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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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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마 28:18-20)

목적에 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인생의 첫째 목적은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의 성취는 ‘예배’를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제’를 통해서 가족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목적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훈련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넷째 목적은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목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위해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닉 워렌은 ‘전도’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저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전도와 선교’라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전도라고 하면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선교라고 하면 외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를 들으시면서 그 개념으로 들어도 무방합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왜 전도하고 선교를 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우리도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전도와 선교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왜 그렇게 전도와 선교를 강조할까요? 그 이유는 주님이 전도와 선교를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 1:38)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자신이 오신 목적을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신 이유는 많은 영혼을 얻기 위함입니다. 요 12:24에 보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주님은 생명의 밀알로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밀알이 썩어지듯이 십자가를 통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썩어진 한 알의 밀알을 통해서 많은 열매가 열리듯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게 될 것이며 주님의 죽으심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롬 10:13,14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자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고, 복음을 들으므로 믿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에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본문을 주님이 주신 명령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는 뜻으로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말합니다. 지상명령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국내가 되었든 해외가 되었든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지상명령의 내용입니다. 이 명령이 얼마나 중요하면 승천 직전에 마지막 하신 말씀이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말씀이었겠습니까!

성령을 부어주시고 능력을 주신 이유이기 때문에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행 1:8에 보면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 받은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이유는 복음증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성령과 능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문제는 주님의 목적과 상관없이 성령과 능력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전도와 선교라는 영적인 본능이 생깁니다. 그 일을 위하여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가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멸망’이란 하나님과 단절됨과 그 결과인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학생이 기차에서 요나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옆자리 한 신사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학생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 후에 다시 나왔다는 그 얘기를 믿는가?” “그럼요.” “어떻게 그 터무니없는 얘기를 믿을 수 있나?” “자세한 것은 천국에 가서 요나에게 물어보지요 뭐.” “그 친구 지옥에 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면 되겠네요.” 이 우스운 이야기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는 고백적인 이야기입니다. 

막 9:47-49에 보면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버리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지옥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토록 고통당하는 곳입니다. 그 곳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불에 왕소금을 뿌리면 소금이 탁탁 튀듯 하는 고통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님이 살아계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가나안 농군학교에 있는 농장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 농장에는 500마리의 닭과 200마리의 앙고라토끼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한 밤중에 가족들과 생도들이 뛰쳐나가 보았지만 아비규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불이 붙은 닭들은 날개를 퍼득거리며 살아보겠다고 몸부림하다가 잿더미가 되어 뚝뚝 떨어졌습니다. 마치 빨간 폭탄처럼 털에 불이 붙은 앙고라토끼들은 여기저기서 허무하게 쓰러지고 있었지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그냥 지켜만 보자고 했습니다. 모두들 멀찍이 서서 그 비참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로님은 안타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죄악을 걸머지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참함이 저렇겠구나. 누가 먼저 시작할 것도 없이 흐느끼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온 예배당은 통곡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예배당에 성령의 불이 떨어졌습니다.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경찰관에게 폭행을 일삼던 깡패 두목이 그날 회개를 하고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유망한 청년이 거기 와서 훈련을 받던 중에 그 광경을 바라보고 예수를 믿었고 나중에는 농군이 되어서 장로님의 사위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불에 타는 닭들과 앙고라토끼를 보면서 지옥을 연상하게 되었고 그 결과 큰 회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에는 하늘에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보다는 현세에 더 초점을 맞추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명예를 얻고, 부자가 되고, 건강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성공은 잠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가정 사역자 짐 답슨(James Dobso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학창시절 목표는 테니스 챔피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했고 자신의 우승 트로피가 학교 트로피 진열장에 놓여져 있음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한 몇 년 후 어떤 사람이 그 트로피를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학교 재건축 당시 쓰레기통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짐 답슨은 말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당신의 트로피는 잊혀지고 버려지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어느 선교사님은 여러 해 동안 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두 아들이 아프리카 풍토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을 땅에 묻고 어머니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역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교사님은 슬픔과 비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해 끝내 선교를 포기하고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 일행이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을 때 해군 군악대의 연주와 예포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대통령 일행이 내리자 붉은 주단이 깔려졌습니다. 그들이 내리고 다른 승객들이 내렸습니다. 마지막에 선교사님이 힘없이 내렸을 때는 붉은 주단이 걷혀진 다음이었고 해군 군악대도 떠나간 다음이었습니다. 쓸쓸한 바닷가를 거닐며 하나님 앞에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휴가를 얻어서 사냥을 즐기고 돌아오는 대통령 일행은 저렇게 엄청난 환영을 받는데 낯설고 물설은 땅에 내 사랑하는 가족을 묻어두고 돌아오는 내게는 환영하는 사람도, 날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인생입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들아, 이 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라. 네가 진정으로 내 진정한 고향에 돌아올 때에 해군 군악대의 아름다운 연주가 아니라 천군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너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붉은 주단이 아니라 내 몸을 찢어 만든 보혈의 주단을 깔아서 너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네가 잃어버린 그 아들, 네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랑하는 아내가 하늘나라에서 천사들과 함께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으로 너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아들아, 이것이 네 삶의 마지막이 아니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산 저와 여러분을 위한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에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큰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는 전도와 선교의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전도와 선교에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이유를 고전 9:16에서 밝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해야 할 이유 중에 하나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와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40이 되면 배운 사람이나 안 배운 사람이나 똑같아 진답니다. 50이 되고 나면 고친 사람이나 안 고친 사람이나 똑같아 진답니다. 60이 되고 70이 되면 남편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그게 그거랍니다. 80이 되고 나면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같아지고, 90이 되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그게 그거랍니다. 이게 인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죽음 후에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 후에 갈림 길에서 헤어지게 됩니다. 한 길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한 길은 영벌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영생으로 들어갈 것인지 영벌로 들어갈 것인지는 이 땅에서 복음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했는지 불신앙으로 반응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하고 선교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의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두고 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많은 것을 줄 수 없어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한다면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지은 책 가운데 「죽음, 가장 큰 선물」이란 책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이란성 쌍둥이가 함께 주고받는 대화를 기록한 한 토막이 나옵니다. 여동생이 오빠에게 얘기합니다. “오빠, 우리가 저 밖에 나가면 우리를 만든 엄마와 아빠가 있을는지도 몰라”, “너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구나”, “그냥 우연히 너와 내가 만들어진 거야”, “아니야 오빠. 지금 여기서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우리에게 있을지도 몰라. 아름다운 하늘이 있고, 예쁜 꽃들이 있고, 새들이 노래하는 우리가 마음껏 자라고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네 머릿속에 누가 그렇게 나쁜 생각을 넣어 주었니? 우리가 탯줄을 꽉 붙들고 있으면 먹을 것도 있고 너와 함께 놀면 재미있잖아.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열 달이라는 이 기간동안은 그 자체에 열 달의 삶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아이가 이 땅에 태어나서 90년, 100년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90년, 100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어느 순간, 내 숨이 멈추는 그 순간, 펼쳐지게 될 영원한 세계를 위하여 이 100년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참된 준비를 할 때, 그것을 위하여 진정한 투자를 할 때, 내 삶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영원에 비교해 본다고 하면 여기서 100년이라는 삶은 지구를 한바퀴 도는 것이 영원이라고 한다면 100년은 한 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가 영원이라고 한다면 물 한 방울도 안 되는 것이 100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주는 것, 그것은 영원한 세계를 준비시키는 것이므로 가장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에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빚을 졌다면 반드시 갚아야 하듯이 전도와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말 캐나다의 죤 맥켄지라는 젊은 신학도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비참한 한반도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지, 저 불쌍한 민족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전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캐나다 장로교회에 가서 조선의 선교사로 가겠다고 신청을 했으나 아직까지 캐나다 장로교회에서는 조선 선교사 파송계획이 전혀 없었고 조선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맥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조선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것인가 하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약간의 여비를 모금하여 1893년 조선 땅을 찾아옵니다. 낯설고 물설은 땅 한국 땅. 이 백성을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한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조선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옷을 조선 사람처럼 입었지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평생 버터와 치즈만 먹고 살았던 선교사님은 조선 사람이 되기 위해서 된장과 고추장만 먹었습니다. 위장은 불이 나는 것만 같았고 몇 년이 지나 위장에 큰 탈이 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날 밭에 나가서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조선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다가 일사병으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서울의 언더우드가 크리스마스날 케잌과 치즈, 우유와 설탕을 보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젊은 맥켄지는 통곡을 합니다. 부모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캐나다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조선 땅에 선교가 불가능하게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것 먹고 나면 더 이상 한국 땅에 복음을 전할 수 없겠다 싶어서 케잌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우유와 설탕을 동리아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 날은 더 많은 된장과 고추장을 먹었다고 합니다. 일사병으로 고열이 하늘을 찔렀고 정신착란증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외로움과 고독에 시달리다가 이름 없이 황해도 솔내마을에서 죽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 장로교회는 황해도에 선교사를 보냈고 함경도 원산과 황해도 솔내에 교회를 세워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보낸 많은 선교사들이 그 땅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묘지가 있는 양화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작년에 중보기도팀에서 다녀온 곳입니다. 거기 서 있는 비석에는 선교사님들의 한국사랑을 알 수 있는 비문들이 많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 더 영광스럽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다시 한국 땅에 태어나고 싶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가슴속에 있었기에 초개와 같이 생명을 버리면서도 그토록 당당하게 죽어갈 수 있었더란 말입니까? 비석을 한 두개 지나고 나면 어린아이의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선교사님의 사모님은 아이를 낳았지만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이 나오지 않아 아이가 죽어갔습니다. 풍토병에 죽어간 무명의 선교사님들, 병든 아이를 돌보는 대신 가난에 울부짖는 백성들을 향하여 달려갔다가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니 아랫목에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이런 희생의 피 위에 한국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런 피를 타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 때문에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집나간 자식을 기다는 부모의 마음보다 더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불효자인 것 같습니다. 목사인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때로는 목사도 평신도들의 헌신된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습니다. 일산에 있는 한소망교회의 가슴 뭉클한 전도의 간증이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한소망교회 집사님 한 분은 미친 듯이 전도를 하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가족도 아내도 정신이상자처럼 뭔가 소중한 보석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시간이 나면 이 골목 저 골목을 뛰는 모습을 바라보고 반대를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만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하는가를 깨달은 다음에 아내도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고 그와 함께 소그룹을 이루어서 섬기는 셀들은 강력한 중보기도 후원자들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전도현장에서 술에 찌든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를 태신자로 품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뺨을 맞기를 여러 번, 이제는 지치고 지쳐서 포기하려는 순간에 이 사람이 마약 중독자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나보다 이 사람이 예수를 더 필요로 합니다. 이 사람이 나보다 심각한 사람이니 이 사람을 전도해 주시오” 집사님은 하나님 앞에 목 놓아 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이 사람 하나만으로 나는 충분히 지쳐있습니다. 철저히 지치게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전도를 포기하게 하기 위함입니까? 사탄의 궤계입니까? 주님의 뜻입니까? 나는 알 길이 없으나 이들의 불쌍한 영혼을 내게 보여 주셨고, 내게 품게 하여 주셨사오니 하나님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저들을 건져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성령님이 저들을 건져주십시오. 전도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나님 날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몸부림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중보기도팀이 구성되어졌습니다. 집사님에게 나타난 이 사람은 세상적으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IMF로 사업장은 부도가 났고 이 일로 형제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세상에 호소할 것도 없고 억울하고 억울하여 매일 술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마약까지 맞게 되었습니다. 정신병동에 갇히기도 했고 기도원에 끌려가 묶여있기도 했습니다. 가족도 그 부모도 이 사람의 구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내도 어린 자식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사님과 셀들은 고아처럼 버려진 그 아이들을 내 아이처럼 밥을 지어주기도 하고 도시락을 싸들고 달려가기도 하고 쓰레기장 같은 집에 찾아가 청소를 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몇 번 저러다가 포기하겠지’라고 생각하고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 일수였습니다. 그러던 이 사람이 점점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만취가 된 채 한소망교회에 나타났습니다. 예배를 안내하던 교역자들은 술취한 이 사람을 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집사님을 불러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집사님이 달려나가자 집사님은 온 몸이 전율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셨군요. 이 사람을 드디어 교회로 인도하시는군요. 성령님 역사하기 시작하시는 군요” 두 사람은 끌어안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도 그냥 교회에 오는 법이 없습니다. 취해서 오기도 하고 담배를 물기도 하고 경찰서에 가 있는 사람을 끄집어 내오기도 하고, 술에 만취가 되어 전화하면 술값을 치르고 이 사람을 데려오기도 하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업어오기도 하고 아예 이 사람의 보호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족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 사람이 조금씩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시간마다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일 밤 예배에 오는가 싶더니 새벽예배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이 사람 곁에는 견고한 진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체는 병들어 있고 가슴에는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상처가 아직도 채 아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견고한 진들이 있지만 그가 변화되기 시작하자 그의 부모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의 형제들이 한소망 교회에 발을 들여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을 전도한 집사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전도와 선교를 위한 사명을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3월 30일 한 사람이 세 사람 전도하기를 원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가슴에 품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의 사랑을 실천하고 그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합시다. 잃은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전도행사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토록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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