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뜻이 이루어지이다 (욥 10:12~13, 막 14:32~36)

  • 잡초 잡초
  • 697
  • 0

첨부 1


뜻이 이루어지이다 (욥 10:12~13, 막 14:32~36)

  세상에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입에서 나간 말입니다. 둘째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입니다. 셋째는 흘러간 세월입니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이 계속 과녁을 향해 날아갑니다. ‘던져진 주사위’란 말이 있습니다. 이미 끝났고, 결과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보세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며, 던져진 주사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절대 멈춤이 없는 길입니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끝까지 갑니다. 결과만 남아 있는 주사위처럼 죽는 것 외에는 남은 것이 없는 삶입니다.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라고 애걸해도 하나님은 “그래 옮겨주마” 하지 않으십니다. 아들이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가 흐르고 채찍으로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아버지는 “도저히 안 되겠다. 그만해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버리셨습니까?”라고 해도 “그래 내려오너라”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길을 바꾸지 않고, 십자가까지 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기적, 이 모든 것의 결론이며 종합입니다. 십자가 없는 말씀과 기적은 무의미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의 말씀도 기적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섬김도 십자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의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3년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주간의 기록이 복음서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주일입니다. 사순절의 막바지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십자가까지를 말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구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예수님의 고통의 기도입니다. 겟세마네란 이름은 ‘기름을 짜는 틀’이란 뜻입니다. 감람산이라 불리는 올리브 산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기름을 짜듯 가슴을 짜는 심정으로 이곳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도입니다.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 인성과 신성의 싸움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이 기도는 인성의 고민과 신성의 결단을 의미하는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의 최고의 표준입니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살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의 복음성가 가운데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죽어라’ 하면 죽겠습니까? ‘가라’ 하면 가겠습니까?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됩니까? 탕자는 아버지 뜻보다 내 뜻을 따라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집을 나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신의 판단으로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내가 모세가 아닙니까? 내가 탕자가 아닙니까? 내가 요나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술을 배웁시다. 예수님은 악 속에서 선을 찾으셨을 뿐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현장에서 말씀하신 98개의 단어 중 30개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은 순종의 말씀입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는 말은 나의 뜻입니다. 앞으로 닥칠 육체의 죽음과 십자가의 극형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인성의 요구입니다. 그런데 내 뜻대로 되면 안 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말은 신성의 승리입니다. 십자가의 형을 통하지 않고 인류구원이 가능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은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성을 가진 분이므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인성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므로 신성이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에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가르치신 이 기도문을 당신의 겟세마네 기도에서 이루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다시스 행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큰 고기 뱃속에 사흘을 있다가 육지로 나와 니느웨로 다시 갑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억지로라도 순종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하러 갈 때에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뜻이며 계획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영이 막아 가지 못하고 반대편인 드로아로 갔습니다.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성령께서 가라는 곳으로 갑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기지 못하여 다시 유대로 돌아갑니다. 그는 아피아 가도(Via Appia)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께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하고 물어보았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가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대신 지려고 로마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역사상 수많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영성가 리처드 포스터는 “아무 갈등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종의 기도에는 반드시 갈등과 고민이 따르기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순종은 갈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순종은 내 뜻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만사가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비롯되는 고난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게 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소망을 담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믿음을 담은 말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뜻은 없습니다. 잠언 16:1에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고 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라도 계획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적 고통은 누구에게나 싫습니다. 그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를 앞서 가시며, 나의 앞날을 통찰하시는 것을 인정할 때에 순종은 가능합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예수님의 성공에 대한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성공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형통입니다. 고난을 통한 성공과 형통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을 수용하는 마음입니다.

  “이 잔을 옮기시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잔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잔입니다. 독배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악법도 법이다고 하며 독배를 마셨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독배는 독 당근과 아편이 들어 있는 치명적 약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독배를 마시는 것은 사약을 받는 순간입니다. ‘왕과 나’에서 윤비가 사약을 받는 모습을 보세요. 너무 착하고 젊잖게 독배를 받습니다. 먼저 임금께 예를 갖추고 죽음을 수용합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란 최고의 예의를 갖춘 죽음 수용 장면입니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란 말씀은 신약성경에 네 번 나옵니다. 네 번 모두가 순교의 문맥입니다. 공관복음의 수난 기사에 나오는 3번은 다 명백히 예수의 임박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1:13에서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자신의 순교적 각오를 말합니다. 14절에는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여 교회의 제자들은 바울의 순교를 인정합니다. 비정경인 전승에 의하면 폴리갑이 순교를 당할 때에 병사들이 폴리갑의 얼굴과 몸을 마구 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폴리갑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하고 순교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8에는 예수님을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복종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수용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종은 죽음이었습니다.

  죽음 수용의 5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정(denial)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난 안 죽어”하고 소리를 지른답니다. 둘째는 분노(anger)입니다. 이 때는 “이 돌팔이”하며 의사에게 달려들기도 합니다. 셋째는 공포(depression)입니다. “무서워”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낍니다. 넷째는 흥정(bargaining)입니다. 이 때는 “나를 살려주면 뭐든지 다 주겠다”고 한답니다. 다섯째는 수용(acceptance)입니다. 이 때 비로소 “그래,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하며 수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수용이 단번에 쉽게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라고 죽음수용이 쉬웠겠습니까? 하나님이시기에 오히려 우리보다 더 어렵습니다.

  주님과 뜻이 일치하는 것 즉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은 달콤한 멍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야말로 자기가 좇아야 할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명상’(meditatio mortis), 즉 의도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응시하는 연습은 우리가 시간의 가치를 분명하게 느끼고 매 순간을 의식하며 살도록 도와줍니다. 죽음도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좋은 죽음을 맛볼 수 있습니다.

  노화는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죽음을 피하는 자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를 피하는 것입니다. 칼 융은 젊을 때 삶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늙어서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삶을 두려워하던 바로 그 젊은이가 훗날 나이가 들면 그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공포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신앙이 깊은 유대인 소년이 몹쓸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가족이 소년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누구를 불러올까?”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요.” 가족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너는 유대인인데 어째서 목사님이냐?” “그럼 이렇게 전염병 환자들이 있는데 랍비님을 모셔와요?” 아이에게는 깊은 뜻은 있지만 좋은 뜻은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럼 목사는 죽어도 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론 

  1704년 30년 전쟁으로 독일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독일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던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가운데 핍박당하던 가정을 심방하며 위로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전역에 페스트라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1천만 명 이상이 죽었습니다. 목사님은 중병을 앓고 있던 가정을 심방하고 돌아오던 길에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집이 다 불에 타 폐허가 되었는데 어느 부부가 두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벤자민 슈몰크 목사는 자신도 이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그가 드린 기도를 베버의 ‘마탄의 사수’ 서곡을 붙여 찬송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단테는 “그분의 뜻 안에 우리의 평화가 있다”(In la sua voluntade e nostra pace)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는 죽음이 아닌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죽는 것 같지만 삽니다. 죽지만 영원히 삽니다.
  우리의 인성이 있습니다. 인간적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손에 순종합시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가 수난주간을 사는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죽음도 수용하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