못자국과 창자국에 넣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론 직접 그렇게 해 볼 엄두도 감히 내지 못하고 당장 예수님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그렇게 당신의 몸을 내어 보이시고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즉 도마 식으로만 계속 가면 반드시 '믿음 없는 자' 즉 불신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사실 도마 자신도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져보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천명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꼭 얻어야 되는 사람, 매사에 자기의 이성적 판단에만 치우치는 사람은 그래서 참된 신앙에 이르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식 그 자체는 사람에게 두말할 것 없이 유익한 것이지만, 그 지식만 최고로 여기게 되면 신앙까지도 오직 이성적으로만 과도하게 검토하려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처럼 신앙의 대상까지도 오직 이성으로만 판단하려는 자세는 기본적으로 회의주의적이며 자연히 의심이 먼저 앞서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런 자세는 애초 출발점에서부터 '이런저런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아니하겠다'는 도마 식의 부정적 전제가 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이미 최악의 코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로서 으레 모를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겸손히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지닐 줄 모르는 것은 바로 전지하신 신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며 그 앞에서 지극히 교만한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국 철저한 불신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길을 제 발로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열 명의 가까운 동료들이 그토록 진실하게 증언해 주어도 오직 자신의 이성적 판단만 내세움으로써 여전히 불신앙에 빠져 있던 도마를 가리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라고 꾸짖으신 주님의 말씀을 새겨들음으로써, 자기 머리만 믿는 유아독존적인 불신앙에 빠지지 말고 예수 부활에 대한 수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에 심령의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직접 보지 못해도 오직 말씀을 통해서 예수 부활을 목격하면 생명을 얻는 부활신앙을 확실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 본문 30절과 31절은 결론적으로 말씀하기를 "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까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는 사람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너무나도 귀중하고도 복된 일이라고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만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사람에게 영생이라는 엄청난 복을 약속해 주는 것이므로, 사람이 자기의 감정이나 이성에 좀 맞지 않는다고 하여 그대로 놓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너무나도 귀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귀한 믿음, 즉 부활신앙을 우리처럼 "보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곧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며 오히려 훨씬 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31상반절을 다시 보시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영감시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을 때에는, 이 말씀만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만드는 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을 확실히 아셨다는 뜻입니다.

  이 기록된 성경 말씀이 있는 한 후대의 사람들이 자기네 눈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 못할 리는 결코 없다는 것을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아주 자신 있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저 '기록된 것'만 가지고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을 그 누구보다도 성령님께서 확신하고 또 확신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이것"만을, 오직 이 신구약 66권에 기록된 것만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기록만 가지고 믿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난날 과거의 역사들을 우리는 무슨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서 직접 보지 않아도 그저 기록된 역사서만 읽고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습니다.
  달나라에 직접 가보지 않고도 거기에 갔다 온 우주인들이 보고 기록한 보고서의 내용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치 않고 100퍼센트 전부를 그대로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신령한 일, 특히 부활하신 예수님과 앞으로 있을 우리 몸의 부활의 약속까지도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말씀에 의지하여 믿는 것입니다.
  도대체 못 믿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유명한 전도자 무디(Moody)는 자기에게 큰 믿음 내려 주시기를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그가 바라는 그런 믿음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는 로마서 10장 17절에 있는 말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는 말씀을 읽은 후에 크게 깨닫고, 그 후로는 오로지 성경 말씀만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 아주 탄탄하게 장성하는 것을 체험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기록된 성경,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이 기록된 말씀, 아니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자증으로써 기록된 이 성경, 바로 이것만이 저와 여러분을 진정한 예수부활 신앙,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해 주시는 참된 부활신앙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음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일반적으로 경기장에 직접 가서 보는 것이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구경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경기장에 있는 관중은 어떤 때에는 흥분의 감정에 스스로 휩싸여서 폭도로 변해 버리기도 하고, 경기 내용에 대해서도 순전히 비전문가인 자기 혼자만의 머리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장면은 경기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잠깐 순간에 지나가고 때로는 잠시 한눈팔다가 그것을 놓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 경기 현장에는 없었다 해도 나중에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녹화 중계를 보는 시청자가 그런 점에서는 훨씬 더 유리합니다.
  슬로우 비디오로 다시 보여주는데다가 전문가의 자상한 해설까지 곁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현장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도 오히려 감정에 치우치고 이성에 의존하여 믿음을 얻으려 하다가 실패하기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과 성령의 충만한 감화감동을 통하여 그 어떤 사람이든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충분하고도 확고한 부활신앙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을 믿어야만 우리는 생명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성경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우리의 이성이 믿음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오직 기록된 말씀만이 우리를 바른 부활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유일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게다가 바로 우리와 같이 오직 그 성경 말씀만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자들을 가리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나 도마나 다른 열 제자들보다도 더 복된 사람이라고 주님 당신의 입으로 친히 축복까지 해 주셨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이 말씀은 도마나 제자들에게라기보다는 바로 오늘날의 저와 여러분에게 직접 내리시는 축복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하여 기록된 이 성경 말씀을 따라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축복을 다 함께 누리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