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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과 강림 (살전 4: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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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강림 (살전 4:13~18)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 왔다가 때가 되면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떠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는 어떤 장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다음에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심판을 받고 난 다음인데 요한 계시록에서는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의 결국은 다 불 못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모두가 다 축하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 축하한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의 결국이 불 못이라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결국 뭐라고 말을 합니까? 그분 좋은 곳으로 갔을 것이라고 하며 명복을 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명복을 빌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생명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결국 불 못에 던져질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오늘 부활의 아침에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옆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는데 어리석게도 먹을 수 있는 생명나무를 놔두고 먹으면 죽는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 가운데 태어난 인생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다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말은 에녹이라는 사람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들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마도 하나님께서 에녹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낳았을 때 므두셀라라고 이름을 부르도록 하셨기 때문으로 생각이 됩니다. 므두셀라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세상 종말이 오리라”입니다. 그러니까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므두셀라가 세상을 떠나는 때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을 하나님이 그 이름을 통해서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래 에녹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가 세상에 있는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에녹을 이 죄악된 세상에 더 놓아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에녹 이후 그 누구도 죽음에서 예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엘리야입니다. 성경에 가장 악한 왕과 왕비로 기록된 아합왕과 이세벨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전했던 엘리야 선지자가 계속되는 이세벨의 살해 위협에 지친 나머지 브엘세바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간구할 때 그를 불러 호렙산까지 이끄사 하나님이 어떻게 엘리야와 함께 하시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리고는 저를 요단강 너머로 인도하신 다음 불 수레와 불 말들을 보내어주셔서 엘리야를 하늘로 들려 올리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장 험난한 때에 말씀을 전하며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엘리야 두 사람만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들림 받았을 뿐 그 외는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오늘날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다시 오실 주님을 볼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기까지는 여전히 우리는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죄에서 건져 구원하실까 고민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그 죄값을 짐승의 피로 갚도록 하셨습니다. 그래 사람들은 일 년에 적어도 세 차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죄값을 갚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매번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양과 염소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자 하나님은 계획하셨고 그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죄인인데 죄인이 어떻게 죄인을 대신할 수가 있습니까? 더군다나 죄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만 대신할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망과 관계가 없는 분의 생명으로만 죄 가운데 살아가는 죽을 생명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요 우리로 하여금 그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도록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을 이유가 전혀 없으셨던 분인데 그분이 죽어야 했던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랬기에 그분이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의 죄 문제가 다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사셔야 했습니다. 사망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어야 우리 역시 믿음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그 앞에서 배운 제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인들 역시 죽은 예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를 생각만 했지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은 수없이 예수님께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한 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새 생명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 모두가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500여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제 우리들의 거처를 예비하고 다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그 날에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큰 소리로 호령하실 것입니다. 그 때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 있던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하늘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때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큰 소리로 호령하시면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 있던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하늘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질 때 그 기분이 어떨까요? 아마도 정말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왜요? 지금까지의 그 고생스럽던 모든 일들이 우리 생각 속에 스치듯 지나가겠죠.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 이제는 모든 고생을 끝내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그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감격의 눈물이 철철 흐르게 될 것입니다. 

드디어 하늘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 우리의 두 눈으로 주님을 뵙는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벅차겠습니까? 그때는 감사와 찬양밖에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하나님 왜 우리로 하여금 그토록 고생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고 따지겠습니까? 그때는 그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간 것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무어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만 가득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순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감사의 눈물로만 가득한 우리 눈의 눈물을 씻기시며 “이제 다 끝났다 이제 다 되었다. 정말로 수고하였다. 너희들이야말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다.” 라고 주님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는 모든 일들로 인해서 우리가 원망할 이유도 없고 시비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시련들이 오히려 더 큰 은혜요 감사의 조건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내가 말하였고 내가 이루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는 굳게 믿고 오히려 감사함으로 주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빈말을 하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염려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잠시는 염려도 되겠죠. 힘들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주님이 감사와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줄로 믿으십시오. 주님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오늘을 살아가며 날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퍼할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여야 합니다.

헤어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잠시 보지 못한다고 해도 섭섭한데 하물며 죽음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할 때 그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슬퍼하고만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잠시 후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는 자들이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죽은 자들에 관하여는 라고 하지 않고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 일어난다는 것을 전재로 하는 말입니다. 우리 가족들 가운데 누가 자고 있다고 그것 때문에 슬퍼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쿨쿨 자고 있지만 시간이 되면 다시 깨어 일어날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는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마음을 갖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예쁘게 자는지 모르겠다고도 하고 어쩌면 저렇게 험하게 자느냐고도 합니다. 조용히 자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정말 시끄럽게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는 모습마저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 모습이 어떠하든 자는 사람을 보고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도 주님은 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소녀를 깨우시니 죽었던 소녀가 깨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도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깊이 잠들었으니, 그를 깨우러 가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겨져 있었고, 얼굴도 천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래요 주님 앞에는 믿는 이들의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는 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하지 말고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슬퍼하겠습니까? 오히려 감사해야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위로하고, 잠시 후 다시 만나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 주님과 함께 우리도 영원히 있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가 다시 만나서 기뻐하며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되는 그날까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안에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꺾여서 말라 버리는 가지와 같다. 사람들이 그 마른 가지를 주워다 불에 던져 태워 버릴 것이다.”라고 하셨고 계속해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이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고 그의 사랑 안에 있는 것처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림을 받기를 원한다면 날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바로 내 계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고 해도 사랑을 깨는 그런 일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도 질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워놓으신 질서를 따라 오늘을 살되 그 밑바탕이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의 참된 친구인지 스스로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정말 주님을 친구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주님의 주신 말씀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이 사랑의 법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참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나를 버릴 수 있으며 사랑하기에 오히려 더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자 힘쓰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오늘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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