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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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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7)

지난 주간 우리는 매우 끔찍한 소식들을 들었습니다. 전직 프로 야구 선수였던 사람이 한 엄마와 그의 딸 셋을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또 지난 몇 달 동안 실종된 것으로 알았던 초등학생 두 명중 한 명이 토막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또 어떤 외국인이 성추행을 하다 어린 소녀를 수십 차례 칼로 찔러 죽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들 모두 사람을 죽이는 동기나 그 폭력성이 매우 잔인합니다. 지난 1월에는 한 가장이 사업 실패를 비관하여 자기 아내와 두 딸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느덧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당연해져 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로는 사람들이 긍휼의 마음을 잃어버린 데 있다 할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달리 측은지심이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나 동물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런데 현대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 긍휼의 마음이 잘 작동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긍휼을 잃어버린 사회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엇보다 현대사회가 물질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물질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물질중심 사회는 물질이 우상이 되고 이 물질을 소유해야만 행복이 있다는 신념을 유포시킵니다. 물질은 이미 종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권력은 내 손 안에 돈을 얼마만큼 쥐고 있느냐로부터 나옵니다. 물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물질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비참해지고 스스로를 무능력자라 생각합니다.

물질 중심의 사회는 모든 관계를 사물화 시켜버립니다. 사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돈이 없던 시대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격적 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물물교환 시장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나는 농사를 짓고 다른 사람은 사냥을 합니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의 필요한 것들을 교환합니다. 그러나 이 때 물건만 교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정도 나눕니다. 이 수확물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지, 자기 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서로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등을 나눕니다. 그러나 돈이 이 중간 과정을 대체하면서 인간 간의 직접성이 상실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의 대가로 나는 돈을 받습니다. 그것도 요즘은 은행 통장으로 입금되기 때문에 우리는 숫자만 볼 뿐이지 자신의 땀 흘린 대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돈으로 물건을 삽니다. 물건을 파는 자는 자기가 그 물건을 만든 자가 아닙니다. 그는 돈만 받고 물건을 팔 뿐입니다. 판매자에게는 돈이 중요하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길들여지다 보니 우리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물질만이 중요해집니다. 여기에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한 경쟁 사회가 형성이 되면서 옆에 있는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쟁자가 됩니다. 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고, 나는 그를 밟고 올라가야 더 많은 물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의 행복은 많은 물질을 얻는 데 있고 여기에 실패하면 인생 낙오자가 되어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더욱이 요즘 컴퓨터나 인터넷의 발달은 이런 비인간화 경향을 더 부추깁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우리 안에서 긍휼의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긍휼의 마음은 사람을 볼 때 생깁니다.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숫자를 보지 말고 그 단순한 숫자 하나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 하나 하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정부나 기업체에서 구조조정 하기 위해 몇 명을 자르고 퇴출시켰다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경영 합리화를 위해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며, 또 한편 그동안 철밥통이라 생각했던 것이 깨지는 것을 보며 고소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퇴출당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한 인생이 무너지는 것이고, 또 한 가족이 생존의 위기로 몰립니다.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았다면 우리는 함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맹자』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제선왕이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그 앞으로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소는 제사에 바칠 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가 두려워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제선왕의 눈에 역력히 보였습니다. 그러자 제선왕이 신하를 명하여 그 소를 살려 두라고 합니다. 대신 양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왕이 비싼 소는 살리고 싼 양을 받쳤다며 인색하다고 비방합니다. 그렇지만 맹자는 이 왕에 대해서 오히려 칭찬하며 이것이 인의 실천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소는 직접 보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금수가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 죽어 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며 그것이 애처롭게 우는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주방을 멀리 합니다.” 

이것이 바로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맹자의 이 예화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만남이라는 사건입니다. 제선왕은 소를 만났기 때문에 소의 불쌍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요즘은 만남이 없습니다. 설교도 영상으로 드립니다. 아이들은 컴퓨터에 빠져 있습니다. 보지 못하니 잔인해집니다. 사람이 먹는 음식에 유해한 것을 넣는 것도 생산자가 소비자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사람을 만나도 우리는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의 경쟁자일 뿐입니다. 내가 이용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사람을 만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만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서 긍휼의 마음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교리나 율법의 틀에 비추어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째 누워 있던 병자들을 고쳐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예수를 비방합니다. 그들은 38년 동안 누워있던 사람의 고통이나 그가 걷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단지 딱딱한 율법만 보였을 뿐입니다. 이들의 마음속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또한 안식일에 이 병자를 구지 일으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었으니 하루 더 누워 있는다고 해서 무슨 큰 일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사랑입니다. 단 하루라도 참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그 병자가 불쌍하게 보였고 그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 딱딱한 교리보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곧 이들은 자신의 신면이나 교리 때문에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봅니다. 평화와 사랑을 앞세워야 할 종교인들이 오히려 더 배타적이 되고 호전적이 됩니다. 근본주의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고 과격한 이슬람 교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은 없고 소위 신성한 교리만 있을 뿐입니다.

교리나 자기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 모습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인은 그 곁을 지나다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사마리아 인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다 내어 강도만난 자를 도와줍니다.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사마리아 인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교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들은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완악해지면 긍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긍휼의 하나님

이 긍휼의 마음의 원천은 바로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대표적 성품 두 가지는 공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공의의 성품만 있었다면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고 구원 또한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 대신 ‘긍휼’ ‘자비’ ‘인자’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다는 뜻인데 히브리어로 ‘헤세드’ 또는 ‘라함’입니다. 주로 헤세드가 많이 쓰이지만 긍휼의 뜻을 나타내기에는 이 ‘라함’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라함은 ‘긍휼’이란 뜻도 있지만 ‘자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궁은 아기가 뱃속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곳입니다. 아이를 임신한 엄마는 항상 자궁 안에 있는 아기를 생각하고 이를 보호합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자기 몸 안에 있는 아기처럼 소중히 생각하며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관계에서 우리는 이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을 자기 자궁 속에 들어 있는 아이와 같이 사랑하고 보호합니다. 저는 어떤 때는 하나님이 어머니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남성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모습은 마치 자상한 어머니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49장 14-16절입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마치 이스라엘의 그 모태에서 낳은 것처럼 말씀합니다. 젖 먹여 길렀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6장 3-4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안고 업고 품었다고 말씀합니다.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66장11-1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젖을 빠는 것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마치 이 장면을 보면 엄마의 젖을 양껏 먹고 행복해 하는 아기의 표정과 또 이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행복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우리의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우리를 보호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까닭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요 그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어겨도 망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이 긍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2) 모든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리고 돌아온 탕자를 아무런 책망 없이 맞으며 오히려 잔치를 베푸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신 사랑입니다. 그가 겪었을 고통을 알기에 책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께서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

하나님의 이 긍휼의 사랑 없이는 우리는 결코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 이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어떻게 긍휼할 수 있을까?

긍휼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황금률은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될 때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배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이유를 알게 되면 훨씬 더 타인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격언에서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공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꼭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눈을 가지고 보았고 사람의 느낌으로 느꼈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긍휼의 마음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세히 알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 없고,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처럼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은 입장에 처할 때 우리는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썼던 신영복 선생이 있습니다. 이분이 7,80년대 근 2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쓴 책인데 이 책의 한 부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것은 같은 위치에 선다는 것입니다. 같은 입장에 서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상대방에 대해서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실 긍휼히 여기는 것 그 자체가 복입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가 행복합니다. 이 긍휼은 현재적인 보상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화내는 것보다,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때 우리 마음은 오히려 편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그 긍휼의 은혜가 언젠가는 자기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세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셔의 입을 통하여 긍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긍휼은 고요히 내리는 빗방울처럼 긍휼을 베푸는 사람과 긍휼을 받는 사람을 다함께 축복한다.”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결정적으로 마지막 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은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무리로 가르는 최후 심판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영광으로 오실 때에 최후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이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듯 사람들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는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칭찬합니다.

그러자 그런 칭찬을 받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그 때 임금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작은 자들,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서 찾아가고 도와준 그들이 바로 주님을 대접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 땅에서 행한 작은 긍휼이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에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의인들은 자기들이 왜 칭찬 받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긍휼의 마음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긍휼의 대가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요 긍휼 자체가 자기 행복이 된 사람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작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때 무리들은 그 아파에 겉옷을 벗어서 깔며 종려나무를 들고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환영했습니다. 이제도 주님은 작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환영하는 데 필요한 것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품은 자가 결국 예수님을 환영하게 될 것이요, 예수님으로부터 긍휼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이 은혜로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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