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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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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에릭 버터워스(Eric Butterworth)는 자신의 글에서 젊은 상이용사에 대한 내용을 전합니다. 전쟁터에서 두 다리를 잃은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병실의 침대에 누워 종일 죽음만을 생각합니다. 누구의 도움도 거절합니다. 재활훈련도 거부합니다. 

어느 날 다른 환자가 찾아와 하모니카를 불어주기 시작합니다. 상이용사는 그를 쳐다보더니 다시 천장을 바라봅니다. 그 환자는 말 없이 나갔으며 다음 날도 찾아와 하모니카를 불어줍니다. 그리고 상이용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혹시 하모니카 부는 것이 당신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듣기에 좋습니다". 
조금씩 말문이 열립니다. 하모니카를 부는 환자는 경쾌한 음악을 불며 탭댄스를 추었습니다. 그러나 상이용사에게는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자 그는 말합니다. 
"한번 웃어보세요. 당신이 살아있는 것을 세상이 알도록". 
그때 상이용사는 말합니다. 
"나 같은 신세에 빠져보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러자 그 환자는 말합니다.

 "당신은 죽은 것이군요. 그러나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러한 죽음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춤을 출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처럼 곤경에 처했다면 당신의 음악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때 춤을 추던 환자는 중단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2천년 전 부활 사건은 너무 나 먼 시대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런 예가 있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바지를 걷어 올렸습니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의족 두 개가 있었습니다. 탭댄스를 추던 다리는 의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낙천가도 아니었습니다. 한때 상이용사처럼 천장을 바라보며 죽음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능력을 알게 되었고, 부활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두 다리 없이도 기쁘게 사는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날 상이용사는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부활의 삶을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그들은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부활이 있으면' 이 아니라 '부활이 없으면' 이라고 가정합니다. 가정이란 현실과 다른 것을 상정하는 법입니다. 부활이 현실이 아니라면 '부활이 있으면' 이라고 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명백한 사실이기에 '부활이 없으면' 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 를 박해했던 바울이 부활을 전하다 순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를 전하며 고난을 받을지라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만일에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수밖에 없다고 바울은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부활이 없으면,


첫째로 전파도 헛됩니다 

이화여자 대학교 초대 총장 김활란(金活蘭)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예수를 믿고 세례 받은 후 헬렌(Hellen)이라고 세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자로 쓰니 '활란(活蘭)'이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식모살이를 했지만 마음속에는 부활의 예수를 품었습니다. 꿈을 가졌습니다. 이화학당을 나온 그녀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학생들에게 부활의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초대 이화여대 총장이 됩니다.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후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육체가 떠날 때 죽은 사람 취급하여 장례식을 하지 마십시오. 장송곡 대신 승리의 길로 가는 환송의 찬송을 불러주세요. 승리와 영광의 노래로 마지막 가는 길을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로 예배 드려주세요." 그녀의 유언대로 김활란 박사의 장례식은 많은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할렐루야 곡으로 장례예배를 드렸습니다. 복된 죽음을 맞이한 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 예수 생명이 나의 생명이라는 고백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슬픔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무덤이 더 이상 부활의 사람을 가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된 일입니다. 전파의 근거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제자들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겁쟁이가 되게 했습니다. 도망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그들을 용기 있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반 뷰렌(A. Van Buren)은 말합니다. "예수 부활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었다." 예수의 부활이 그리스도인을 만들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도록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사건입니다. 복음 전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헛것 때문에 목숨까지 바칠 수 있겠습니까? 아무 유익도 없는 일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목숨을 바칠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전파한 이유는 부활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증거도 헛됩니다 

로마에 카타콤(Catacomb)이란 성지가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의 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키던 장소입니다. 한 번은 로마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워낙 미로여서 입구에 있던 교인들만 잡혔습니다. 로마당국은 카타콤에 있는 교인들에게 경고를 주려고 이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입구에 세웠습니다. 깊은 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십자가 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린 부모는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얘들아, 예수 믿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너희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믿음을 버리지 말아라.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얘들아,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초대교회 순교사에 나오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부모의 유언을 들은 자녀들은 부모의 뒤를 따라 믿음을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었기에 모진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는 로마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로 인한 영생의 보증을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실패가 찾아온다 해도, 험산 준령이 가로막는다 해도 절대로 좌절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끝내 이루고야 맙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예수께서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부활의 진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잠시 동안 억지 주장은 할 수 있어도 2천년을 이어오면서 주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수많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에 의해서 증명되었습니다. 순교라는 의미의 영어(martyrdom)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에서 왔으며, 마르티리움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투리온' 은 '증거' 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어 '말투스' 도 '증인' 이라는 의미였지만 '순교자' 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즉 순교는 죽기까지의 증거를 의미합니다. 거짓 때문에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는 강력한 뜻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목숨을 바칠 만한 증거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카타콤의 증거도 헛되고 말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증거도 모두 헛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죽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도 부활에 이르게 되었다고 성경도 밝히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믿음도 헛됩니다 

1874년 남북 전쟁 당시 미국 전역은 쑥대밭과 같았습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나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악성 전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들을 쓰레기 묻듯 하면서 사람들의 심성은 찢겨져 어디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런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던 로우리 목사(S. R. Lowery)가 있었습니다. 그는 깊이 기도하던 중 심령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또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라면, 이렇게 절망하고 쓰러져 있어서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그는 주님 안에서 전쟁터가 지옥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전염병의 절망도 부활의 생명을 꺾을 수 없다는 확신도 생겼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로우리 목사는 일어나 사람들을 격려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런 벅찬 감격 속에 찬송가 150장은 작사 작곡된 것입니다.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 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께서 무덤에서 죽는 것으로 마치셨다면 죽음은 영원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속죄를 받고, 죽음의 두려움 속에 여전히 인생은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부활을 믿고 세상을 떠나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까지 망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18절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무엇보다 비참한 것은 지금 믿는 우리들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참으며 욕망을 제어하고 삽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너무도 억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분명한 사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느 동네에 꽃을 파는 할머니가 아주 행복하게 삽니다. 언제나 미소를 띄우며 즐거움을 남에게 주는 할머니였습니다. 궁금한 사람들이 묻습니다. "할머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할머니는 대답합니다. "어찌 내게 좋은 일만 있겠소. 그러나 나는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알고 있어요. 고통 당할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래서 나도 고난이 올 때마다 사흘만 더 기다리자. 사흘만 더 기다리자. 그러면 부활의 새벽이 올 거야 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힘이 생겨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불안의 삶이 아니라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슬픔의 삶이 아니라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부디 확실한 부활신앙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승리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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