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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도(道) (고전 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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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도(道) (고전 1:18-24)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일 뿐 아니라 기독 신앙의 표상입니다. 원래부터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로마의 형법에 따라 죄수를 사형하는 사형도구였습니다. 이 형벌의 도구인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이 십자가에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예수님이 내 대신 못 박혀 피 흘리신 곳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그 대신 내가 살아난 곳이 십자가입니다. 

본문에 “십자가의 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라는 말은 길이라는 말입니다. 길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보이는 그런 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쓰임새에 따라 대단히 철학적인 용어로 사용되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 또는 “종교상의 높은 경지에 이르러 알게 되는 이치” 라고 설명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길을 사도라고 하고 제자의 길을 제자도라고 부르듯이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십자가의 길 또는 십자가의 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에는 어떤 원리가 있을 까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고 친히 행하여 주신 십자가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1) 낮아져야 높아지는 원리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2) 주어야 받는 원리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 포기해야 얻는 원리
전 11:1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4) 대접해야 대접받는 원리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5) 죽어야 사는 원리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셨고 친히 실천하셨습니다. 이상 네 가지의 원리를 종합적으로 실천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달리신 십자가는 심오한 영적 진리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세상 사람들은 이런 십자가의 원리를 어리석게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은 것은 그 방법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이미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앞에서 조롱하였습니다. 
마 27:40-41절에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군중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들 보기에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방법일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방법이 그렇습니다. 

우리 생각에 단 번에 천둥 번개를 쳐서라도 이 악한 세대에 경종을 울리시고 하나님이 큰 음성으로 한 번 소리치시면 안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고전 1: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방법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멸망당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보스럽고 어리석게 보일 뿐입니다.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 즉 철학과 학문을 중요시했던 헬라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배척했고 헬라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미련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저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요 3:14-15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이 보내신 불 뱀에 물려 다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불신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고 누구든지 쳐다보면 살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신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너무 똑똑하고 잘나서 놋 뱀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놋 뱀을 바라보면 산다구! 웃기는 소리하지마!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저 따위 쓸데 없는 짓 하지말고 당장 나타나서 내 상처를 고쳐봐..“ 라고 완악하게 말하면서 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쳐다보지 않은 그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누가 은혜를 받게 됩니까?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믿는 사람입니다. 비록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인류의 구원의 능력이 되시기 위해서 모세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놋뱀을 장대에 높이 매단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죄악의 독으로 죽은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높이 들려야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는 철학이 아닙니다. 어떤 이론도 아닙니다. 그냥 실제입니다. 내 죽을 것을 예수가 대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믿고 영접하면 삽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고상한 학문이나 철학을 가지고 접근하면 매력 있어 합니다.
아주 합리적인 이론을 제시하면 그럴듯하게 속아넘어갑니다. 그래서 다른 이방종교들의 경전은 이론적이고 합리적이며 철학적입니다. 남의 종교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불교의 경전만 보더라도 그쪽은 팔만 대장경입니다. 동양의 유교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서 삼경같은 책들은 분량이나 내용 면에서 얼마나 방대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고상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단순합니다. 
분량이라고 해야 작은 소책자 66권으로 된 단 한 권의 책입니다. 그리고 내용면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내용 전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인간을 비롯한 세상을 만드셨고 세상에 죄가 들어와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그 깨어진 관계로 인하여 인간에게는 온갖 불행과 저주, 그리고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불행과 저주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것을 약속한 것이 구약의 얘기이고 약속하셨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것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가 후일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시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 바로 성경의 내용입니다. 

내용 전개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도리를 어렵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누구든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멸망당할 사라들은 예수 십자가의 도를 아주 우습게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습게 아는 그 십자가의 원리는 놀랍게도 사람을 구원합니다. 아무 공로 없어도 어떤 죄인도 그 십자가의 원리만 알고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엡 2:16절에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리를 알고 믿으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어진 관계가 소멸되어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엡 1: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라고 하였고 엡 2:13절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의 원리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그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봅니다. 적어도 믿는 성도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요 12:23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가시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당시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인자의 진군 나팔소리가 하늘에서 들릴 줄 생각하고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인자의 영광” 영광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왕의 영광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을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로 생각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광을 승리에서 얻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얻고, 이기고, 누림에서 영광을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희생에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영광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죽음에서 영광을 볼 때, 참 된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죽어야 살고 버림으로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이고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어린아이가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교회에 가니까 커다란 더하기표가 있는데 왜 교회에 더하기표를 붙여 놓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네가 잘 보았다. 네 말이 맞다. 우리 예수님은 더하기를 하시는 예수님이란다. 주님과 내가 더하여지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하게, 선을 이루게 하시고 주님과 내가 더 하여지면 구원을 이루게 된다” 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더하기표입니다. 인생의 가치를 더해줍니다. 영원한 생명을 더 해줍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님을 믿고 그 십자가의 그 원리를 따라 삽시다.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좇아오던 햇빛인데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 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십자가라고 하는 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행복으로 이해하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십자가가 어떤 것인데 세상에 부러워 할 것이 없어서 십자가를 부러워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저는 윤동주 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잘 이해한 사람도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물론 고통스러운 일이고 비참한 일이지만, 십자가에 죽을 만큼 중요하고 사랑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알고 부러워하기까지 했던 윤동주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 고통스럽고 비참한 그곳에서도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편히 잘 살기 위하여 돈을 벌고 성공을 합니다. 돈을 벌고 성공을 하면 삶이 편해집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고 성공한 사람이 되어 편히 살면 행복해 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삶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건강해지지도 않습니다. 그 성공과 부요함이 가져다 준 편안함이 우리를 오히려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양에 이런 속담이 있답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맞는 말입니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은 팔자가 좋은 사람이고,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은 팔자가 그만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우유를 마시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 우유를 배달하는 시림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유를 마시는 목적은 건강입니다. 그런데 그 건강은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매우 재미있는 일종의 아이러니입니다. 
편히 사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일은 아닙니다. 무조건 편히 사는 것만 추구하다보면 우리들은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지고, 정신도 약해지고, 신앙도 약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삽시다.
1) 낮아져야 높아지는 원리
2) 주어야 받는 원리
3) 버려야 얻는 원리
4) 섬겨야 섬김 받는 원리
5) 죽어야 사는 원리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범을 보여주신 원리인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거기에 생명과 축복 상급과 위로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게 하소서

주님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빌라도 법정 서셨을 때 
사람들은 조롱하습니다. 

살점 찢는 채찍 소리
사람들의 외침 소리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사랑하는 제자들 모두 떠나 버리고
증오와 멸시 비웃음의 아우성 속에서 
주님은 묵묵히 그 길을 가셨습니다. 

너와 나를 위한 
애절한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 길을.....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젠 모두 끝이라고
더 이상 그를 기대할 수 없다고
자신도 못 구원한
그가 메시야일 수가 없다고 ...

그러나
십자가의 그 길만이 
진정 구원의 길인 것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주님은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고난의 그 길을...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은 
구원의 강물이 되어 온 세상을 덮었고 
세상의 모든 죄를 그 피로 다 씻었습니다. 

주님 
이젠 그 날 
우리가 비웃고 떠났던 
바로 그 길
십자가의 길 
생명의 그 길을 가게 하소서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그 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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