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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함께 하시려는지요? (마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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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시려는지요? (마 21:1~9)

할렐루야!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15~30차례 
불만/불평, 남을 비난한다고 합니다.(국민일보 2008.3.15 목. 25 참조)
아마 어떤 분은 벌써 30번을 넘긴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몇 번이나 불평하셨고, 몇 번 더 할 것입니까?

지금 미국에서는‘불평그만하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Christ Church Unity의 
웰 보웬 목사는 <불평그만운동>(No Complaints Campaign)을 전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고난주간 동안 
불평/불만/원망/비판/비난 … 하지 않고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불평/불만/원망/비판/비난 … 금하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마음먹은 제가 1부 예배 때부터 지금까지 벌써 여러 번을 참았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불평하지 말고 삽시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종려주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소리 질렀던 날입니다.(요12:13)

“호산나(Hosannah)”는 히브리어로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그 본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시118:25, 삼하14:4, 시20:9, 마21:9, 막11:9, 요12:13)

오늘부터 일주일동안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강단에 꽃 장식만 보아도 오늘부터 고난주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은 그 당시에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먹고 살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연히 의료장비나 의약품이 없었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라고 하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 
풍랑을 잔잔케 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신비로운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젊은이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무엇인가 큰 일이,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로마의 압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나귀를 탔지만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가는 예수를 향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개선장군이나 왕에게나 흔드는 
종려나무가지를 땅에 펴고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의 축발이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예수님

본문 4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길이지만 죽음의 자리로 향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값을 치루시고(롬6:23)
모든 사람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길로/진리로/생명으로/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양간에서 태어나 
짐승의 밥통(구유)에 뉘이심으로 낮은 자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낮은 자로 오셔서 활동하시던 예수님은 어느 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마 21:2~3)
이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4절) 

스가랴 9장 9절을 보면,
“ …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과 순종은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생각이’ 더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해야 온전한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끼 나귀를 가져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의심이나 대꾸도 없이 순종했습니다. 
나귀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에다 쓰려고? 언제까지 쓰려고?’라는 질문도 없이
자기의 소중한 재산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내어주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나귀 주인과 예수님이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 그렇게 귀한 것을 쉽게 내어 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나귀는 요즘의 자동차 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타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달라고 했더니 그냥 내어 드렸습니다. 

제가 매년 종려주일이면 갖는 궁금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새 차를 샀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동차 회사에서 집 앞까지 배달되어 온 새 차의 키를 받아 들었는데, 
시동도 걸어보지 않았는데 … 교회에서 사람이 와서 
‘교회에서 갑자가 차를 쓸 일이 있다고 차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보내셨습니다.’라고 했을 때 보내 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1부, 2부예배 때 그렇게 할 분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 
1부예배 때 장로님 중에 딱 한 분만 손을 들었습니다.
2부예배 때는 권사님 3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지금 또 ‘손들어 보라’고 하고 싶지만 …
제가 상처 받을까봐 그만 두겠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속으로 
‘나는 드리지 …’라는 마음이 있다 해도 정작 그런 일이 생겨 보십시오. 
선뜻 내 주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귀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나귀 주인의 순종하는 믿음은 구원 역사의 출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은 ‘이유 없이’, ‘조건 없이’시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을 행한 제자들과 나귀 주인 때문에
예수님이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왕의 행렬처럼 호위하는 군사들도 없었습니다. 초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는
승리와 번영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요12:13)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어떤 이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습니다.(마21:8)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흥분된 상태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를 뜻하며,
호산나는 ‘구원하소서,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너희들 다 죽었다’하는 마음으로 
“우리 좀 살려 주세요. 구원해 주세요.”하며 지르는 소리가 ‘호산나’입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기적만으로도 
충분히 로마를 몰아내고 옛날의 부강했던 왕국을 재건하리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의 나라의 그 영광과 화려함을 기대했습니다. 

이런 기대감으로 가득 차 외쳤던 함성이‘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움직이셨습니다. 
- 로마군대를 이스라엘 밖으로 쫓아낼 줄 알았는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마21:12) 
- 로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싸웠습니다. (눅20:1~8)
-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칠 줄 알았는데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눅19:47)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실망했고
그 실망은 분노로 바뀌게 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까지 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었지만,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자기들의 목적성취를 위한 걸음이었습니다. 
- 함성을 지르며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예수님과는 함께 하지 않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기들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소리 질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합니다. 
섬기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 자기 취미생활을 즐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굴 잘 보이고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도
그런 사람들이 한번 삐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제가 신학을 공부할 때 목회학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가 어느 교회에 부임하여 가면 제일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잘 오셨습니다. 먼저 목사님은 이 점이 틀렸고, 저것도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 목사 틀렸다. 나가야 한다’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앞잡이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열렬한 환영 그 뒤에 자기의 욕망이 담겨져 있으면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일 뿐이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다른 길/다른 방향으로 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산다고 하지만
실상 고난과 섬김을 필요로 하는 낮은 자의 길에는 
‘나는 가지 않을 테니 예수님 혼자만 가십시오.’라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성경을 들고
“예수 믿어 구원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예수 믿어 천국 시민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함께 따르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고 하셨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겸손과 순종의 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이 걸으신 길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 겸손과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한 순종의 길입니다. 
이런 종의 모습, 자신을 낮추는 모습이 있을 때 …
예수님처럼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때 …
비로소 예수님이 걸어가신 겸손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 섬기는 겸손한 자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낮추어야 하고, 자기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매번 대통령이 바뀔 때 처음에는 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바뀌고 처음에 마음에 안 들었던 분은 없었습니다.
이번 대통령도 마음에 듭니다. 나중에는 모르겠습니다만 …
저는 그분이 이 것 저 것 많은 경험을 가진 분이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어려운 사람의 삶을 잘 안다는 것이 고맙고,
더 고마운 점은 자기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마음이 고맙습니다. 

대통령 전용기라는 것 - 비행기, 헬리콥터는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중에 전용기를 내놓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용기는 아차 싶을 때/위험한 일이 있을 때 
대통령은 귀하신 분이라 그것을 타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시 비상 대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총리도 타고, 장관도 타라는 것은 …
아무리 무슨 일이 있어도‘내가 이 나라와 함께 해야 하는 대통령이다.
일하기 위해 쓰는 것이지 나 혼자 쓰는 것 아니지 …’하는 마음으로 
내놓았을 것입니다.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런 마음으로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낮아지는 것, 내 것을 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매일 아침 9시면 교회 직원들과 교역자들이 모여 예배드립니다. 
평일에는 회의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토요일이면 본당에서 예배드립니다.
그리고 교육전도사님들이 설교를 합니다.
교육전도사님들에게 주일 낮예배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고 설교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맨 앞에 앉아서 전도사들의 설교를 듣습니다.
‘아멘, 아멘’하며 설교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 
무엇이 틀렸는지, 어떻게 고쳐야 되는지를 적고 앉아 있습니다. 

물론 담임목사이기 때문에 가르쳐야 합니다. 
훗날 교육전도사님들이 제게 배웠다고 말할 텐데 …
그래서 제가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앉아서 은혜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꼬투리 잡는 것은 쉽게 잘합니다.
낮아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지난주에 <장로취임예배>를 드렸습니다. 
새로 직분을 받으신 장로님들께 장로취임패도 드리고 
성찬 보좌할 때 입으실 가운도 입혀드렸습니다. 
한 장로님께서 저에게 “좋은 가운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시기에
“수의 해드리는 것인데 좋은 것으로 해드려야죠”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훗날 돌아가실 때 
성경봉독 할 때 입었던 양복에 
성찬보좌 할 때 입던 가운을 입혀 드릴 것입니다. 
수의, 베옷을 입고 싶으시면 다른 교회로 가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훗날 그 가운을 입고 세상 삶을 끝낼 것입니다.
장로님들은 받으신 취임패를 집으로 가져가셔서 
잘 보이는 곳에 세워두셨을 것입니다.
그 취임패는 교회의 어른으로 장로의 자리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뜻으로 드린 것이기도 하지만 …
죽기까지 낮은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충성하며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라는 ‘멍에’로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강단에 오를 때마다 목에 두르는 것이 있습니다.
장식으로, 멋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5절에 있는 “멍에를 매는 짐승처럼”이라는 말씀처럼
멍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대로
‘멍에를 맨 짐승처럼/가축처럼’,‘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하는 
순종/복종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 연세 드셨고, 세상에 나가면
이런 저런 일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자리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겸손의 길에 들어서신 분들이기도 합니다. 

교회 구석구석에서/낮은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할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 섬김은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순종의 길을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1:19)

예수님은 하나님께 항상 “예”만 하며 순종하셨습니다.
결국에는 십자가의 쓴 잔도“예”하고 순종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손해가 되고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면 모든 것을 감수하고 따르는 것, 그것이 순종입니다. 

죽음과 고난의 길입니다. /font>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죽음과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은 죽음과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이미 죽음과 고난이 앞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8~19절에 보면,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어야 승리와 부활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7절에
“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롬 8:17)이라고 말했습니다. 


케냐의 마사이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안찬호 선교사님, 
요즘 <들어쓰심>이라는 책을 내셨고, 우리 교회에도 오셔서 설교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탄자니아에 파송한 홍향임선교사도 
안찬호 선교사님이 돌봐주고 있습니다. 

안 선교사님은 마사이족의 부족의 원로로 / 대추장으로 인정받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번은 아들의 결혼을 위해 한국에 돌아왔는데
아들의 결혼식에 친척들이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 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귀국하지도 않았으면서
자기 아들 장가보낸다고 나왔느냐고 괘씸해했다고 합니다.
결혼식이야 날짜를 정하고 맞추어 나오면 되지만,
선교지에서 연락도 안되고 도저히 올 수도 없는 상황인데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니까 선교현장에서 못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가족들에게 따돌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전제된 삶입니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음”(롬8:18)을 믿고
힘들지만 영광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고난을 받아도 주님 가신 길을 가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아시고 일한대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범사를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힘들게 참는 것, 눈물 흘리는 것, 
예수 이름 때문에 손해 보는 것, 내가 낮아지는 것 …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어제 우리교회 집사님께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집사님, 고신일목사입니다.”라고 했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할렐루야, 목사님 지금 개봉동에 계시죠?”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결혼 주례 때문에 개봉동에 있었거든요.
“어떻게 아세요?”물었더니 
“다 알죠. 개봉동에 사는 친구가 너희 교회 목사님 개봉동에 계시다”고 하더랍니다. 
앞으로는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할지 … 정말 놀랐습니다.

사람이 어디를 가도 다 압니다. 
여러분이 휴대 전화를 켜고 인천, 부산, … 어디를 가든지
어디에서 몇 분 머물렀는지 모두 다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참고 사는 것,
견디고 사는 것 다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리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이지만
우리들 모두 그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이 고난 주간에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믿음의 사람들, 승리의 부활을 맞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에 기쁨과 감사로 예배드리며
세상에서 땀 흘려 애쓰며 얻은 소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립니다.
저들의 정성을, 마음을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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