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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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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8)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이셨던 이승만 대통령은 평소에 "나 이승만은 운운"하는 독특한 화법을 즐겨 구사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표현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본인의 자신감을 당당하게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비판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국민들 앞에서 역시 좀 거만한 느낌을 주는 말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 이후의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대체로 "본인은"이라는 표현을 공식연설에서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으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이 언젠가 "저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대통령의 그런 말 씀씀이에 대하여 어느 신문에서 거의 감개무량한 듯한 어조로 쓴 기사가 실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비단 대통령들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구사하기 어렵고 신경 쓰이는 인칭이 바로 1인칭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고 저렇다'는 식의 말 한 마디는 자기 자신을 가장 적나라하게, 가장 직선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누구이다." 혹은 "나는 무엇이다."라는 1인칭을 인류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도 명백하게 선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내가 곧 그 메시야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 "내가 왕이니라" 등등, 정말이지 "나는 ...이다"라는 말을 예수님만큼 자주 선포했던 사람은 전무후무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예수님의 그런 '자기선언' 중에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신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것 역시 다른 자기선언들과 마찬가지로 주님 당신이 어떤 존재이신지를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수난주간의 첫날인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예수님의 이 '나는 선한 목자라'는 자기선언을 함께 상고함으로써 우리 각자 모두가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믿는 시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자기 양을 하나님의 음성으로써 불러 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본문 1절부터 3상반절에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a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양을 치는 목축업이 흔했던 팔레스틴 지방에서 아침마다 볼 수 있던 장면을 들어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양들은 밤에는 우리에서 지내고 아침이 되면 각각 목자들이 와서 자기 양떼를 골라서 인도해 나가게 됩니다.
  그런 목자들은 물론 "문으로" 정정당당히 들어가지 "다른 데로" 넘어 갈 리가 없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실 때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따라 "문으로" 들어오신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구약의 예언은 '오실 메시아'에 그 초점이 집중되어 있으며 그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참된 목자 되신 예수님만이 바로 이 '예언의 문'을 통하여 정확하게 이 땅에 오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 동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예수님 전후의 소위 성자라 불리는 자들 중 그 누구도 이처럼 미리 선포된 예언을 통해 정식으로 이 땅에 온 구세주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났으며 그리고 성장한 후에 어느 날 하루 갑자기 소위 '도통한 사람'이 되었다 식 아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양들을 인도해 줄 목자인척 한다면 그야말로 "다른 데로 넘어" 들어온 자이며 "절도요 강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라는 말씀은 그처럼 약속된 예언을 따라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 맞이한 세례요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오신 '선한 목자'께서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어지는 3하반절에서 6절에 "3b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밤새 우리에 있을 동안에는 여러 무리의 양떼가 섞여 있다가도 아침에 각각 목자들이 자기 양떼를 인도해 나갈 때가 되면 양은 그 음성을 알아듣고 자기 목자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가리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 목자의 경우라면, 양이 몇 마리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통 목자가 아니라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계시는 '선한 목자'이신 까닭에 그 모든 양들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일단 그처럼 우리에서 불러내고 나면 그 양들 앞에 목자가 앞장서서 가고 양들은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역시 "목자의 음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그 목자를 따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바로 이처럼 자기 양들을 각각 부르셨을 때 그 목자에게 속한 양들은 어김없이 그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마자 스가랴와 엘리사벳, 시므온과 안나, 마리아와 요셉은 이 '선한 목자'를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제자들과 또한 오늘 본문 바로 앞장에 나타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 속한 양들은 어김없이 그 목자의 부르는 음성에 정확하게 반응했던 것입니다. 

  아니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도 그 목자의 양,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복음의 소리를 듣게 될 때 한 명도 빠짐없이 주님 앞으로 나아오고 있습니다.
  진짜 목자가 자기 양을 부르면 양은 그 음성을 알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장년부 예배가 끝나고 부모님들이 어린이 놀이방에 가서 자기 자녀를 불러내면, 그 많은 어린이들 중에서도 그 부모의 자녀만은 당장 그 음성을 알아듣고 달려 나오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구세주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즉 구원 받기로 이미 작정되어 있는 사람을 부르시면 그 택함 받은 성도는 그 초청의 음성을 듣고 깨닫고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목자가 양을 부릅니다.
  그럼으로써 짐승에 불과했던 양이 사람의 음성을 알아듣고 사람인 목자의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먼저 불러서 찾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음성'을 사람의 귀에 들려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신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만 해도 그렇지만 그것도 '자기 이름을 각각 불러 주시는' 음성을 듣게 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특권이겠습니까?
  오늘도 이처럼 '자기 양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서 다시는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이 '선한 목자' 예수님만을 따라가는 '택함 받은 양'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자기 양에게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어 주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본문 7절로 10절에서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장면은 바로 목자가 자기 양떼를 이끌어내어 낮 동안 하는 일 즉 이곳저곳을 다니며 양들에게 꼴을 먹이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앞서 1절부터 3절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문'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결과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을 통해 우리로 들어간다는 괴상한 말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양의 문"이란 9절과 10절에 있는 문맥을 따라서, 예수님은 양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고 꼴을 얻게" 하며 무엇보다도 "생명을 얻게" 해주는 문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양이 어떤 찾아가야 할 곳을 제대로 찾아가는데 있어서 문보다 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시는 말씀은 '내가 곧 길이다'라는 말씀과 꼭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양으로 하여금 구원과 꼴과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쪽을 바로 찾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유일한 문과도 같은 선한 목자이다.'라는 말씀이 됩니다.
  적어도 참된 목자라면 그 목자는 양에게 있어서 문과 같은 존재, 즉 양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을 아주 쉽고도 확실하게 인도해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바로 그와 같은 '양의 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 즉 생명을 얻게 하는 유일한 문이십니다.
  양은 우선은 살고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역시 '온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화재가 발생하면 비상구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느냐 못 찾느냐 하는 것이 곧바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로 직결됩니다.
  오직 그 비상구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이 사망의 저주로부터 그런 귀중한 생명 구원의 길로 정확하게 인도해 주시는 유일한 문이 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행 4:12)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문을 들어오고 나가는 자는 "꼴"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선한 목자를 통해 우리는 영생의 구원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그 목자를 만나기 전보다 훨씬 더 풍요한 생을 덤으로 누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조명을 통하여 일상사를 확실히 인도받는 것, 기도로써 하나님과 일대일로 교통하는 것,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의 감격을 맛보는 것, 교회를 통해 선한 일에 참여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 - 이런 것들이 다 이 선한 목자의 문을 날마다 출입하면서 신자가 누리는 '맛있는 꼴'들이 아니겠습니까?

  양의 시야나 지각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디에 좋은 초장이 있는지 멀리 볼 수 없으며, 어느 쪽 길이 안전하고 위험한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선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뒤따라가던 양도 꼭 같이 빠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가 '문'을 열어서 인도하는 쪽으로만 가면 아주 쉽고도 확실하게 그 생존을 보장받을 뿐 아니라 가장 좋은 웰빙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기 인생의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지극히 유한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어떤 길로 가야 바로 사는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진정 행복한 삶인지조차 스스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그저 예수님만 따르면 금세와 내세에서 가장 좋고도 풍요로운 것들을 절로 누릴 수 있습니다.
  절대로 틀릴 수가 없는 길, 절대로 망하거나 죽을 리가 없는 길, 아니 '구원과 꼴과 생명'이 100퍼센트 보장되어 있는 길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만 통과하면 일사천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이처럼 당신께 속한 양들로 하여금 금세에서 중생을 얻게 하고 내세에서 더 풍성히 영생까지 얻게 해 주시려고 인도해 주시는 이 '양의 문'을 꼭 발견하고 들어가는 '복된 양'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양을 모으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실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목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11절부터 1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목자가 양을 치는 장면은 마지막 단계인 밤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아침에 양을 우리에서 내어 와서 한나절 동안 꼴을 찾아 먹이느라고 멀리 돌아다니다 보면 밤에는 그대로 들에서 야영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리고 맹수가 흔히 출몰했던 당시에는 바로 그때야말로 목자에게나 양에게나 공히 가장 위험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목자가 아닌 "삯군"이라면 그 양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죽음의 위험 앞에 내어 놓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삯을 받고 양을 대신 지켜 주는 사람은 이리가 한 마리일 때는 양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고 두 마리 이상 되면 불가피한 사고로 간주되어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리가 한 마리만 와도 저 혼자 도망칠 소지가 충분한 것이 삯군의 본성입니다.
  왜냐하면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양을 소유하고 있는 목자'는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어도 자기 양떼를 지키는 목자라면 삯군보다는 더욱 노력하고 최선을 다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양을 지키려 하다보면 그 목자 자신이 맹수에게 목숨을 잃는 일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로 그런 경우란 것은 지극히 드물 것이며 또 생긴다 해도 결코 자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고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양을 사랑한다고 해도 한갓 짐승에 지나지 않는 양이란 존재를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바칠 목자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 한 목자만은 바로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달랐습니다.
  그 '선한 목자'께서는 17절과 18절에서 "17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권세"라고 번역된 말은 '권력'(power)이 아니라 '권리'(right)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 목숨을 어디 누구에게 "빼앗기신"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의 결정권에 따라 자의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목숨을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양이 목자를 위해 죽어야 할 뿐이지 목자가 양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기상천외한 일을 하셨습니다.
  한갓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목자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낮은 존재에 불과한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이 '선한 목자'께서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셨습니까?
  그 이유를 바로 앞의 14절부터 16절에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밝히셨습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목자가 죽으면 양은 흩어지거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선한 목자'가 죽으셨을 때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생기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선 14절과 15절에 보면 목자와 양이 서로 이해하는 관계가 지극히 가까워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아는' 관계가 마치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아시고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아시는' 정도와 같은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어찌 성부와 성자가 서로 아는 정도만큼이나 완벽하고 오묘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양을 위해 죽으시는 선한 목자를 보고 우리가 그 예수님을 알게 되는 깊이와 강도라는 것은 적어도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최대한도가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이상 잘 알 길이 없을 정도로, 가장 잘 알고 충분히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선한 목자를 알게 되는 양들이 생길 때 곧 따라오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는" '큰 양떼'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때까지 하나님을 모르던 "이 우리 안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까지 인도하여 내시고, 또한 "다시 목숨을 얻으심" 즉 당신의 부활을 통하여 그들 모두를 "한 목자" 아래에 있는 "한 무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한 주로 모시는 교회에 모으시는, 너무나도 위대하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가끔 애완동물을 자식처럼 아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애완동물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대신 죽어줄 주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목자와는 상대도 될 수 없는 이 보잘 것 없는 양 같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만천하에 선포해 주시고, 이런 목자의 말로 표현할 길이 없는 선하신 모습을 보고 그 목자를 진정으로 알게 되는 양들을 모으심으로써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한 무리" 즉 '단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를 이룩하셨습니다.
  '삯군'은 물론이요 '다른 목자'들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며,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이 놀라운 십자가의 희생을 깨닫고 믿음으로써, 이 '선한 목자'의 우리 안에 모여서 그 주님의 '사랑받는 양'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양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도 특별히 취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며 어리석기로 유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꼴이나 물을 찾지 못하며 한마디로 말해서 철저하게 목자에게만 의존하는 짐승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꼭 같은 존재임을 깨달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생명의 길을 찾을 능력도 없으며 스스로 하나님을 깨달을 지혜 역시 전무한 존재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목자만 제대로 만나면 아무리 무력하고 무지한 양이라 해도 아무 문제가 있을 리 없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각자의 인생에 정말로 참된 목자, 선한 목자를 꼭 만나야만 할 이유입니다. 

  하지만 다른 아무도 사람에게 자신을 이와 같은 '선한 목자'로 나타내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복음의 음성'으로 우리를 불러 주시고, 유일한 '생명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죄인 대신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그 아래에서 한 무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도 우리에게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세상의 다른 그 어느 사람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실로 진실하면서도 당당한 어조로 선언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는 ...이다"라는 말씀들을 자주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정말 자신 충만하게 선언하셨는데, 이것은 "나는 ...이다"의 헬라어 원어인 'ego eimi'(에고 에이미)에서 '나'라는 단어가 강조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도 뚜렷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나는 ...이다"(I AM)라는 표현을 가리켜 소위 '신의 언어'(language of deity)라고 일컫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평상적인 언어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나타내고자 하실 때 가장 잘 쓰이는 '신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계시해 주실 때에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출 3:14)라고, 바로 이 패턴의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성부와 '한 하나님'이 되신 성자 예수님께서도 그와 꼭 같은 '신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 6절을 다시 보시면 "6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나는 선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이 유명한 설교를 제일 처음에 바로 그 자리에서 들었던 청중들의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이런 '신의 언어'가 무슨 거짓말처럼 들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당당한 '신적 자기선언'이 무슨 광신자의 헛소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감히 그런 식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사람은 정말 '간이 부어도' 보통 부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예수님의 진실하신 말씀보다도 불신 술친구의 말이 더 미덥다는 말입니까? 
  이런 예수님의 뜨겁고도 강력한 말씀보다도 승려나 신부나 소위 성자라고 추앙받는 사람들의 말이 더 믿어진다는 소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성인이라 해서 다 '선한 목자'는 결코 아니며 오로지 사람의 영혼과 생명을 빼앗는 '절도요 강도요 도적'일 뿐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리 어디에서 이런 '선한 목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으로 택자를 불러 주시는 목자, '영생'이라는 기가 막히도록 놀라운 축복의 문으로 인도해 주시는 목자, 아니 '양 대신 자신이 죽어 주는' 이런 목자를 세상의 그 어느 위인이나 가인이나 재사나 모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처럼 '선한 목자'를 거부하고 떠나는 양은 스스로 불행과 저주를 자초하는 가장 어리석고도 교만한 양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 오늘도 당신의 양을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에게 속한 양이 되며 그 목자께서 한 무리로 모으시는 교회 안에 거하는 가장 복된 양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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