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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사 50:4-9, 빌 2:5-11, 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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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사 50:4-9, 빌 2:5-11, 마 21:1-11)

1.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에 대하여 들으셨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인자한 사람의 모습을 한 바위가 있어서 그 지역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런 얼굴을 한 위인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이 메시야를 대망하는 것과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어릴 때부터 항상 그 바위를 바라보고 자랐던 어네스트라고 하는 사람이 마침내 바로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하여 바라봄으로 마침내 하늘의 별 같은 수많은 후손들의 위대한 조상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멘토”라는 말이 많이 유행합니다. 가르침을 받고 본받을 수 있는 훌륭한 스승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나, 기독교 역사에서나, 아니면 우리 주변 인물들 가운데서 내가 정말 신앙적으로 본받고 배우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내서 본을 삼는다면 신앙이나 삶에 엄청난 유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의 중직자 위치에 있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후배와 또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여기 “믿음의 주”라고 하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신 분, 나에게 그런 믿음을 심어주신 분을 말합니다. 그리고 “온전케 하시는 이”라는 말은 완성자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끝까지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믿음의 위대한 승리자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나의 믿음도 완성시켜 주십니다. 승리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신앙의 승리자가 되고 동시에 삶에도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서신 본문에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바라보고 무엇을 본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고 하는 것은 단지 마음뿐만 아니라 그 마음에서 나오는 우리 삶의 자세까지를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요,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주님같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찬송가에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을 본받음이라.”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도 그렇지만 특히 이 거룩한 주간에 더욱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모습을 배우고,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가며, 주님처럼 살기 위한 결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부족하지만 겨자씨 같은 분량만이라도 주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되어져야 하겠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말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그렇다면 우리가 본받아야할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삶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1)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라고 하는 말은 자기중심을 말합니다. 육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다시 말씀드리면 사탄적인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자기 고집 등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항상 나를 지배하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늘 주님 뜻을 저버리고, 거역하고, 그 결과 주님께 도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이런 육신의 생각들이 강하게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 과감하게 “No!”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육체의 소욕을 거스른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향하여 역류하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주님께서 내 주인이 되시도록 하는 것이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즉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요,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이 비우신 것입니다.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의 전기를 쓴 피어슨 박사가 뮬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죠지 뮬러는 “박사님, 뮬러가 죽던 날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무슨 계기로 뮬러라고 하는 존재는 땅에 떨어져 완전히 깨어지고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다 보니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나는 이미 옛날에 죽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비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비우셨는데 여러분은 얼마나 위대하기에 그토록 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있습니까? 기독교 역사상 제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도 바울도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는데 오늘 여러분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때문에 죽으셔야 할 만큼 위대하단 말입니까? 그래서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서 큰소리치는 여러분 때문에 그 십자가에 죽어 가셔야만 한단 말입니까? 

한국 초대 교회 일화 가운데 김익두 목사님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는데 정말 김익두가 변화 받았는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따라다니면서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견디다 못한 김익두 목사님이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예수 때문에 김익두는 죽고 그래서 너는 살게 되었구나!” 말하자면 “예수님 아니면 오늘 너는 박살났다.” 그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종려주일과 함께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본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입니다. 

사14:에 보면 사탄의 정체에 관한 설명이 있습니다. 먼저 사탄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여기 높이 올라가는 이야기만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대적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며 땅에서 찍히리라....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우리 조상을 유혹할 때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따 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사탄은 자신도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고 했는가 하면 그를 추종하는 인간들에게도 “하나님과 같아지라.”고 충동질 합니다. 오늘 이런 사탄의 부추김에 놀아나서 높아지기 위한 경쟁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에서도, 교계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 사탄적인 방법을 동원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셨다.”고 했습니다.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낮고 천한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멸시당하고 천히 여김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음부에 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은 멸망당할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죽을 나를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지옥의 자식일 뿐인 나를 지극히 높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사탄의 길이 멸망의 길인가 하면 끝없이 낮아지신 주님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에서 제 일로 꼽는 덕목이 무엇입니까?” 당시 헬라 철학에서는 덕을 절대가치로 간주했기 때문에 비교적인 측면에서 질문했을 것입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겸손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질문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덕목은 무엇입니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번째도 역시 겸손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용기를 내어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번째도 역시 겸손이니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수없이 들은 이야기라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을 향하여 무엇인가 도전하는 이야기는 아닙니까? 과연 여러분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있습니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 가운데서 주님께 응답지 받지 못한 바리새인의 기도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가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대적이지만 겸손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 여러분이 서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은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게쎄마네에서 이 기도를 하시고 주님은 십자가 죽음을 향하여 당당하게 나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비교적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처럼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밤에 동네 어른들이 우리 집에 모여서 이야기 하는데 옛날 효자이야기였습니다. 서로 자기 아들이 효자라고 자랑하던 두 아버지가 내기를 했습니다. 지붕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자기 아들에게 소를 몰아지붕으로 올리라고 명령해서 아들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김씨 노인이 자기 아들을 불러 소를 지붕으로 끌어 올리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했습니다. 아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버지, 정신 있습니까?”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김씨 노인은 실패했습니다. 

다음은 권씨 노인이 자기 아들을 불렀습니다. “얘야, 지붕에 사다리를 걸쳐 놓아라.” 아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외양간에 가서 소를 몰고 나와 지붕으로 끌어올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두말하지 않고 소를 몰고 나와서 사다리 앞에서 “이랴! 이랴!”하면서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소가 사다리로 올라갈 수도 없거니와 도무지 올라가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아들은 계속해서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한참 바라보던 아버지는 “그만 됐다.”고 했습니다. 소를 지붕 위로 끌어올리지는 못했지만 권씨 노인은 성공했고 승리했습니다. 덩달아 아들도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옆에 앉아있는 저를 가리키면서 “자 같으면 두말하지 않고 소를 사다리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아버지께서 외양간에 가서 소를 몰고 나오라고 할까봐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왜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주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식이나, 능력이나, 경험을 앞세워 마음대로 판단하고 불순종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늘 자신의 불순종한 그 판단이 옳았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느냐 하는 그 결과가 아니라 얼마나 “아멘!”하고 순종하는가를 보십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순종할 때 주님이 감당하도록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순종하므로 주님께 영광 돌리고 사랑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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