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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입을 열지 아니하신 이유 (사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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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지 아니하신 이유 (사 53:7)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영화에 주인공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출연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몇 년 전 “집으로” 란 영화를 보셨나요? 그 영화의 주인공은 말 한마디 하지 않는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실제 그 동네에 살고 있던 할머니였답니다. 저는 그 영화에서 많은 도전을 받고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입으로 말을 안 해도 통하는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없어도 얼마든지 언어는 소통한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없어도 얼마든지 사랑은 전달되고 얼마든지 마음은 전달된다” 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상우’라는 어린이는 시골 할머니 집으로 바쁜 엄마의 손에 이끌려 왔습니다. 그 소년은 처음에는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싫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전개되면서 소년이 정말 헤어지기 싫었던 것은 엄마가 아니라 도시에서 누렸던 것들이었습니다. 텔레비전, 게임기, 컴퓨터, 이런 것과 단절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가져갔던 게임기의 건전지가 다 떨어지자, 또 치킨을 먹지 못하자 소년은 엄마와 떨어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난리를 칩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는 시골의 침묵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말을 못하고 텔레비전은 안 나오고 친구도 없는 단절된 공간, 그러나 그는 몇 날이 못 되어 시골의 침묵에 익숙해지며 말 못하는 할머니와 침묵으로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침묵으로도 할머니와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고 말이 아닌 침묵으로 할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을 합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작가는 영화 속에서 현대인들에게 언어가 없어도 대화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얼마든지 말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원했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침묵으로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의 선지자 이사야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겪어야 할 고난을 예언해 놓은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부터 몇절을 보세요. 다같이 읽읍시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마치 700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마치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보는 것처럼 기록하시지 않았습니까? 너무나도 감동스럽고 너무나도 정확한 묘사인지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장 감동되는 부분은 7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왜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토록 험한 모함을 당하시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면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당하신 것일까요? 

무척 괴로웠을 것입니다. 무척 힘들고 아팠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침묵하셨을까요? 

당대의 최고 종교인이라 하는 대제사장, 최고 학자라고 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모략과 계략에 왜 한 번도 대항치 않고 그냥 당하시는 것일까요? 능력이 없었나요? 함께 대적할 사람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얼마든지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주님은 마치 힘이 없어 당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그 엄청난 고초를 당하신 것일까요? 

여기에 아주 중대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빌라도 앞에서나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들 앞에서 침묵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구차한 변명이나 핑계하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53장 10절을 보세요. 
“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기 두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왜요? 10절 하반절을 보세요.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십자가 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셨단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응답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26장 39절 하반절을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길을 당당히 가십니다. 

26장 45절~46절을 보세요.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미 십자가 승리는 겟세마네 기도에서 끝난 싸움입니다. 주님은 그때부터 그 길을 당당하게 가십니다. 그리고는 한번도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가십니다. 그러면서 침묵을 하십니다. 마치 양이 도수장으로 끌려갈 때 가는 것처럼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고 그러기에 여러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입을 열어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셨다면 어찌되었을까요? 당신이 하나님이신 증거를 무리들 앞에 보여주고 기적을 행하면서 로마 군병들을 물리치고 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심판하셨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마도 주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주님의 뜻을 받아 입을 열지 않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았습니까? 억울함을 당했습니까? 그래서 속이 상하고 분통이 터집니까? 그럴지라도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하면 그것이 능력이고 그것이 문제 해결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침묵,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침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왜 예수님이 입을 열지 않으셨을까요?  


2. 말한다 해도 이해가 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7:14에 빌라도 앞에서 한마디도 대답치 않으시니 총독 빌라도가 이상하게 여깁니다. 왜 몇마디 변명만 해도 풀려날 수 있었는데 한마디 변명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안하십니다. 왜요? 진리가 무엇이죠? 여러분이 아는 대로 말해 보세요. 진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성경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한곳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요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진리 자체이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빌라도에게 이 말씀을 하시면 빌라도가 알아들을까요?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잠잠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을 미쳤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비판과 핍박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굳이 변명하고 핍박을 모면하려고 피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 앞에 침묵이 해결책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진리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대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 우리가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당연한줄 알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체험해 보지 못해서 말을 못하겠는데 하나만 여성 성도들에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아기가 태중에 있을 때 양수 속에 살지요? 그 아이가 그 양수를 먹을까요? 안 먹을까요? 그 양수 속에 오줌을 쌀까요? 안 쌀까요? 그 양수가 어린아이 코로 들어갈까요? 안 들어갈까요? 대답하세요. 

몰라요? 낳아 보셨잖아요? 그런데 몰라요? 먹으면 죽지요? 참 신비한 사건이 아닌가요? 

그것도 모르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니 정말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비한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감탄하고 찬양해도 부족한데 어디다대고 원망불평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 앞에서 아멘 하기를 원하십니다. 

진리가 가짜냐 진짜냐 그만 떠들고 불평 원망 그만하고, 이제 침묵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조용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자꾸 떠드니 그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떠들면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 엄청난 고난의 십자가 앞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 십자가가 주님의 죄 때문에 지신 십자가가 아니고 우리의 죄 값 때문에 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의 죄값 때문이라면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왜요?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신 속죄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4절이하를 보세요.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그 십자가의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죄값을 주님이 대신 지셨음을 믿습니까? 그분의 십자가는 내 죄를 대신 감당한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입을 다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 방법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할 말이 많지만 내 죄는 마땅히 죽을 죄 값이기에 묵묵히 그 고난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입을 다물고 계십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너를 위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졌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하고 하실 말씀이 얼마나 많으실까요? 그런데도 주님은 지금도 입을 열지 않으십니다. 

왜요? 그것은 입으로 말해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냥 침묵으로 말하시고 성령으로 말하시고 성경으로 말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의 입은 열어야 하고, 감사와 찬송의 입은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입은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불평의 입은 열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랑의 입도 삼가야 합니다. 남을 헐뜯고 흉보는 일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불신앙의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하실 말씀이 많으시나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 침묵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침묵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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