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14-24, 행 10:39-43, 요..

  • 잡초 잡초
  • 393
  • 0

첨부 1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14-24, 행 10:39-43, 요 20:11-18)

1.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 문을 열고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을 부활케 하신 하나님께,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십시다. 할렐루야!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여러분에게 그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생명의 승리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오늘도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모든 문을 열어주셔서 여러분의 삶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도약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말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그리고 이 땅에서 온갖 거짓과 거짓 음모를 폐하시고 진리로 승리케 해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를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모셨기 때문에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모든 불의를 추방하시고 정의가 마침내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악이 잠시 승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악의 세력을 진멸하시고 선이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말합니다. 오늘 이 땅을 마치 먹구름처럼 뒤덮고 있는 죽음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은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 생명의 은총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서독의 콘라드 아데나워수상과 독대해서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아데나워 수상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고심하다가 그냥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데나워수상이 느닷없이 “목사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에 빌리 그래함 목사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아데나워수상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라고 스스로 답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든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와 영국의 시인 칼라일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콩트가 칼라일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종교를 만들기 위해 구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칼라일은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도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만드는 종교가 생명 있는 종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2. 부활은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은총과 능력으로 이루어주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이요, 생명이요, 영원한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에는 “여호와의 오른 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여호와의 오른 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 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시118:24에는 “이것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이날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부활절절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충분하게 맛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활 절기를 “기쁨의 50일”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절 이전에 주일을 제한 40일 즉 사순절을 지나왔습니다.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는 우리 죄를 살피며,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그리고 그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상징은 부활의 절기와 대조적으로 슬픔, 애통,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에서 오순절에 이르는 부활의 절기 즉 기쁨의 50일은 사순절보다 더 깁니다. 우리가 비록 잠시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일이 있으나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기쁨은 그것을 능가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잠시 환란과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으나 하늘나라에서 누리는 기쁨은 세상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결국 은총의 승리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 시118:14절에 “여호와는 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인류역사이래로 죽음은 막강한 세력으로 인간을 지배해 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 인간을 일컬어 “평생 죽음의 종노릇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활절 찬송가에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온 국민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해방과 독립을 인하여 목이 터지라 만세 부르고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절을 기하여 우리 주님은 우리의 최대의 원수인 사망의 권세를 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교회는 이 기쁨을 오늘 하루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까지 50일간을 이 부활의 감격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는 이 기간을 “대 50일” 즉 “The Great Fifty Days”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절기상으로 50일이지 사실은 이미 부활을 믿는 우리들, 부활을 체험한 우리들의 삶은 그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기쁨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큰 기쁨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사소한 일들이 결코 우리에게 유혹이나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기쁨과 함께 위대한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부활이 그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요, 이 위대한 승리에 동참하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을 맞게 되는 성도 여러분, 이 기쁨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역시 14절에 “여호와는 나의 찬송이시라.”고 했습니다. 

   TV에 “러브 하우스”를 지어주는 것을 공개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지체부자유자나, 소년소녀가장이나, 병든 노인들이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 살아가다가 연예인들을 통하여 지은 새로운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집을 공개할 때 장면이 매우 극적입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베일로 가려놨다가 집 주인과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베일을 젖히고 새로 지은 집이 공개됩니다. 옛날의 허술하던 그 집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눈부실 만큼 훌륭하고 아름대운 새집이 나타납니다. 집 주인은 물론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눈이 뚱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집니다. “와- 와-”를 연발하게 됩니다. 이럴 테면 “고생 끝, 행복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것이 저 러브 하우스와 비교하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물론 저 요한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정금과 보석과 진주로 지어진 하늘나라를 나의 유업으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 눈이 튀어나오지 아니하고 배길 재간이 있습니까? 우리의 입이 찢어지도록 벌어지지 않을 재간이 있습니까? 바로 여기 우리 찬송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노래할 이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 앞에 하늘가는 물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가는 길을 닦아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입을 크게 벌려” 찬송하며 저 천성을 향해 나아갑시다. 

  (3) 역시 14절에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22절에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결국 사형언도를 내리고, 온갖 모욕과 고통을 가하고, 그리고 영문 밖으로 끌고나가서 십자가 못 박았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버린 돌이 바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 구원이 되었습니다. 사형 틀인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곳곳에 십자가 표지를 달아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엄청난 사건을 확실하게 성취한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부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에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날이라 (우리가 마땅히)기뻐하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 기간에 더욱 근신하는 뜻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는 일을 삼가듯이 초대교회 때는 이 부활 절기의 기쁨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하여 이 기간에는 무릎 꿇는 것도 금했다고 합니다. 기뻐 뛰며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미리암을 중심으로 악기를 울리며 찬양한 것과도 방불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하여 “이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니 주님의 부활을 믿는 여러분의 온 생애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임마누엘과 할렐루야의 생애, 위대하고 영원한 “여호와 닛시”의 승리의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