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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을 환영하라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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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환영하라 (마 21:1-11)

음성설교 준비되지 못해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주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환영했기에 ‘종려주일’이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사시는 동안, 유대주의자들이 죽임의 협박을 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이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백성들에게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따르자, 예수님을 미워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여러 가지 함정을 만들어서 질문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못하게 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아셨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셔야만 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고, 도살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해,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 당하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무리들은 자신들의 옷을 길에 펴고, 수많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다. 우리도 주님을 환영하기 바란다. 그러면 왜 주님을 환영해야 하는가?

1.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오셨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사람이 참 선지자이다.

(신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하였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여주어, 하나님께 집중하게 만든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2-3)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니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장래 일을 미리 아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미리 다 아시고 지시하셨다. 즉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매인 나귀와 새끼나귀가 있음을 이미 아셨고, 그것을 끌고 올 때, 주인이 물어 볼 것도 아셨다.

또한 주인에게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말하면, “즉시 보낼 것”도 예수님은 아셨고,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신성을 지닌 분이다. 세상을 구원하실 주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선지자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 때, 그대로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분이시다.

성경은 예수님을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다고 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말씀대로 이루시는 참 선지자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을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은 선지자의 가르침보다, 더 권세 있는 새 교훈이라며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막1:27).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마2:11). 황금은 왕 되심을 표현하는 예물이요,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하는 예물로 선지자를, 몰약은 사람을 장사할 때 쓰는데, 예수님의 제사장 되심을 보여주는 예물이다.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에 위대한 선지자가 많이 있었지만, 이 선지자들보다 더 우월하신 선지자가 예수님이다. 그래서 (히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씀은, 아들 안에서(ἐν υὶῷ) 말씀하셨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은 영원하고 완전하신 신성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가진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참 선지자로 오시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대로 이루시는, 영원한 말씀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갖자. 진정한 부흥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짐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다.


2.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이다(4-5).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슥9:9),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이루시는 말씀이다. 마가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막11:2)라고,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멍에를 메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은,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로 공적인 표현이다(사9:6).

그 당시에는 왕이 입성할 때, 모든 사람들이 나와서 맞이함으로, 왕의 위엄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이 입성할 때, 성의 모든 사람을 동원하여 도열시키고, 잘 훈련된 군마를 타고 입성했다. 제국의 수많은 집권자들로부터 로마 총독의 입성 모습까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귀는 말과는 달리 전쟁용 운송 수단이 아니라, 평상시의 운송 수단이다. 나귀는 귀족이 타고 다니던 동물이다. (삿5:10) 귀족들을 흰 나귀를 탄자들이라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아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했다. 다른 정치가 도래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잘 훈련된 군마를 타고 오시지 않았어도, 예수님은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원래 왕은 전쟁과 승리의 상징인, 말을 타고 입성했지만, 주님은 “멍에를 메지 않은 짐승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전투를 하는 말이 아니라, 전쟁을 할 수 없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다.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전쟁을 통해 정복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하여 섬기러 오신 분이라는 말이다. 평화를 위해, 겸손하게 섬기고 죽으시는, 왕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평화가 무엇인가? 온전한 관계다.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질 때, 행복하고 평화롭다.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아담의 죄로 인하여, 누구든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죄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다. 교제가 단절되었다. 막힌 담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담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담을 헐어 버리기 위하여 오셨다.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만들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오셨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이 단절의 결과 인간은, 죄악 속에서 시달리고, 전쟁과 질병과 걱정근심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신다는 말이다.

세상은 평화를 원하지만, 전쟁과 질병으로 인하여, 걱정과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아픔들을 모두 해결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멍에를 메지 않은 짐승의 새끼”를 타고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평화의 왕으로, 평화의 성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 같은 권세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멍에를 메지 않은 짐승의 새끼”를 타고 오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과도 화평할 수 있다. 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평강이 넘치게 된다. 따라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란다. 주님을 모심으로, 평화가 넘쳐나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왕 되심을 보여주었기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 머리로 이해되기 때문에 순종함이 아니라, 종이 된 우리이기에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나의 왕이 되심을 고백하는 날이다.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지러 오신 날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 예수님께서 왕 되심을 고백하시고, 주님께서 나를 쓰시겠다고 할 때, 내어드리며 순종하겠다고 결단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주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예수님은 완전하신 제사장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1년에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또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잡아서, 제사를 드려야 했다.

특히 유월절이 되면, 사람들은 양 한 마리씩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래야 자기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바로의 압제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유월절 예식을 가르쳐 주셨다.

유월절 날에 양을 잡아서, 자기 집에 피를 바르라고 말씀하시고, 피를 바른 집에는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자기의 집 문 인방과 설주에 바르게 되었다.

죽음의 사자가 유월절 날에 돌아다니면서, 애굽의 모든 사람들의 장자들을 다 죽였지만, 오직 그 피를 바른 사람의 집은, 죽이지 않고 넘어갔다. 그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기념하는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이것이 유월절 의식이다.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리고,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 함은, 그 제사의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가르쳐 준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는, 효과가 한시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하신 제사장으로 오셨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셔서, 영원히 드리시기 위하여 오셨다.

요한은 침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친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드리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이, 바로 유월절이다. 

(출12:6)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어린양은 해 질 때 죽어야 했다. 해 질 때 죽어야 하는 어린 양처럼, 예수님도 해 질 때 죽으셔야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해가 지기 전, 환한 대낮인 오후 3시경에 운명하시고 말았다. 이때는 해 질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거짓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신실히 지키기 위해서, 초자연적으로 해가 갑자기 빛을 잃게 하심으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셨다. (마27:45) “제 6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9시까지 계속하더니” 언약을 온전히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자.

(히9:22)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래서 이 죄를 없애기 위해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히9:25).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9:26).

(9:28)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고 하였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 결과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10:19)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고 하면서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살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이처럼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역이 없었다면, 우리는 용서함을 받을 수 없기에,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이 친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기에, 죄를 용서받는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그 죄로 인하여 우리들이 영원히 멸망을 받지 않게 된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완전하신 대제사장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란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들은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고서” 예수님께서 그 위에 타시도록 했다. 무리의 대다수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8),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환영하였다.

그들은 최고의 예우를 다하여 환영했다. 겉옷을 길에 펴서 예수님의 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했다. 그들은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면서, 예수님을 찬양하였다.

“호산나”라는 말씀은 “오 제발 구원하소서”(호시아 나)의 음역이다. 이 무리들은 단비를 기다렸던 초목처럼 환영하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은, 단순히 다윗 왕의 후손이 아니라, 구약에 예언되고 오랫동안 대망 하던,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심을 노래했다. 또한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말은, 천상에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찬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예루살렘 모여 있던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이렇게 예수님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선지자로서, 대제사장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했다. 평화의 왕이 아니라, 무력으로 로마군대를 파괴하고,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왕을 환영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대로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며칠이 안 되어서, 그들은 로마 총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눅23:21)하면서 소리쳤다.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달라(눅23:28)고 했다.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믿음은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말씀을 붙들어라.

종려주일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환영하는 날이다. 그런데 (요1:11) 예수님이 자기 땅에 오시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분을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만 왕의 왕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고 약속했다(요1:12). 

왜 세상에 오셨고, 왜 예루살렘에 오늘 입성하셨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제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고, 선지자로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보혈의 공로를 묵상하는 주간이 되자.

이것이 진정,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이다. 오늘 입성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환영하여, 예수님의 속죄와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주간이 되기 바란다. 또한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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