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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의 가계(家系)에서 (창 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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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가계(家系)에서 (창 4: 8-18)

사실 우리는 이유 없는 그 행동 가운데서 오래 전부터의 일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데 그 사람을 뽑을 때에 그런 규정으로 제한을 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바로 나실인과 같은 경우인데 이와 같은 예를 성경에서 나실인의 규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실인은 모태에서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본인은 물론이고 또 시체를 가까이 하여 부정하지 마라 하심... 

이 규례는 왜 정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부정함을 입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데 실패를 하지 않게 하고자 함이 있으나... 어쩌면 이것은 표피적 의도일 수 있다. 겉으로 볼 때는 이런 의도만이 보이지만 그러나 기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사람이 오염된 생각과 정신 구조를 가졌다면 이것은 한번에 그치는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연속적으로 성전을 오염시키고 하나님 앞의 제사를 더럽히게 된다. 따라서 후자의 의미는 지금보다 더 강조되어져야 한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그 품성이 조심스러운 몸가짐이랄 수 가 있는가? 평생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나실인은 평생 동안 조심스러움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하는데 모태에서부터 갖는 경험은 그의 기질로 환원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둘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마라 하심.. 시체를 보고 평안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사람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擧皆(거개)가 두려움과 恐怖를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시체를 가까이하지 마라는 말씀은 부정 방지와 함께 심리의 충격을 받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배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떤 일이든지 극단적인 경험을 갖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평상의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또 정상적인 행동과 마음이 요구될 때도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보다 극단의 심리 기제를 갖기 쉬운 것이 육의 한계 속에 사는 인간의 속성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나약함과 성품을 두루 고려한 제약으로 나실인의 규례를 정하신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오늘날 우리는 아무 가책이 없이 Kain을 향하여 비난과 쏟아지는 정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 만큼 당신은 가인과 상관이 없습니까? 또 아벨을 죽인 죄는 가인만의 죄인가? 아니면 그 시대 사람 모두의 죄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 가인이 죄인 아담의 자손이어서 그랬고 죄인의 자손은 당연히 죄 가운데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아벨은 아담의 자손이 아니던가요 ? 이 둘은 똑같이 아담의 자손이면서 아벨은 의인의 대명사처럼 불리웠고 가인은 악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같은 아담의 자손인 우리가 의인의 후손도, 악인의 후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구원을 받은 것은 당신의 자랑입니까? 아니면 구원케 하시는 이의 자랑입니까? 어쩌면 믿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사랑은 시작되어서 당신을 오늘 여기의 신앙의 자리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역시 우리도 똑같이 악의 처지에 있을 가능성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가계나 형제의 구성, 또는 집안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광범위한 은혜를 조명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따진다면 악의 환경에 처한 사람은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할 질문도 나오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첫 번째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신 은혜를 말함이고, 두 번째는 그 속에서 선을 선택해 나갈 수 있도록 섭리와 은혜를 베풀어주심을 말함이다. 그렇다고 은혜를 적게 주셨다고 그 분이 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은혜이니까? 주시고 안 주시고에 대한 권리가 죄인들에게는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가인의 범죄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에 대하여 먼저 성경을 살펴보자 지금 본 장면은 4장의 장면이고 타락한 인간에 대한 에덴 동산에서의 축출은 3장에서 마무리된다. 따라서 4장에서 가인의 출생이 나타나는 데 이것은 失樂園 후의 일이다.  우리는 부자가 망해도 삼년을 먹고산다고 하는데 그러나 3년동안 겪는 일은 먹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부자로 살다가 겪은 실패와 좌절감에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자도 자는 것이 아니며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그 삶의 질을 생각해 보라. 단순한 욕구 충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실상 망한 부자보다 아담은 더욱 심각했다. 왜냐? 에덴의 복된 것을 하나도 자기의 것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공포감, 깨어진 인간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이 극단의 낙원에서 극단의 고해로 急轉直下한 그 현실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Adam and Eve의 상실감의 깊이를 재어 볼 수 있겠습니까?  이 상실감은 아담 이후의 누구도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낙원의 경험은 오직 그들 부부만의 것이었으니까요.. 아마도 그 상실감의 깊이는 오직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입니다. 

낙원을 상실한 그들 부부는 먼저 이 관계부터 깨어진 것이 아닙니까? 아담은 왜 그 선악과를 먹고 먹게 해서.... 원망... Eve는 그 대로 왜 나를 틈을 주었느냐 혼자 두니까 그만 선악과를 먹으라는 뱀의 꾀임에 빠져들어도 지켜 주지 못한 당신은 책임이 없느냐? 하는 반항.. 아마 아담의 마음에 그는 웬수였을 것이다. 그를 지으사 처음으로 보는 순간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하였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 이는 내 웬수중의 웬수요, 걸림돌 중의 걸림돌이로다 ” 여러분 부부 관계가 좋을 때는 촌수가 없지만 사이가 나쁠 때는 가깝지만 먼 당신입니다. 

이들 부부 관계는 깊은 불신과 원망으로 서로를 白眼視하고. 그러니 자연적으로 부부 관계는 왜곡되었을 것이고 가정은 이미 문제의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갖는 불안감과 상실감은 아주 컸을 것입니다. 사실 그들 부부도 이런 낙원을 상실함에 대한 적응은 시간이 가야 서로에게 또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가인은 이런 와중에 태어났고 그리고 그 중에서 심각한 심리 왜곡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은밀한 이야기입니다. 저의 성격상 - 화가 많이 나면 그냥 참지 않습니다. 오래 살려고요- “그렇게 해서 되갔어” 하며 큰 소리를 내는데 근래는 이것이 고민스러워요 - 물론 한번 큰 소리 치고 마는 것인데 그 다음날 보면 아이가 푸른 똥을 쌉니다. 이것은 놀랐다는 이야기인데... 그래서 스트레스를 쌓지 않고 풀고 가는 것도 좋지만 아이에게... 사실 아이들은 그만큼 예민한데...

그들 부부의 깨어진 관계에서 가인은 죄를 잉태했고... 결국은 살인의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아주 중요한 인성 훈련장입니다. 그러면 아벨도 그들 가정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에덴을 쫓겨난 이 두 부부의 입장을 통해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Eve의 입장을 보십시요. 그는 에덴을 쫓겨나고 첫째는 후회와 절망감을 안고 살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왜 내가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던고... 뱀이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나는 도망쳐 올 것을 이 무슨 낭패인가? 하는 후회가 가득하고  또 남자보다 여자가 편안하고 안정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강한데 에덴을 떠난 그들의 사는 환경이 얼마나 척박하고 메마른 환경인가? 그럴수록 에덴의 추억이 Eve 그 자신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이제 깊은 한숨과 상실감은 메꿀 수 없는 허전함으로 그의 심리 속에 沈潛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가인을 잉태하고 그를 생산한 것이다. 胎中의 아이에게 마음을 기울이기에 아직 에덴 동산의 추억이 크고 그 상실감이 너무 컸다. 태어난 가인에게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보다는 한숨과 고통의 그늘을 안고 첫 아들 가인을 가슴에 품을 수밖에 없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를 바라볼 때 너는 낙원을 보지도 못하는 저주받은 인간이구나 하는 자책이 더 깊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그의 실락원의 상처가 너무 크기에...  태중의 사건이 문제가 되어서 자신도 모르는 불안을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나약한 것이 인간인데...가인에게 입힌 다른 상처는 얼마나 클까?

Adam을 보십시요.  그는 에덴을 떠나 온 그 시간부터 바깥의 환경에서 받는 공포감과 두려움 또 미래에 대한 확연한 두려움은 척박한 땅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저주하신 음성이 들려오는 듯 하지 않았겠습니까?  게다가 당장의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땅을 갈기 시작하니 오죽이나 죽을 지경이겠습니까?  땅을 갈아도 땅이 소산을 내지 않고 얼굴에 땀을 쏟고도 겨우 얻은 것이 에덴의 실과에 비하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들... 그가 무슨 안정감으로 아이에게 관심을 쏟고 사랑을 주겠습니까?  극심한 가난은 인간성까지 마비시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극단이 경험은 그래서 (1972년 비행기 사고로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한 럭비 선수단들 나중에 서로의 시신을 양식삼아 먹고 67일만에 구조된 사건을 극화한 에이리언)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겪는 그 극단의 고통, 그 와중에 아담의 가정에 가인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관심을 받기 어려운 부모의 깊은 고뇌 속에서,,, 그리고 불안 속에 잉태하고, 출생 후에도 혼자서 세상을 알기 전부터 상실감을 유산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어떻습니까? 그를 낳은 시기는 그보다 나중입니다. 이제는 아담과 하와는 그런대로 생활을 익혀 가고 적응해 가는 때이며 농사의 기술도 늘어서 다소 안정을 누리는 때입니다. 에덴의 추억이 이제는 즐거운 옛일이라면서 포기를 할 수 있는 때쯤 되었을 때 그가 잉태되고 태어났습니다. 두 부부도 이제 아기 귀여운 줄도 알고 귀여워 할 줄도 압니다. 사실 고통이 너무 클 때는 자식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인데 ... 그러나 아벨은 시기가 좋았습니다. 

이 모습을 어린 가인이 보니까/ 아벨은 부모의 사랑을 받고 그도 즐거워하는 것 같고 자기를 보니 자기는 이미 패배자입니다.  이제 그는 스스로 歪曲된 심리를 바탕 위에 두고 또 다시 다른 아픔으로 심각한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또 자신을 향하여 대하는 부모의 모습과 아벨을 대하는 부모의 모습이 다른 것을 느끼며 깊은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있을 뿐입니다. 아벨과는 형제의 情이 들기 전에 아벨을 먼저 경쟁자로서 느끼고 게다가 패배감이 깊게 깊게 그의 마음속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사건이 생깁니다. 그는 이미 조화를 생각하고 상대를 생각하고 신뢰하기 전에 불신과 원한 속에 다른 사람이나 대상의 형편을 고려할 만큼 여유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벨과 같이 제사를 드리는 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자신의 제사는 .... 그에게 있어서 아벨은 이미 형제이기 前에 경쟁자로서 자기의 몫까지 다 누리는 원수였고 지금도 또 다른 일을 통해서 자신을 누르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를 견디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일은 살인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누가 죽였습니까? 가인만의 죄입니까? 아담은 관계하지 않았나요? Eve는 관계없던가요? 오늘 가인의 문제는 아담의 문제요 Eve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문제가 가인에게서 표출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은 하나입니다. 한 사람의 일이 다른 사람에게 양상만 달리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어 나타납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영적인 것에는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구분도 안되고 치유도 어려운 것이 영적인 문제입니다. 
가인과 나는 정말 아무 관계가 없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형제를 미워하는 자 마다 이미 살인한 자니라” “간음하지 말라”  우리가 무슨 일에 대하여 잘했네 잘못했네 하는 그 말도 조심해야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그 일 때문에 마음에 미움을 품으면 이미 살인한 자라고 나의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가인이 자기 속에 있는 분노와 경쟁심과 깊은 패배감에서 억누르지 못한 그 행동이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면 오늘 우리가 마음속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살인하지 않은 살인자입니다. 아직은 안했지만 언제인가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격동시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까? 나의 왜곡된 마음의 소원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그 요청에 외면하는 동안 사회가 병들어 가고 우리의 인간성은 악해지고 에덴 추방 후의 살인이 오늘도 반복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소원을 다스리지 못하면 가인의 절규는 그렇게 멀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 바울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에서 -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울의 영적 문제였듯이 - 
@ 가인의 악행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깊이 느끼며 그 고통 가운데 잉태한 결과가 가져온 열매였듯이 - 오늘 교회에서 생긴 문제들은 먼저 믿고 믿음의 본을 세우라고 명령을 받은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延長입니다. 그것은 어떤 집사의 문제라고 하지 마십시요... 이는 바로 내 문제요 믿음으로 앞선 사람들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심각하게 물음을 당하고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그런데서 이제는 책임감을 느낍니다. 왜냐 ? 저도 그런 본을 보이라고 부름 받은 이 중의 하나이고 이제는 광연교회를 섬기라고 보냄을 받은 까닭입니다. 

저도 차츰 여러분의 문제를 보면서 나를 고쳐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요 주신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문제가 많이 있지만 바로 나부터 고쳐가면 문제가 쉬운데 남부터 고치라니까 해결이 안되고 성과도 없습니다. 아담이 가인보고 욕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문제이니까요... 지금의 시대의 고통이 먼저 믿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에게 먼저 기도하자고 하며 회개를 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가 누구를 향하여 손가락질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가인을 향하여서든 다른 죄인들을 향한 것이든 남보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 문제이니까요?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이 없는 정결함으로 자신의 마음도 영적인 상황도 지켜 가십시오, 또 삶의 주변도 지켜 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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