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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주님의 부활이 여러분의 현실입니까?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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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활이 여러분의 현실입니까? (눅 24:13~35)

1. “예수 부활하셨네!”

“예수 부활하셨네!” 

곁에 계신 분들과 이 말로 서로 인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늘 살아계신다는 것은 그의 신성과 관계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것은 예수님 개인적으로 볼 때 그 분이 고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우리의 죄와 우리와 관계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표현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도 우리 때문이며, 그가 부활하신 것 역시 우리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오늘 여러분들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2. 제자이며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본문의 두 제자는 바로 그곳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내려간다”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는 것과 ② ‘형편과 사정이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다고 하는 말은 우선 예루살렘 성이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내려간다고 표현 되었지만, 사실은 더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신앙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두 사람은 지리적으로 낮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꿈과 신앙을 잃고 추락하는 자리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오늘 본문이 가지는 의미는 그 주인공이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는 것과, 그들이 지금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 본문의 시점이 바로 오늘과 꼭 같은 부활절이라는 것이죠. 그 이름이 글로바라는 제자로 밝혀진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제자는 오늘 새벽에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22절부터 24절까지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오늘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여인들이 그 무덤 문이 굴려져 나가 열려있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으며, 그리고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였다는 것, 그리고 그 중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가 빈 무덤을 확인한 사실을 상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우연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서 너 차례에 걸쳐 자신이 죽으실 것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던 주님이 부활하셨다는데,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들과 한 무리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이 적어도 주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오늘 일어난 사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자세히 살펴야 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그 무덤으로 달려가서 현장 검증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당연히 이 사실에 주목을 하고 그 사실 여부,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정말 부활하셨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그들이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두 제자는 부활 사건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25절 말씀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 이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제자요, 바로 그 날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현장을 떠나 자신의 고향이든지 아니면 또 다른 볼 일이 있어서 인지 엠마오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이 실제로 그러한가를 살피고, 동료들과 대책을 세워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부활의 현장으로부터, 주님의 부활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표정은 어떠했을까요? 17절 말씀에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주님의 제자이고 그리고 자신들의 동료들이 부활의 소식을 들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제 갈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오늘 이 두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3. 성도이며 이미 부활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라는 것, 그리고 그 날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임에도 불구하고, 슬픈 표정으로 낙심하여 고향으로 낙향하고 있는 이 제자들이 모습은 다만 그들만의 모습일까요? 어쩌면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닐는지요? 바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거나, 지금 여러분 곁에 있는 분의 얼굴은 아닐까요?

미국의 어느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살아있는 사람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사람을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여러 학생들이 말했습니다. 
“카터예요.” “클린턴 이예요.” “부시예요.” 
그런데 그 중에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훌륭하세요.”
그러자 그 선생님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아니, 살아계신 분 가운데서 만요. 돌아가신 분 말고 살아계신 분 가운데 훌륭한 분을 말해보세요.”

혹시 지금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누군가 “인류가 소유한 기록물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한 기록은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경우, 거의 절반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일어났던 일주일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보다 진실 되면서 또 다수의 순교자를 낸 사건은 없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사기 사건이라면 도대체 그들은 무슨 대가를 바라고 그렇게 죽어갔을까요? 만약 부활 사건이 거짓이라고 할 경우, 금생과 내세, 영육 간에 유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일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던 동기가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아놀드(Thomas Arnold)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 역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선전했다면 기독교가 그 이후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하기를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해서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본심으로 돌아갔더라면 예수의 부활이란 전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순교를 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진실성을 입증해 보여 주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가 한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역동적인 힘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도전과 박해를 만났지만 그것이 도리어 갱신과 변화의 기회가 되었고, 그때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됐습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고, 신앙의 초석이며, 변화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 어떤 슬픔과 공포, 회의와 실망, 고통과 상처도 부활의 사실을 믿고 부활의 능력 가운데 살며 부활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부활이 그 핵심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성도이면서, 오늘 같은 부활절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사람의 표정은 슬퍼 보이기만 할까요? 왜 어떤 사람은 지쳐 그 어깨가 한 없이 무거워 보이기만 할까요? 왜 어떤 사람은 의욕을 잃은 모습일까요? 아니 이러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왜 당신은 아무런 감동과 감격도 없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오늘 저는 새로운 용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엠마오 신드롬입니다. “엠마오 신드롬”, 즉 “엠마오 증후군”이란 예수를 믿는 성도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사 살아계신 것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지쳐 있고, 피곤해 하고, 낙심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다시 2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즉 부활하사 살아 계신 주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병과도 같은 증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999년 4월 1일 국민일보 <겨자씨> 란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꽃을 파는 어떤 허름한 할머니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항상 웃고 계셨습니다. 생활이 어렵고, 옷은 남루하며, 꽃 팔면서 힘들고 피곤한데도, 늘 기쁨으로 살아가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 할머니를 ‘행복한 할머니’, ‘웃음의 할머니’, ‘늘 기쁨의 할머니’로 불렀습니다. 단골손님 가운데 한 분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 봅니다?” 
“천만에요. 어떻게 사람에게 걱정이나 근심이 없을 수가 있나요. 제게도 역경과 고통이 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기쁘게 사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제가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랍니다”라고 했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3일의 비밀’이란 걱정거리나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제가 기도하면서 3일을 기다리는 것인데요. 이 3일의 비밀 법칙은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갖게 된 저만의 법칙이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기도하면서 3일을 기다리면 반드시 해결되거나 그 상황이 달라지더라고요. 때론 꼭 숫자대로 3일이 아닐 때도 있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일지라도 3일만 기다리면 반드시 생명의 열매로 끝이 나지요. 그래서 저는 어떤 경우에도 즐겁고 기쁘답니다.” 

여러분, 이 할머니의 신앙이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이 “3일의 법칙”을 한 번 적용하면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괴로우십니까? 지금 아프십니까? 지금 어려우십니까? 이 3일의 신앙, 즉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괴롭다고 그것만 보는 사람은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힘들다고 불평하는 사람, 아프다고 울부짖는 사람, 외롭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이지요. 부활의 신앙은 부활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4. 새롭게 일어서는 삶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 슬픈 얼굴을 하고 지친 모습으로 낙향하고 있던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했습니까? 

1)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31절 말씀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그리고 32절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성도는 지금,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그 주님을 보는 사람이요, 그 주님을 의식하고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으로 인하여 마음과 영의 상태가 뜨거운 사람, 그리고 삶의 의욕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성도의 마음의 상태 그리고 영적인 상태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실재요 지금 당장의 현실이 되어서 오늘 여러분의 눈이 밝아져 살아 계신 주님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영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또 다른 변화를 오늘 본문 후반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과 10km밖에 안 되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가 그렇게 멀게 여겨졌고, 길어야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지친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기 직전에 멈추고서는 여관에 들어가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아직 젊은 그들로서는 단숨에 갈 수 있는 거리인데도 말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변화되었습니다. 어떻게 변했습니까? 

33절에 “곧 그 시로 일어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난 직후, 그 즉시로, 즉 제법 늦은 밤이었을 것 같은 그 시간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내려 올 때는 천근만근 무거웠던 몸, 발걸음 하나 옮기기가 그렇게 힘들었지만, 예수님을 만나자 너무 가볍고 신나게 새 힘얻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11 사도와 나머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외쳤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났다니까요! 정말 주님이 살아나셨더라고요!” 자신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셨고, 그 주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자신의 부활을 설명하신 일, 또한 자신들에게 떡을 떼어주신 일을 보고했습니다. 바로 오늘 오전, 지금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과 흥분된 어조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던 여인들과 베드로와 요한처럼! 자신들이 무시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부활하사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할 때에는 낙심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 추락하는 삶을 살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 다시 부활의 현장으로, 그리고 그 부활을 증거하는 자리로, 또한 의욕을 가지고 새롭게 출발하는 자리로 힘차게 달려가는 변화된 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자리가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부활이 여러분에게 어떤 감동도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지금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또 하나의 엠마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지금 여러분을 기쁘게 하고 흥분되게 하며, 의욕을 일으키고, 새롭게 출발하게 만든다면, 여러분이 있는 자리는 예루살렘이며 부활의 그 현장일 것입니다. 낙심하여 낙향하고 있는 모습은 어제까지로 족합니다. 이제부터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 힘 얻어 힘차게 또 다른 출발을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곁에 있는 분에게 인사해 봅시다. “예수 부활하셨네!” 이런 인사를 하고 들을 때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설교 시작 부분에서 물을 때와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부터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생, 의욕과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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