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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겟세마네에서 올리신 주님의 기도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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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에서 올리신 주님의 기도 (마 26:36-46)

예언의 성취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부활절 이전 한 주일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사 복음서를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3년 반의 공생애 가운데서 마지막 한 주간의 기록이 전체의 약 1/3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고난이 주님의 사역에서 그 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유월절을 나흘 앞둔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 벳바게에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53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입성하시는 마당에 백마를 타고 보부당당하게 입성하지 않으시고, 그렇다고 장성한 나귀를 타지도 않으시고, 하필이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주님의 겸손하심을 보여 준 것입니다. 

메시야 선포식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이 행동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만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과 같습니다. 비록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셨지만 그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옷을 얹으니 예수님께서 그 위에 타시고 유월절을 지키려고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했습니다. 이 날 예수님을 따르면서 환호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평소에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갈릴리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큰 무리에게 에워싸여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본 예루살렘 거민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 사람이 누구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따르던 무리가 대답하기를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날 예수님의 행동이 평소와는 매우 다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부인한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공포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자기가 메시야이심을 알리신 후에도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되었으므로 친히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무리의 환호 속에서 공개적으로 입성하시는 편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기를 메시야로 선언하신 것은 엄청난 저항과 반대에 직면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 정화와 대적들의 반격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마당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 모든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만일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게 되면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의 몰락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특권을 누려온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즉시 회의를 소집해서 이번 사건의 주인공인 나사렛 예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를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유월절 명절 기간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가는 예수님의 지지자들이 소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서 명절이 지나거든 궤계로 잡아 죽이자고 했습니다(마 26:5). 그런데 예수님을 손쉽게 처치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목요일 저녁에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그들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비밀리에 체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유월절 명절 이후가 아니라 그 날 밤에 신속하게 일을 진행시키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유월절 식사 

목요일 저녁은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는 날입니다. 우리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신 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신 후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매월 첫 주일에 행하는 성찬식 의식을 이 때 주님께서 몸소 제정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겨주시면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으나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 밤에 가룟 유다는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그 길로 예수님을 체포하는데 협조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열한 제자에게 아버지가 먼 길을 떠나면서 남아있는 자식들에게 하듯이 친밀한 어조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는데, 요한복음 13장 끝에서 17장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맹세 

드디어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미하면서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맞은편에 있는 언덕을 가리키는데 그곳에 겟세마네라는 동산이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가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였고, 다른 제자들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닷새 전에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이번에 예수님께서 왕위에 오르실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장관들이 되어서 왕이신 예수님을 보필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 며칠 사이에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이제는 곧 일어날 불길한 사태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급변하게 되면 누구나 사태에 민첩하게 적응하지 못하는데, 이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의 왕이 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제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보편적인 메시야 관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에 대하여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하시자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였으므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끝까지 따르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3년 반 동안 동거동락했던 제자들의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대하면서, 또한 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을 생각하시면서 인간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매우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마태복음 26장 37절에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하였고, 38절에서는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지만 이와 같은 증언을 통해서 지극히 미미한 정도나마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인간 예수님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이제 곧 다가올 고난을 앞두시고 예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당도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 장소까지 가셨습니다. 그런 다음, 세 제자에게 이르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더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먼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고난을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구세주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셨을 리가 만무합니다. 초대 교회사를 보면,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둥에 묶여 화형을 당하고, 사자나 늑대와 같은 맹수의 밥이 되고, 칼날에 목이 잘려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의연하게 믿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찬송하면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하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그 같이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아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갖고 계셨으나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세례 요한이 증거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어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대속물이 되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인간들은 대속주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의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께서 죄인들을 대속하신다는 것은 그가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해서 지불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목숨을 버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되신 정도가 아니라 죄 그 자체로 취급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은 긍휼히 여기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는 표현은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그토록 고민하시고 슬퍼하신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자기가 이처럼 비참하게 취급당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마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습니다. 정작 예수님으로 하여금 절망 중에 부르짖게 만든 것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평화롭게 빛났다고 합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그토록 평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 집사를 귀히 보시고 친히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그를 내려다보시면서 격려해 주셨기에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만민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이므로 스데반 집사가 맛보았던 위로와 격려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실상을 아시기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옵소서” 라고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버림을 받는 것은 예수님으로서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시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편을 택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로 17절에 이르기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범죄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을 포기하시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도 그 내용은 같으나 표현이 조금 다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십자가 고난을 피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비록 모욕과 비방과 수치와 폭력과 죽음이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내가 반드시 감수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동일한 내용의 기도를 세 번 올리셨습니다. 

여기서, 세 번은 실제로 세 번 기도하신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뜻을 하나님께 충분히 고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파악하시고 수긍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우리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지 않고 기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성도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기도 응답이 없는 것은 야고보서 4장 3절에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신 대로, 기도하는 마음가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 우리의 뜻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응답 받는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이룬 뜻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간절하게 혼신을 다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보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고 증언합니다. 얼마나 힘을 쓰셨던지 모세 혈관이 터져서 피가 땀에 섞여 나와서  마치 피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5장 7절에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이처럼 간곡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온전히 드리셨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신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십자가 고난을 향하여 걸어 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순종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성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낮고 천한 삶을 경험하셨고 드디어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보다 더 나은 순종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전폭적인 믿음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그가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시는 하나님의 지시에 묵묵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 행하면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고난을 피하려고 하셨더라면 얼마든지 가능했습니다. 첫째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둘째, 올라가시더라도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지 않으셨더라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고 눈감아 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넷째로, 겟세마네 동산에 가지 말고 가룟 유다가 알지 못하는 다른 지역으로 가셨으면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님께서 이번 기회에 신적 능력을 발휘하셔서 대적들을 멸하시고 욍이 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방법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대속의 고난을 피하시면 인생들을 구원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죄 많고 허물 진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 같은 불가사의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합니다(벧전 1:8). 

우리는 강제로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없고, 강제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면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열심 있는 일꾼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 원하시거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신 주님의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무쪼록 성령께서 성도님들의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해서 대속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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