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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사 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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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사 50:4~9)  

      <어지러운 세상 중에> 

      흉악범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유명 야구 선수가 네 모녀를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런가 하면 작년 12월 안양에서 실종된 두 어린이 중에 한 명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어린 아이를 무참히 죽여서 토막시신으로 암매장했습니다. 온 국민들은 함께 실종되었던 우예슬 양의 행방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제발 살아있기만 기도할 뿐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국민들은 불안합니다. 혹시 내 자녀도 표적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람이 무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 나라에 일할 수 있으나 일하지 않는 '백수' 숫자가 3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태백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고 합니다. 고생해서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천 경쟁이 뜨겁습니다. 누구 말대로 매일 자고 일어나면 기절초풍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도 떨어지고 대권 후보를 지낸 분도 떨어졌습니다. 국회의장 물망에 오르던 분도 낙마했습니다. 연일 정치 '대학살' 혹은 '쓰나미'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권력은 참으로 비정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권 교체기에 흉흉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니 국민들은 더욱 더 불안한 것 같습니다. 숭례문 방화 사건이나 마포 네 모녀 피살 사건, 안양 어린이 실종 사건, 등은 우리 시대의 인간성이 얼마나 파괴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금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네 모녀 사건의 범인인 야구선수는 엄지손가락으로 못을 박을 정도로 엄청난 괴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무서운 힘으로 야구방망이 휘두르듯 사람들을 죽였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 죄없는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죽이는 유괴범들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섞여 살기에 항상 두렵고 염려가 됩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사람에게도 도무지 기대를 걸 수 없는 이 불안한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요? 오늘 종려주일에 예수님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불안하고 두려운 시대 속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십자가를 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난받고 죽기 위함이었지요. 살기 위해 영광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겉보기에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고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이 병들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졌습니다. 숭례문을 방화했던 채모 노인도 평소에는 말이 없고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범죄를 저지를 노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네 모녀 피살 사건의 범인 이호성씨 역시 4번 타자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팀 내의 군기반장이요 프로 야구선수들의 리더였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살인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집 아이들은 무참히 죽여 놓고 자기 아들은 잘 부탁한다고 유언을 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초등생 유괴범도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주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다 겉보기에는 멀쩡했던 사람들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이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적으로 봐서 다 정상인 사람들이 합작을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대대적인 환영을 했던 사람들은 바로 그 똑같은 입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는 폭도들이 되었습니다. 고난과 부조리와 불의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제3의 고난의 종의 노래> 

      본문은 흔히 이사야의 종의 노래 중에 세 번째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종의 고난과 승리를 노래하고 있기에 장차 예수님이 받을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승리와 연결시킵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고난의 종은 말 그대로 엄청난 고난을 받습니다. 6절을 보면 원수들이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고, 침을 뱉고 모욕을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너무나 닮았지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얼마든지 예수님의 수난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고난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치고 상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역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처받고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듣는 귀가 필요하지요. 들었으면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잘 말해야 합니다. 입이 중요하지요.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선포해서 지치고 상한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에는 네 번씩이나 "주 하나님께서"라는 말이 되풀이해서 나옵니다. 고난의 종의 사역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지요! 

      1. 학자처럼 들어야 말할 수 있다(4-5절) 

      4-5절을 보세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여기서 먼저 고난의 종은 곤고한 자를 말로 도와주는 사역을 합니다. 지치고 상한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서 세워준다는 말이지요. 흔히 생각하기에 어떻게 고난받는 사람이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위로와 희망은 고난으로부터 옵니다. 생명체는 고난이 없으면 죽습니다. 너무 편하면 죽어버리고 맙니다. 고난이 없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어떤 곤충학자가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하여 고치 구멍을 뚫고 나오는 장면을 관찰했습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구멍을 뚫고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나머지 가위를 가져다가 고치구멍을 조금 뚫어주었습니다. 나비는 고치에서 쉽게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나비는 날개를 질질 끌며 바닥을 왔다 갔다 하다가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비는 작은 고치구멍을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가운데 날개 힘을 기를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받기 때문에 산다는 것이지요! 

      오늘 이 사회의 인간성이 날로 황폐해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지만 진정한 인간성과 양심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다시 고난받을 각오를 가지면 됩니다. 한국 교회가 어떻게 하면 다시 살 수 있습니까? 십자가 앞에 납작 엎드려 죽으면 됩니다. 고난받을 각오만 되어 있으면 삽니다! MBC에서 한국 교회의 비리를 들추어냈을 때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항의하고 데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거야말로 방송국이 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이 부분적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 뒤 옷깃을 여미며 회개하고 고난의 영성을 회복하기만 하면 됩니다! 고난의 종이신 예수님이 고난받는 우리의 소망이 되심을 잊지 마십시오! 

      고난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고난받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학자처럼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아침마다 깨우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고난의 종은 말합니다. 다름 아닌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귀를 열어주셨으므로 주님께 거역도 하지 않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께만 충성한다는 것이지요. 주님만 신뢰한다는 말씀입니다.  

      옳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소망을 잃고 지치고 상한 이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인간의 말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고 들을 수 있는 귀가 활짝 열려야만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도우시니 고난을 이긴다(6-7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반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는 무리들까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예민한 주의를 기울여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전할 때 반드시 고난이 찾아옵니다. 세상 사람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6-7절은 고난의 종이 말씀을 전할 때 생기는 고난을 언급합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일은 인기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대가 많고 핍박이 심합니다. 신체적인 학대와 사회적인 왕따놓기, 갖가지 희롱이 따릅니다. 그러나 생명과 진리를 전하니 물러서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꺼이 고난을 감수합니다. 자발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이지요. 원수가 등을 때립니다. 그러나 기꺼이 등을 맡깁니다. 수염을 뽑습니다. 그대로 뺨을 맡깁니다. 침을 뱉고 모욕을 합니다.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핍박과 시련이 와도 묵묵히 견딘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이 꼭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핍박과 고난을 견디어 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그러지 않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고난의 종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세요. 주 하나님께서 고난의 종을 도우시니 그들이 모욕하여도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흉흉하고 악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3.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 계시니(8-9절) 

      어떤 핍박과 시련이 닥쳐와도 고난의 종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수치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힘은 철두철미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여기에서 이사야서 기자는 잠시 법률적인 용어를 빌리고 있습니다. 8-9절을 보세요.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고난의 종 예수님이 법정에 끌려가십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갖은 혐의를 뒤집어씌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인류를 심판하실 최고의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변호해주십니다. 그 어떤 덮어씌운 혐의도 무효로 돌리시고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그리하여 원수들이 법정에서 어떤 고소 고발을 일삼는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예수님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고난의 종 예수님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vindicator)이 함께 계시는 한, '예수님을 정죄할 자'(condemner)가 누구라고 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무죄를 선언하실 것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고난의 종 예수님을 헐뜯고 핍박하는 원수들은 9절 후반부의 말씀 그대로 옷이 낡아지듯이 해어지고 좀에게 먹히듯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후 승자가 되신다는 말씀이지요! 

      <고난 중에 주 하나님이 도우시니> 

      공산권의 종주국이었던 구 소련이 무너진 직후 무디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조 스토웰(Joe Stowell) 목사님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감옥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찬송을 자주 불렀는데 교도소장이 몹시 화가 났습니다. 

      어느 겨울밤 새벽 2시에 모든 죄수들을 깨워서 차가운 운동장에 집합시켰습니다. 그런 뒤 행진을 시키면서 야유를 퍼붓는 간수들 앞에서 찬송가를 부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때 예수 믿는 죄수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정말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불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교도소장이 한 밤중에 몰래 예수 믿는 신자들이 수감된 감방에 찾아와서 잠을 깨웠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알고 싶으니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이 깊고 세상이 불안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한 줄기 희망입니다.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었지만 불의한 자들에게 핍박을 당했습니다. 참기 어려운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의롭다 인정해주심을 확신했기 때문이지요. 

      신비하게도 고난의 종 예수님을 통하여 고난받는 자들이 엄청난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얻었습니다. 사 53: 5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요 역설입니다. 

      목포에서 잡아 올린 횟감 생선을 인천으로 수송할 때 수족관에 문어를 함께 둡니다. 문어에 안 잡혀 먹히려고 정신을 차리다 보니 몇 시간이 지나도 팔팔하게 살아 있습니다. 사나운 문어 없이 그냥 온 물고기들은 죽거나, 살아 있다고 할지라도 빌빌 거립니다. 긴장이 풀어지기 때문이지요. 비슷한 이야기로 금붕어는 자연상태에서는 보통 약 만 개의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항 속에 있는 금붕어는 어떤 위험도 없이 적당한 온도와 충분한 먹이를 공급받는데도 3천 개 혹은 4천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통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고난은 오히려 유익합니다. 복지 정책이 너무 잘 이루어진 선진국에서 자살률이 높습니다. 고난이 있을 때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깊어집니다. 긴장감이 넘치기 때문에 활력도 생깁니다. 

      사회가 어지럽고 불안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십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업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힘내십시오! 고난을 잘 이겨내십시오! 십자가의 수난이 끝나는 날 부활의 아침이 동터올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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