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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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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마 26:36-46)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쓸모없다고 생각합니까?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까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나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절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어쩌다가 "나는 쓸모없다.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면 그때부터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열두 제자의 "쓸모"는 예수님께서 부르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지 결코 그들 자신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내게 배우라. 나 있는 곳에 있으라.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하라.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제자로서 예수님의 명령을 행하라고 당부하시고 보장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 충성일 따름이었습니다. 믿고 의지하고 위탁하고 따르라 하심입니다. 충성 하나를 요구하시며 다르게는 믿음이라고 표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위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고난, 슬픔과 고통, 패배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의 수난과 죽음은 하나님만큼 예수님 자신이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에 치러진 희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선교의 동기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의 수난과 죽음 역시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과 영생을 안겨 주기 위한 실천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당신의 수난에로 초청하십니다. 그분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동산에는 올리브나무가 가득하였고 한편에서 올리브기름을 짰던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이렇게 토로하셨습니다. "내 마음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이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마음에만 담아두기에는 너무나 컸으며, 그리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함께 깨어 있어서 자신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당하고 있는 고난이 극심하여 생명의 진액을 짜버리는 것과 같은 겟세마네 동산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건강문제,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가족 간에 얽혀져 있는 복잡한 문제,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처한 현실과 미래에 관한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잠을 못 이루게 하며 급기야 고민과 번민으로 생명을 고갈시키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우리들의 겟세마네 동산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시며 그 극한 고난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으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생명의 진액을 짜내는 겟세마네 동산은 이렇게 홀로 오를 수밖에 없는 산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겟세마네 동산을 오르셨습니다. 

고난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소외현상, 사람을 소외시키는 현상이 가장 두려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가운데 처한 사람은 고난의 파괴력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무력해 집니다. 그 결과 스스로 소외되고 그 가진 귀중한 생명을 고갈시켜 버립니다. 

  도르테 죌레는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대화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의 삶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소외 가운데 홀로 남아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 홀로 대면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홀로 두어서 단독 대면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거기에 짓눌려 신음하는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거두어 가시기도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가는 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전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그 동안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부와 권력과 사치가 무너진 그 폐허 위에서 우리들은 하나님과 단독으로 대면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찾지 못하는 영혼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역할  

고난을 당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역할은 미래를 환상적으로 그려내는 화가의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어두운 눈을 밝게 하는 안과의사의 역할입니다. 우리 안에 어두움과 파괴력에 눈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눈을 밝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난을 당했다가 새롭게 하나님을 만났던 욥은 "내가 전에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두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그 십자가에서는 그 어떤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영적인 밝은 빛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자신의 뜻을 물리치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 내 의지가 가득한 마음을 평정하기 위하여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내용의 기도를 세 차례에 걸쳐서 기도하셨고 그때마다 땀이 피처럼 흘러내렸던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하나님을 찾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뜻을 복종시켜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 후에 그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엘리야도 고난을 뚫고 당당히 걸어갔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과 함께 십자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겨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홀로 믿는 고난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제 주님의 손을 잡읍시다. 

무엇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것이 사람일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잃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로서 인생은 불행입니다. 때문에 잃은 것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렇게 절절하고 애끓는 사연이 됩니다. 잃어버림은 상처요 단절이며 암흑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삶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이 "잃어버림"의 원죄 아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었으며, 무엇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그 "잃어버림"(상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사람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초월적인 분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두려워해야 하고 경외해야 할 그 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비뚤어지게 살아갑니다. 인생은 모두 불안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피곤하여 지친 인생은 고통스럽고 불행합니다. 때문에 무엇인가 위안을 받고 싶어 돼지 머리를 두고 절하지만 거기엔 참 기쁨이 없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과, 하나님을 찾아 위안을 얻으려고 하지만 잘못 찾아 헛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참 기쁨은 하나님을 찾을 때 얻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시작됩니다. 구약성서가 말해주는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을 되찾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살 수 있었고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 고난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쏟아버리고 하나님을 찾을 기력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전심전력으로 찾으시기 바랍니다. 찾는 사람은 찾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기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을 찾는 하나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추방된 사건은 인간의 불행이 시작 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픔이 시작된 사건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어버리면 평생을 마음에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참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에덴동산 사건 이후 하나님은 아픔의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있기까지 하나님은 잃은 자식으로 기쁨을 잃고 지냈습니다. 그 고통이 십자가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당신의 자녀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돌아와 기쁨으로 만나자 

잃어버린 일은 고통이지만 되찾음은 큰 기쁨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기쁨, 사람의 기쁨은 한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라고 바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고전5:18-20). 막혔던 담이 헐리고 하나님과 사람이 친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돌아오기만 하면 십자가 은총 아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제 기쁨의 잔치가 계속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기쁨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인데 세상으로 향한 발걸음과 그 마음을 날마다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관점을 주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가장 큰 일을 눈앞에 두고 계셨는데 그 일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으로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마지막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주님은 그 마지막 밤을 기도로 지새우셨던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을 시험하기에 앞서 그 사람이 기도하는 일에 실패하도록 방해합니다. 사단은 주님의 기도도 방해하였습니다. 그 방해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주님께서는 땀을 핏방울 같이 쏟으시며 기도하셨고 심지어 천사까지도 도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시험의 시작이며 십자가의 시작입니다. 이 같은 기도에 실패한 베드로는 기도 대신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시험에 든 것입니다. 시험에 빠진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우러 오는 자들과 검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용감한 것 같으나 사실은 십자가를 거부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육신적인 생각으로 대항하여 십자가를 모면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험에 빠지게 되면 주님은 작게 보이고 세상은 크게 보입니다. 영적인 것은 보이지 않고 육신의 것만 보이게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허탄한 욕심과 이름 모를 공포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시험에 든 베드로. 그는 살기 위하여 양심을 속이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겠다던 그가 조그만 계집아이 앞에서조차 주님을 부인하고 심지어 주님을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치졸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므로 사단에게 만족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자기 자신이나 가족 중에서 도저히 합리적으로 이해되지도 않고 용납되지도 않는 시련과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그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위로해 드릴 수 없지만 다만 드릴 수 있는 말이란, 고난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과, 시험과 시련에 지지 말고, 담대하게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타조 알보다도 더 두껍고 단단했던 내 영혼의 껍질이 부드러워지는 은혜의 체험을 하시라고 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체험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신비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눈앞에 두고서도 조금도 비굴해 하거나, 도피하려 하시지 않고 십자가에로 도전의 길을 힘 있게 걸으셨습니다. 신앙의 길은 매일 십자가의 도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로 도전하는 마지막 준비의 밤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보냈습니다. 양이 양떼로부터 떨어져 방황하게 되면, 목자는 개를 시켜 그 양을 찾게 하는데 그것은 그 양을 다시 양떼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지 그 양을 잡아먹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목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얼마나 아프셨을까? 별것도 아닌 통증으로도 그렇게 힘들던데 주님이 못 박히심의 아픔이 온몸으로 다가옵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별일도 아닌 문제로 호들갑 떨며 사는데. 주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무게가 조금이나마 느껴 오는 듯합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찾아오는 이 없고 위로하는 이 없다 하여 홀로 라고 생각했었는데, 주님이 처절하게 힘들고 고민하시던 밤 사랑하고 믿던 수제자들 잠들었을 때의 외로움이 어떤 외로움인줄 이제는 알 것도 같습니다. 

얼마나 저리고 쓰리셨을까? 거절당함의 상처로 이토록 못 견뎌 속상하던데, 우리 주님 하늘 아버지께 거절당하시고 버림받으시며 사랑하는 제자들마저 외면하고 부인했을 때의 쓰라림과 저림이 무엇인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듯도 합니다. 

그 고통과 쓰라림, 그 외로움과 그 힘듦을 겪으셨기에 주님은 우리의 통증을 차마 못 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외로울 때 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힘듦을 대신 감당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 동안도 깨어있을 수 없다고 합리화시키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럼에도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면류관만 생각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럼에도 겟세마네의 기도를 외면한 채 힘들고 어렵다고 투덜대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렇게 바쁘고 그렇게 힘들고 그렇게 분주하게 사는 당신은 주님을 십자가에 또 다시 못 박는 로마병정 편이십니까? 어떻게 받은 은혜이며 어떻게 얻은 축복의 삶인데, 아직도 여전히 소유와 안일 그리고 세상의 쾌락과 명예를 위하여 어떤 소자 앞에서 열심히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주님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질고,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문제 짊어지셨건만, 아직도 기름 짜듯 한 겟세마네기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사는 당신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그토록 아프고 힘들다면서 하룻밤도 기도의 밤으로 지새우지 못하고 잠만 자는 당신의 소속은 어디입니까? 그렇게도 죽을 지경이라면서, 몇 끼니라도 금식하며 눈물의 병을 채우지 못하는 당신의 속셈은 무엇입니까? 그토록 험한 십자가 사랑하고 그 십자가 나도 지고 가겠노라고 노래하더니만 주를 위한 수고, 부담, 희생, 포기의 소리만 나오면 세상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겁쟁이 당신은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메워 주신 십자가의 비밀은 이렇습니다. 십자가는 지고 갈 때 가벼워지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면 살아나는 속성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억지로 끌고 가거나, 벗어버리려 하면 그 무게가 갑절로 변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쁨으로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려 하면 우리 주님이 그 십자가를 얼른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내가 죽으려 하면 주님이 날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영광으로 갚아 주십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의 십자가에서 주와 함께 죽기로 결심하십시오. 

죽어야 살고, 썩어야 피고, 버려야 얻고, 포기해야 소유하고, 참아야 복 받음은 십자가의 능력이며 복음의 비밀입니다. 십자가의 통증과 무게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려 하시는 분들이여! 다시 십자가로 올라가십시오. 그곳에서 당신이 죽어야 주님이 영광 받으시고 십자가의 무게는 서서히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교만과 분노와 미움과 참지 못하는 조급함과 자존심과 원망과 욕심을 죽이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와 함께 있음이 최선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하여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함이 최선입니다. 별 다른 죄 안 짖고 열심히 살아감이 자랑이 아닙니다. 주를 위하여 기름 짜듯 기도함이 진정 우리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성만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세례가 성도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성만찬은 성도의 생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은혜의 최고의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더하여 주시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즙으로 지정하여 이것을 먹고 마시도록 제정하신 성례입니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몸이 희생됨을 의미하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서로 교통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포도즙을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신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거행해야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희생의 주님의 몸에 내가 연합하는 신비의 체험입니다. 

떡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신자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는 갈보리의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나 무덤에 누우신 예수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잔치를 준비하며 당신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식탁을 열어주시는 부활하신 승리의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주님의 죽음과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과 앞으로 있게 될 하나님나라의 메시야적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즐거운 축제”인 것입니다. 다른 때보다도 오늘 이 시간의 성만찬은 새로운 의미의 성만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성만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받은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오늘 나에게 다시 살아 역사하시며 나를 변화시키는 성만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의 육신은 너무 큰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너무 큰 빛은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너무 큰사랑은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으로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전심으로 찾고 찾으며 회개하며 상한 심령에 비취는 성령의 계시로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성만찬을 통해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 쳐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주님의 인격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이 거하심을 믿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주님의 분신으로 항상 승리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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