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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첫 열매 (고전 15: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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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열매 (고전 15:20~31)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오늘은 기쁘고 행복한 부활절입니다. 모든 성도가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귀하고 복된 주일입니다. 다함께 앞과 뒤, 양 옆에 있는 성도들과 이렇게 부활절 인사를 나눕시다. "행복한 부활절입니다." 특별히 이번 고난주간에 특별새벽기도회와 1일 금식기도회, 그리고 24시간 연속기도회에 참여하신 성도들은 이 부활절이 더 귀하고 의미가 있을 줄 압니다.

오늘은 부활절을 맞아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부활의 첫 열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붙인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우리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첫 열매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요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죽은 자를 '죽었다'고 하기보다 '잠잔다'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께 찾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자기의 병든 딸이 죽어가니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동안 그만 그 딸이 죽고 맙니다. 그래서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회당장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딸이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런데도 예수님은 굳이 회당장의 집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집에서 울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비웃으며 말합니다. "아니, 분명히 죽었다는데 왜 저 사람은 안 죽었다고 잠잔다고 우기나? 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집안으로 들어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 굼, 즉 소녀야 일어나라," 하시니 정말 죽은 아이가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나 일어나고 태연히 먹을 것도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이 죽은 사람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잠잔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 기독교에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잠자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죽는 것이나 잠자는 것이나 눈을 감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눈을 감지만 죽는 것은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을 뜻하고, 자는 것은 오늘밤에는 내가 눈을 감지만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다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분명히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오늘 내가 죽어 눈을 감으면 끝입니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합니다. 영원히 죽어 못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고 영생을 얻은 성도들은 다릅니다. 비록 지금 내가 죽어 눈을 감지만 나는 내일 아침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납니다. 어디에서요? 천국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장례식 때 잘 부르는 찬송가 480장의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만나보자 만나보자 저기 그날 아침 그 문에서 만나자" 하는 가사처럼 우리는 오늘 눈을 감고 죽지만 반드시 내일 찬란한 아침이 밝으면 천국에서 다시 눈뜰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만 죽은 것이 아니요 잠자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를 비롯해 그가 쓴 서신 곳곳에서 죽은 자들을 '잠자는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처럼 바울도 부활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모든 잠자는 자들, 즉 예수 믿고 구원 받아 부활신앙을 가진 모든 죽은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잠자는 자, 즉 부활신앙을 가진 모든 성도들이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한 것일까요?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를 지으면 반드시 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합니다(잠 3:9, 겔 44:30). 특히 이스라엘의 추수감사절인 칠칠절에는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감사를 표현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민 28:26). 왜 그랬을까요? 왜 하필이면 많은 열매 중에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첫 열매가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아가 첫 열매를 드림으로 내가 얻은 모든 소득과 열매를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이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 되어 우리 모든 백성들도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부활신앙

이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먼저 21절을 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그렇습니다. 22절부터 나온 것처럼 사망과 죽음은 누구 때문에 온 것입니까? 창세기에 보면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해서 그 한 사람 때문에 사망이 온 인류에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원리가 부활에도 적용이 됩니다. 죽음과 사망이 아담 한 사람 때문에 온 인류에게 들어온 것처럼 오늘,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한 분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 특히 부활신앙을 믿고 잠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22절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3절부터는 부활의 순서를 설명합니다. 맨 처음 부활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요, 그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 즉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바로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성도들이요 부활신앙을 믿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마지막'입니다. 이 '마지막'이라는 말은 종말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맨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이 부활이 첫 열매가 되셨고, 그 다음으로는 예수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우리도 부활하게 되고, 이렇게 성도들의 부활의 있은 후에는 종말이 온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러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흠 없으신 어린양이 보혈의 피를 흘려 십자가 위에 죽으셨습니다. 또한 죽으신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부활절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만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함께 부활하는 우리들 자신의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왜요?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 부활하셨고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언젠가 모두 사망권세 이기고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비록 지금 세상에서 죽어 눈을 감는다 해도 예수님 따라 부활해서 내일 저 찬란한 천국에서 다신 눈뜰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만 천국에서 눈뜨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지만 믿음을 가지고 이미 천국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고 있는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도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 먼저 천국 간 분들이 천국 문에 나와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 때 얼마나 감격적인 재회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이요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 기쁜 부활절 아침에 이 소망과 믿음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나는 날마나 죽노라
이제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본문 31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여기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로, "죽음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새번역 성경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또는 죽음을 경험합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를 하면서 날마다 죽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선교를 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핍박도 당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죽을 뻔도 참 많이 했습니다. 복음 전하러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파선해서 죽을 뻔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사도 바울은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주를 위해 복음 전하다 매일 매일 죽을 뻔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매일 죽음을 체험하며 산다"고 말한 것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산 것입니까? 그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살았습니까? 복음 전하다 헐벗고 굶주리기를 밥 먹듯 하고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모욕도 당하고 정말 말 그대로 날마다 죽을 뻔 하며 매일 죽음을 체험하며 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고생은커녕 얼마든지 편안하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바울의 이력서만 봐도 그 사람이 이렇게 고생하며 구질구질하게 살 사람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이력서가 나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혈통 좋고 가문 좋고 율법에 대한 열심이나 의로나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바울은 학력도 대단합니다. 헬라의 철학과 유대교의 율법을 다 공부했습니다. 그것도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말입니다(행 22:3). 요즈음으로 치면 외국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두 개 이상 따가지고 온 석학입니다. 게다가 그는 길리기아 다소 사람(행 22:3)으로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행 22:28).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최고의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출세하여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도무지 고생하고 날마다 죽을 뻔 하며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바울이 왜 그렇게 산 것일까요?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그 길로 간 것입니다. 스스로 고생길로 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다시 오늘의 본문 고린도전서 15장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31절을 다시 읽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 속에는 "나는 기꺼이 매일 죽는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스스로 매일 죽는 고생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왜요? 바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믿음이요?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내가 매일 이렇게 죽도록 고생하지만, 죽을 뻔도 여러 번 하고 심지어 정말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고 죽을 수도 있지만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되는 것이라고요? 자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아니라 잔다는 말입니다.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죽어도 부활하신 주님 따라 다시 부활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 걸고 복음 전하고 날마다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날마다 죽었다는 말은 "날마다 내 스스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는 날마다 스스로를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누구나 내 안에 죽기 싫은 마음, 고생하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내 안에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자아가 살아있고, 내 고집 내 주장이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날마다 이 자아와 자기의 생각을 죽인 것입니다. 나를 날마다 죽이고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음의 증거자로 사명자로 다시 살아나고 날마다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는 인간적인 생각을 품었지만 곧 그 생각과 자아를 죽이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고 고백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자아와 내 생각은 다 죽이고 하나님 안에서 다시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는 사람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처럼 바울도 자신을 날마다 죽이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살고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죽고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부활절을 맞으며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분명한 부활신앙 안에서 죽음을 이겨내고 천국을 맛보는 부활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날마다 나를 죽이고 또 죽이고 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명자로 다시 태어나는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 고난주간을 보내며 특별새벽기도회 주제로 <순종>이라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주제를 정할 때 그냥 제가 좋아서 정한 줄 알았습니다. 우연히 <순종>이라는 존 비비어 목사님의 책을 읽다가 주제가 너무 좋아서 이것으로 이번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주제를 정하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주제를 정한 것이 제가 좋아서, 제가 택해서가 아니었음을 새벽기도회 거의 끝나갈 때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이 주제를 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를 거의 마무리하던 금요일, 저는 기도 중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준아, 나는 네가 똑똑한 목사, 잘난 목회자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네가 재주 많고 특출한 자녀 되기 원치 않는다. 나는 다만 네가 나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녀가 되기 원한다. 자아를 죽이고 자기 생각과 고집과 주장을 다 버리고, 나의 뜻만을 100% 순종하는 그런 목사 되기 원한다. 나는 순종하는 자녀만 귀하게 쓴단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먼저 순종하는 목사 되고, 전적으로 복종하는 목사 되면 그 다음에 너희 교회 성도들에게 순종을 설교하고 가르쳐라. 그래서 성도들이 전적으로 자기를 죽이고 순종하는 자녀가 되면 그 때에야 내가 교회를, 성도들을 귀하게 쓰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의 자녀 되기 바랍니다. 날마다 죽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귀한 사명자로 쓰임 받게 되기 바랍니다. 이 복되고 기쁜 부활절 아침에 날마다 죽고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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