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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눅 23:39-43) - 가상칠언(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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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눅 23:39-43) - 가상 제2언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두 번째 하신 말씀은 이제 곧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실 왕께서 강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첫 말씀은 죄인을 위한 기도였고, 두 번째 말씀은 죄인의 기도에 응답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두 강도는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달렸다는 사실만 빼면 처지와 입장이 거의 같았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예수를 “욕하더라”고 기록함으로써(마 27:44, 막 15:32),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적인 태도 역시도 같았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들도 유다나 종교지도자들이나 빌라도나 군병들이나 무리들처럼 무지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급작스런 차이가 생겼습니다. 

39-42절을 보십시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이전에 욕해왔던 것처럼 여전히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비방하는 강도를 꾸짖는 그의 말을 살펴보면 그는 십자가에 달리는 “정죄를 받고”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행한 일”이 큰 행악이었으므로 십자가 처형이라는 “상당한 보응”이 따랐음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을 욕했던 그의 입은 놀랍게도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찬양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처럼 취급받으며 죽어가는 분을 보면서 기이하게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변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조금 전까지 조롱했던 대상을 향해 찬양하면서 비방해오던 입으로 간구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십자가 형벌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그 분의 죄 없음을 고백하고, 그분의 죽음을 뻔히 보면서도 예수께서 그분의 나라에 임하시는 일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그가 다른 강도보다 더 똑똑했기 때문일까요? 그가 다른 강도보다 조금이나마 더 선했기 때문일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대답이지요. 강도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놀라운 기적(amazing grace)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라는 주님의 기도가 강도의 심령을 사로잡았는지도 모릅니다. 단 한마디의 말씀이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은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충성된 하나님의 일군 바울로 바꾸어 놓았던 것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는 한 말씀이었습니다. 탕자 어거스틴을 바꾸어 놓았던 것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는 한 말씀이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심각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 떨던 루터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던 것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한 말씀에 사로잡혀 사람이 확 변화되는 이런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처지에서 똑 같은 말씀을 들어도 반대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지만, 더욱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당신도 강도와 다를 바 없는 죄인이라는 십자가의 선포를 싫어하며, 나보다 악한 강도에게 낙원을 제공한 것에 반발합니다. 본문의 다른 한 강도 역시도 똑같이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들었지만 그는 더 완악해졌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한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비방했던 강도와 동일한 태도가 우리의 삶속에 여전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많은 사람들을 오직 두 부류로 나눕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좌편 강도와 우편 강도처럼, 은혜 받은 죄인과 은혜 받지 못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죄인은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닫습니다. 자기 죄의 심각성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회개하면서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해 그분의 긍휼의 손길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죄인은 끝까지 주님을 비방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대적합니다. 구원할 수 있으면 한번 구원해 보라고, 너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고, 죽어도 겁나지 않는다고 의기양양해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두 강도 사이에 있었던 차이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한 사람은 그날 그대로 멸망하고 말 것이나, 한 사람에게는 낙원이 약속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구원을 얻었으나 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양과 영원한 불에 들어갈 염소가 구별되듯이 그들의 최후의 운명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순식간에 갈라졌습니다(마 25:31-33). 

역사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선행’이나 ‘노력’을 구원의 한 요소로 첨가하고자 시도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동일한 처지의 강도 중 한 강도는 버림을 당하고 한 강도는 선택을 받았습니다. 선택된 강도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다른 강도와는 달리 선행이나 봉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처지의 두 강도 중 한 사람에게 낙원이 약속된 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그 믿음의 행위조차도 그의 공로가 아닙니다.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으므로 구원받은 인간이 내세울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만 자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순간에 흉악한 강도를 구원하시므로 그 어떤 육체라도 그 분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고전 1:28-2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로’를 조금이라도 첨가하려 한다면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죄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진리 중의 또 하나는 모든 인간은 이미 멸망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립의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배척하면 심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철저한 오해입니다. 중립 상태는 없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사람은 전혀 중립적인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죄를 범한 자이며 하나님을 배척한 상태에 있습니다. 심판 받고 죽어가는 강도들처럼 모든 인간은 이미 죄에 대한 형벌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없다면 그는 첫 번째 죽음 후에 둘째 사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만이 십자가를 영접하며 회개하는 반응을 보이게 되고, 그 결과 영원한 심판을 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인간이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강도는 다만 예수께서 자기를 조금 생각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즉석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는 그 날에 죽을 것입니다. 그의 육체는 썩겠지요. 하지만 그 영혼은 그 날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으나 잠시 후면 그는 주님과 교제하면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날에 이 말씀에 나타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선언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기에 신자의 영혼이 “낙원”에 거하게 됨을 계시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천당이라고 불렀던 곳입니다. 재림 때까지 신자들의 영혼은 고이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일부터 낙원에서 주님과 교제하며 지냅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신령한 부활체를 덧입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반면 불신자의 영혼은 죽는 그 날부터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욕된 몸으로 부활한 후에 영혼과 부활체가 결합한 상태에서 다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길게 여겨질 때가 있지만 사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담이 창조되던 날부터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를 몽땅 다 산다고 해도 영원이라는 시간과 비교하면 너무나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 찰나의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반응을 했느냐에 따라 영원한 삶이 결정됩니다.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도 있지만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온 우주가 작은 모래알갱이로 가득 채워지고 만년에 한 번씩 단 한 알의 모래 알갱이를 치워서 그 모든 모래 알갱이가 깨끗이 없어지는 날에 형벌이 끝난다고만 하셨을지라도 소망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형벌’이란 말은 그러한 소망조차도 없다는 뜻입니다. 천년에 한 번씩 1초의 휴식이라도 주어진다면 쉼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형벌이란 단 한 순간도 형벌이 쉬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4장 11절에는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했습니다. 

강도에게 임했던 은혜는 그를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상속받게 했습니다. 그 일이 강도의 노력과 선행으로 가능했겠습니까? 설령 조금 노력했더라도 그 노력의 대가였겠습니까? 구원도 상급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는 엄청난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할 뿐입니다. 또한 은혜 받은 자가 나타내는 합당한 반응을 나타내면서 살아가고자 할 뿐입니다.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죽는 순간에 주님을 영접했던 사람은 극소수였음을 생각하고 지금 회개하고 영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도를 영접하신 주님께서 즉시 기쁨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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