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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낙원에 이르는 믿음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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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에 이르는 믿음 (눅 23:39~43)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게 뭐가 아름답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일을 보면서도 잘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거야 당연한 거지 뭐가 잘하는 일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신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툴툴거리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올빼미 형 인간이 있는가 하면 새벽 형 인간도 있습니다. 둘이 같이 영화를 보면서도 눈이 초롱초롱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쿨쿨 잠만 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똑같은 처지의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똑같이 사형 선고를 받은 강도들이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 편의 십자가에 또 하나는 예수님의 왼편의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전혀 반대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도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결과가 어떻게 달랐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똑같은 처지에서 한 사람은 비방하고 또 한 사람은 두둔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을 욕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여라.” 그러나 다른 죄수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너도 같은 벌을 받았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을 행한 적이 없으시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채 예수님에게 욕을 퍼붓습니다. 그러면서 비아냥댑니다. “네가 정말 그리스도라면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죽을 때가 되면 솔직해진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무엇이 그렇게 억울했는지는 몰라도 죽을죄를 저질렀으면서도 옆의 예수님을 향하여 욕을 퍼부어대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웃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상에 말종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만 이 사람이야 말로 바로 그렇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는 죽을죄를 저질러서 지금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데 예수님은 죽을 만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편의 죄수가 한 말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다 예수님이 죽을 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두 번째 강도처럼 말해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서도 오히려 그렇게 죽을만한 죄를 지은 것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욕하며 비방하는 마음이 왜 생기는 걸까요? 아무리 사람이 마음이 비뚤어진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속이 풀리는 걸까요? 하지만 또 한 사람은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 분은 아무런 잘못을 행한 적이 없으시다.”고 하며 예수님을 두둔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막 가는 인생이라고 하지만 사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아니 죽어가면서까지 이렇듯 발악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 두 번째 강도와 같이 아무리 자기는 죽을 짓을 저질러서 십자가에 죽을 지라도 그래도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서는 바른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비뚤어진 세상을 살 수밖에 없단 말입니까? 자기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도 억울해서일까요? 아니 강도짓을 해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면 그건 억울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 말처럼 누구는 더 나쁜 짓을 저지르고서도 잘만 살아가는데 자기는 재수가 없어서 붙잡혀 죽는 것이라 생각해서일까요? 

그런데 이것이 단지 십자가에 달린 이 강도만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 가운데 뭐 묻는 개가 재 묻는 개를 나무란다고 나는 그럴 수 있어도 너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막가파식의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방구 뀐 놈이 오히려 큰 소리 친다고 세상이 뒤틀려도 한참 뒤틀려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볼 때 잘 했다고 칭찬을 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볼 때 괜히 심술부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혹시 나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소심해서 말도 잘 못하고 누구와 잘 어울리지도 못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구는 다른 사람과 잘만 어울립니다. 여기저기 할 것 없이 처음 보는 사람과도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참 대단하다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저렇게 하는 걸 보니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은 정말 성격이 좋은 사람이야 하고 칭찬을 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반대로 그 사람을 욕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이고 사람이 좀 진득해야지 저렇게 아무 하고나 시시덕대고 정말 눈꼴사나워서 볼 수가 없다고 그럽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좀 화통하고 그래야지 저렇게 속이 좁아서 어떻게 사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 좀 하고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내가 못하는 걸 상대방이 한다고 할 때 정말 잘한다고 솔직히 나는 당신이 부럽다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좀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면 서로의 사이가 얼마나 부드럽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사람은 누구와도 봄바람이 불 듯 그렇게 따사론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부정적인 눈으로가 아니라 긍정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먼저 불안해 집니다. 이러다가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해서 항상 걱정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그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가운데서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있으면 더 나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앞으로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든지 싱글벙글 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을 보는 사람도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평안해집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힘든데도 전혀 힘든 사람 같지 않게 살아가는구나, 나도 저렇게 살도록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모든 것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은 그저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남의 결점입니다. 아무리 장점이 많은 사람에게서도 신기하게도 결점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결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것을 다 좋은데 이런 점은 좀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누가 가까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정적인 사람은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조차도 그 사람에게 있는 장점을 먼저 찾아냅니다. 하지만 이 사람도 이런 좋은 점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과 함께 어울리다 보면 자기의 부끄러운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어 자신을 바로 세워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말하고 격려하는 사람의 곁에는 많은 사람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또한 긍정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의 결점을 지적해주면 오히려 고마워합니다. 아하, 나는 몰랐는데 알려주니 고맙다고 내가 그런 점을 고쳐나가도록 노력할 테니 옆에서도 좀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했던 사람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한데 부정적인 사람은 성질을 냅니다. 너는 얼마나 잘났다고 그러냐고 합니다. 저 사람하고는 다시는 어울리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항변을 합니다. 아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는 너는 어떤데 그러냐고 합니다. 그러니 다시는 그 사람에게 무어라고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고 그런 사람 곁에 누가 있으려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들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냥 단지 환심을 사기 위해서 칭찬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칭찬해주는 사람과 함께 사귀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또한 힘들어 할 때 옆에서 격려해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말없이 옆에서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누가 참된 친구입니까? 힘들 때 함께 있어주는 사람입니다. 힘들어 하는 사람을 격려해주며 붙잡아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난데다 부채질 한다고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다시는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들 오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아니 큰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나는 당신을 믿어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할 때도 있는 거지 뭐 하면서 괜찮아 힘내 하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좋은 친구요 고마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좋은 친구로서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곁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이보다 더 힘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부 사이도 그렇고 우리 성도들 사이가 바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좋은 때만이 아니라 힘들 때 더 생각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십자가 양쪽에 각각 달려 죽어가던 사람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아냥거렸지만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을 두둔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주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비록 그도 죽을죄를 저질러서 십자가에 죽어가고 있지만 그 죄로만 말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람에게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도록 귀한 은혜가 베풀어졌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이 사람은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죽을죄를 저질러서 지금 십자가에 달린 것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고 하나님께서 인생들 가운데 의인이 있는가 하여 찾아보셨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인으로 살다가 죽어가는 인생입니다. 그 죄를 무엇으로 씻을 수가 있습니까?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공로로만 가능합니다.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고 고백할 때 우리의 죄가 씻김 받게 되는 것이요 이를 위해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만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말씀합니다. 

관용이 무엇입니까?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 온화하다”라고 사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 이 너그러운 마음이야말로 쓰러진 사람을 바로 세워나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기에 우리가 살 수가 있는 것이지 우리의 잘잘못을 따져서 벌하시기로 작정하시면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십계명에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 가운데 거짓말 한번 안 해 본 사람 누가 있습니까? 살인죄는 큰 죄고 거짓말은 작은 죄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도무지 이것만은 나도 못 참아 그런 말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 까지도 참아야 합니다. 누가 나를 오해한다 싶으면 내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구나. 그렇다면 내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미안하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해서 미안하다고 먼저 말할 수는 없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어 나가면 우리 가운데 다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 주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 한 마디로 인해서 이 사람이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었지 않습니까? 분명 그가 먼저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죽을죄를 지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형을 집행 당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바로 주님의 관용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자기는 죽을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관용을 구했습니다. 아니 먼저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이분은 아무런 잘못을 행한 적이 없으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결과가 낙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상대방에 대한 관용입니다. 너그럽게 받아들여주는 것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 잘못에 대해서 비난하고 욕하기보다는 오히려 품어줄 수 있는 것 아무리 속상하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너그럽게 대해줄 때 내가 베푼 관용으로 인해 나도 주님으로부터 관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로 33절에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는 사람은,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를 바꿔서 말하면 누구든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관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용을 베푸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왜 고난의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그로 인해 우리로 하여금 나음을 얻게 하기 위함이요 우리를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관용이요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양 옆에 강도들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죽을 죄인이었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버려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비난하는 사람과 관용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문제를 말하는 사람과 소망을 말하는 사람의 차이를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나는 문제를 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소망을 보는 사람입니까? 비관하는 사람입니까 희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입니까? 염려하는 사람입니까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관용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오늘 두 종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실은 둘은 다 똑같은 환경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은 비난하고 외면하는 사람이었던 반면 한 사람은 관용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었지만 또 한 사람은 긍정적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부탁했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 결과 사형수가 낙원을 허락받았습니다. 강도질을 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 말 한마디 잘했다가 이 사람은 낙원을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말이 중요합니다. 이왕이면 죽어가는 소리가 아니라 믿음의 소리 희망의 소리를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염려하는 말이 아닌 감사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난하는 말이 아닌 칭찬하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강도 그는 상대편 강도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을 행한 적이 없으시다.”고 자신의 죄인임을 그리고 예수님의 죄 없으심을 솔직히 인정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관용입니다.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너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만 하면 됩니다. 속상하다고요? 그런데 속상하다고 말을 하면 속이 풀립디까? 오히려 말을 해 놓고 보니 더 속상한 것은 아니던가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관용을 베푸십시오.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십시오. 투정을 한다 싶어도 그냥 받아주십시오. 물론 저도 잘 못합니다만 그렇다고 포기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함께 노력하십시다. 얼마나 속상하면 저럴까 참 미안하네 앞으로 더 잘하도록 할께 하면 됩니다. 관용하는 자가 또한 관용을 받습니다. 낙원이 바로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오늘 고난 주간 십자가의 두 강도와 주님을 통해서 이 관용을 배우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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