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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생명의 십자가 (마 10:38~39, 고전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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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십자가 (마 10:38~39, 고전 1:18)

예수의 수난절 기간에 생명이라는 문제를 익혀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생을 살도록 가르치는 삶에서 그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생명은 삶이다. 그 삶은 참 삶이다. 생명과 참 생명의 차이에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듣게 된다. 우리는 어떤 것이 생명체이고 생명체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 생명체는 삶 속에서 이뤄진다. 그 삶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명체가 움직이는 특징에서만 보고 그것을 생명이라고 말하려 한다. 

예컨대 생명의 특징을 호흡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호흡뿐만 아니라 먹고 마시는 행위와 배설하는 행위로 신진대사를 생명체의 특징으로 보려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동차 안에 일부 기계들이 기름을 먹고 움직이어 배기가스를 내 품고 있다. 이것은 똑같은 신진대사의 특징이라고 해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알게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 번식의 특징을 든다. 생명체의 특징으로 복제를 통하여 또는 새끼를 낳아 자손을 남김으로 그 특징을 삼으려 한다는 점이다. 

오늘 컴퓨터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생명체가 아니면서도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생명체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서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생명은 개체의 특징으로는 의미가 없음을 안다. 개체의 특징 자체가 이미 주변과의 관계를 이룸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신진대사활동은 결국 생태계의 에너지를 순환시킴으로서 개체와 개체들 간에 관계를 나타내며 번식 또는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자신의 에너지순환과정을 대신할 대체물을 생성시키는 방법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은 하나의 개체로 보기보다는 생태계 전체, 에너지의 원천인 태양계전체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데 관심을 가져야함을 일깨우게 한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이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조직자체, 혹은 그 조직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생명이라 할 수 있음에 이의가 없다는 점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20세기 전반기의 생명관은 실험생물학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생명현상을 물질적 현상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보편화 되어 갔지만 실제로는 모든 생물학자들이 그런 입장으로 추종하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생명현상은 전체성의 개념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전체론이 연구제시 되었음을 안다. 예컨대 개체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생명현상은 항상성, 통합, 개체의 생명현상과 환경을 연계시켜 다루는 생태계 등 개념으로 전체성의 개념에 접근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성서의 생명관은 자연주의적인 일원론의 생명관을 이해하는 생명현상을 전적으로 생리학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하려는데 이 그 문제를 제시한다. 성서는 이러한 입장 그리고 물질적 생명과 정신적 생명(삶)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입장과는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의 통일성을 말하며 그 목표에 따라 여러 가지 기능이 구별되기도 함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생명이 모든 인간 존재들에게 있어서 공통된 기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민족, 성,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생긴다는 기본적 특징을 뜻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서의 생명관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넘어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생명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목적에 달려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서는 운명론적인 해석을 용납하지도 않고 인간은 자유로 와서 자기가 원하는 삶(생명)을 구가할 수 있음도 안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적인 생명을 불안전한 것으로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전도(顚倒)로 보아야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 이러한 상태에 대한 책임은 자기 생명을 추구하는 자유를 지닌 개인에게 있음을 알게 한다. 또한 죄가 인류의 조상 때문에 생겼다고 본다면(롬5:12). 성서는 오직 전 인류를 포괄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의해서만 개인의 삶이 해방을 얻는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는 인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는 이 삶을 살기 위해 상호의존적이고 공존적이며 상부상조에 의해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규정한 점에 유의하게 된다. 예수는 자기 자신 안에 이 생명을 간직하고 있기에 생명을 버림으로서 실제로 그 본을 보여주고 인류의 생명을 질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으로 한 변화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음에서 옮겨져 생명으로 들어갔다. 이 생명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사랑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신앙한다. 

이 은혜를 인류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고 사랑하며 소망하게 되는 때부터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삶을 최상의 삶의 형태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는 인류에 구원의 문이다. 곧 이것은 생명의 문이다. 예수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하게 된다. 이 사랑은 우리의 이웃이나 친구를 사랑하는데 만 그치지 않는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참으로 생명을 다하는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은 우리가 어떤 공로가 있어서 사랑하는 받는 것이 아니다. 희생제물을 많이 받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위해 순교자가 됨으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랑은 주고받는 사랑이 아니고 대가를 바라는 그런 사랑이 아니다. 그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됨에 대한 사랑하심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스스로 생명을 지니신다. 하나님은 생사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음으로만 신앙해야 한다. 신앙이란 생명의 삶을 사이에 두고 두 가지의 세계가 갈라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두 가지의 세계란 시간과 영원의 세계요 제한된 자아와 확대된 자아의 세계요 상식의 세계와 신비의 세계, 인간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신앙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의 세계는 시간의 제한에 얽매이어 죄로 가득차서 제한된 생명이 없는 자아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번민의 세계에서 살지만 신앙의 삶을 거쳐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영원과 구원의 경험을 얻어 자유와 해방을 얻은 생명의 사람들이 사는 삶인 것이다.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은 십자가의 삶의 새로운 차원을 알게 된다. 요한복음 10:9에는 이 사실을 알게 한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신진대사) 꼴을 얻으리라’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다. 

누구나 참 삶의 풍요로움으로 사는 데는 새로운 삶(생명)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며 삶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관계에서만 비로써 자기를 완성시킬 수 있다. 예수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방하게 된다. 그 사람은 십자가를 진다. 그러므로 수난주간에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지혜는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생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십자가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인간을 만나실 때 그 난국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인간들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해 택하신 구원의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고 또 그 동의어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은 서로 나누이고 소외된 인류에게 한 공동체의 삶을 만들어 내는 말이 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원했던 희생제물의 자격으로서 저주를 자기가 스스로 취하심으로서 그 저주를 파괴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이제까지 도저히 쳐부술 수 없던 권세를 깨어버렸고 이 권세를 깨어버림으로 그리스도는 인간들을 그 굴레와 폭정으로부터 해방시켜 새롭고 영원한 자유 가운데로 이끄셨다. 

이것은 놀라운 생명의 십자가의 현현(顯現)을 알게 된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식의 신학을 더 발전시켜 하나님의 숨어 계심은 십자가가 계시한 그 가치의 전도(顚倒)안에서 죽음을 통한 생명을, 희생을 통한 승리를, 어둠을 통한 빛을, 연약함을 통한 강함을, 그리고 하나님의 미련함이 인간의 지혜로움보다 더 현명하시다는 그러한 가치의 전도(顚倒)안에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가 스콜라주의에서 손을 끊고 복음주의 신학에로 돌아선 것도 이 십자가의 신학에 근거 되고 있음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반대하면서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주장한 점에 유의하게 한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고유한 지식은 오직 성육신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 순수성 안에 계신 하나님은 알려지지 않고 숨어계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이것은 생명체의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생명현상은 십자가 안에서만 그 삶(생명)이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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