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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능력 (요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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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능력 (요 20:19-23)

기독교의 양대 절기라고 하면 성탄절과 부활절을 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절도 말할 수 없이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성탄절과 부활절 중에 우리의 신앙에 더 큰 의미가 있는 날을 선택하라면 부활절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 부활절입니다. 성탄절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데, 부활절에는 무어라고 인사할까요? 오늘은 ‘할렐루야, 주님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 좋겠습니다. 전후좌우를 보시면서 부활의 인사를 나눕시다. ‘할렐루야,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19절.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거의 평생동안 따라다니는 감정 중의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삶을 가장 위축시키고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웃음을 앗아가고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하고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합니다. 인간은 온갖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타임지에 공포증(Phobia)에 관한 특집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거미나 곤충을 무서워하거나 고소공포증과 같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을 무서워하는 공포증도 있고, 길을 건너지 못하는 공포증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온갖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병에 걸리면 어떡하나, 암에 걸리면 어떡하나, 교통사고가 나면 어떡하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도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생각해봅시다. 두려움이 왜 생깁니까? 두려움은 무언가 의지할 것이 없을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있을 때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혼자 집을 지킨다든지, 혼자 밤길을 걸어갈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니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은 무언가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에 찾아옵니다. 갑자기 미래에 대해서 의심하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의심하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면 두려워집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약속에 대해서 의심했고,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의심이 그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했습니다.

두려움은 자기 생각에 집착할 때 생기게 됩니다. 자기 상상에만 내맡길때 빠지게 되는 감정입니다. 제자들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상상했습니다. 그릇된 상상은 두려움을 야기시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악한 상상을 생산해내는 공장과 같다’ 끊임없이 나쁜 상상을 합니다. 제자들은 상상할수록 두려워졌습니다. 두려운 상상은 꼬리를 물고 더 두렵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나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면 살아간다는 것이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주인이 되어 자기들의 삶을 챙겨야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업습해 왔습니다.

우리도 무언가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1)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2) 무언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3) 자기 상상 속으로 빠집니다. 4) 나 홀로 내 인생을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두려워집니다. 두려움이 업습해옵니다.

두려워하기 시작할 때 생기는 증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문들을 닫는 것입니다. 19절.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들’은 복수형입니다. 모든 문들을 닫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잠그고 폐쇄했다는 의미입니다. ‘문들을 닫았더니’ 여기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문들을 닫았으니 나갈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가둡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2) 문들을 닫았으니 어둡습니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을 칠흙같이 어둡게 만듭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3) 문들을 닫았으니 외부와 소통이 안 됩니다. 자기 한계 속에 갇혀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못하고 마음을 오픈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더 의심하게 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두려우니까 문을 닫고, 문을 닫으니까 더 두려워집니다. 이것이 두려움에 빠진 인생의 모습입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이들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임에도 두려워합니다. 제자라고 하는 직분, 레떼르, 신앙경력이 두려움을 내어 쫓지 못합니다. ‘어디든지 가오리다’ 호언장담하며 주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었지만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사탄은 직분과 관계없이, 신앙연조와 관계없이 찾아와 두려워 떨게 만듭니다.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대상이 누굽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사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전도의 대상이요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무서워서 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이 때가 언제입니까? 19절.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는 언제입니까?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시간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한나절이 지난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부활하신 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은 그 부활의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금이 옆에 쌓여 있어도 국에 넣지 않으면 짤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리하셨어도, 그것을 믿지 않으면 여전히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소금을 넣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의 통로를 통해 부활의 능력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내가 부활해야 합니다. 그 부활을 믿음으로 내 삶도 부활하도록 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예수께서 오셔야 합니다. 19절. ‘예수께서 오사’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그 곳에 예수께서 오셔야 합니다. 거기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얼마나 반전됩니까?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되어 있지만 예수께서 오시니까 “평강, 기쁨, 성령충만”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내 마음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이 나라에. 그래서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제자들이 한 때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으로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주님이 바다 위로 걸어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니 두려워말라’(마14:27) 주 예수께서 오시면 두려움은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마치 깜깜한 방에 불을 키면 한 순간에 어두움이 사라지듯이 말입니다. 어두움 자체를 우리의 노력으로 없애려고 해도 어두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두움을 아무리 바가지로 퍼낸다고 해도 여전히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두려움을 내가 없애려고 해도 더 두려워질 뿐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오시면 환하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오시되 어디에 오셔야 합니까? ‘가운데 서서’ 우리 삶의 가운데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가운데’: 이것은 주님이 중심에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 마음 한복판에 주님이 오셔야 됩니다. 문제는 가운데 누가 서 있는가입니다. 내가 서있다면 내려 앉아야 합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욕심이 물러나야 됩니다. 내가 가운데 서있는 동안에는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한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한 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19절에도, 21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러니까 두려움은 다 사라지고 기쁨과 평강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오셔서 선포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또한, 사명을 깨닫게 될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명을 잃어버리면 두려워집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두려워집니다.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면 두려워집니다. 방황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사명의식을 회복하면 용기가 생깁니다. 부활절, 우리의 잠자는 사명을 다시 일깨우는 날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오셔서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왜 두려워하느냐, 왜 머뭇거리느냐, 왜 방황하느냐. 다시 재소명을 허락하시고 우리를 파송하십니다.

금번 부활절이 사명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명을 잃어버린채 문들을 닫고 두려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문을 활짝 여시고 우리를 보내시고 파송하십니다. 사도바울도 사명을 깨달으니까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번 부활절에 다시금 우리의 사명을 깨닫고 보내심을 받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일이 드디어 동행축제입니다. 이번 한 주간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두려움으로 문들을 닫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그리고 그들을 진정한 평강의 길로 초대합시다.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의 삶의 한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평강의 삶이 되도록 그들을 초대합시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불어넣어주시는 숨입니다. 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아라” 제자들이 3년동안 훈련을 받았습니다. 성경지식도 많이 압니다. 제자라는 직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직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숨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예) 두 종류의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숨이 있는 크리스챤, 숨이 없는 크리스챤. 성령충만한 크리스챤과 명목상의 크리스챤입니다. 부활이 없는 크리스챤과 부활이 있는 크리스챤. 겉으로는 구분이 안됩니다. 그러나 너무나 다릇습니다.

예) 인천공항에 가면 비행기가 많습니다. 비행기가 처음에는 활주로를 바퀴로 굴러서 갑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창공을 향해 비상하게 됩니다. 만약 비행기가 나르지 못하고 계속 활주로를 빙빙 돌기만 한다면 진정한 비행기가 아니라 비행기 모양을 한 투어버스에 불과합니다.  

창2:7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빚으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직 생령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주님이 불어넣어주시는 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주님이 불어넣어주시는 생기입니다. 이 주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할 때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문들을 닫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조그마한 것에도 두려워합니다. 문들을 닫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절망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떨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한복판에 주님이 서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다시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문들을 닫고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활의 주님께서 불어 넣어주시는 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부활의 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두려움이 우리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사람이 아니라 부활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닫아놓았던 문들을 박차고 나아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주님의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상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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