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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마 26:5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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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마 26:57~68)

1. 종려주일에

오늘은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기 위하여, 또 예수님으로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유월절이 일주일이 남았을 때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그 날, 무리들은 마치 왕이 자기 성으로 입성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펴서 양탄자처럼 깔았고, 또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요12:13).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종려주일은 4세기경에 와서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이때만 되면,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행진하는 특별한 의식이 예루살렘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려주일, 특별히 첫 번째 종려주일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종려주일의 첫 번째 의미는 고난주간(Passion week)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금요일이 이 주간에 들어있기 때문에, 모든 교회들은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으로 들어가면서 아주 특별한 한 주간을 보냅니다. 이번 주보에 실었습니다만, 고난주간을 보내는 성도들은 일반적으로 첫 번째 고난주간에 일어났던 주님의 고난 일정에 따라 주님과 주님의 고난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또 그것에 동참하는 한 주간을 보냅니다. 

첫째 날인 월요일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셨고(마21:18~19, 막11:12~14),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마21:12~13, 막11:15~19). 

둘째 날인 화요일에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부터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막11:27~33, 눅20:1~8)라는 비난 섞인 질문을 받으셨으며, 경고성의 세 가지 비유와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21:28~22, 막12:1~12)를 말씀하셨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무리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질문을 하여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려 했으며(마22:15~40), 메시야에 대해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고 질문도 하셨습니다(눅20: 41~44). 그리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셨고(막12:38~40), 과부의 연보에 대하여 칭찬하셨습니다(막12:41~44, 눅21:1~4).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고, 예수님은 이 날 예루살렘의 멸망과 말세에 대해 예언하셨습니다(눅21:5~38, 요12:37~50). 

셋째날인 수요일에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성경 기록은 없습니다만, 아마 매일 베다니로 가셔서 기도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넷째 날인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 고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마26:31~35, 막14:12~26, 눅22:31~38). 

그리고 목요일 밤, 시각이 금요일로 접어들었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거기서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셨으며, 군병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마26:36~47, 막14:32~52). 안나스와 가야바의 밤중 심문(막14:53~72, 요18:13~27)에 이어서, 빌라도의 재판(마27:2~11,31, 요18:13~29)을 받으셨고, 곧바로 사형이 언도된 후 엄청난 고난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마27:32~56, 눅23:26~45). 그날 어두워지기 전, 아리마대 요셉이 니고데모로 더불어 예수님을 장사했습니다(마27:57~61, 막15:43~47). 그리고 토요일에는 로마 총독부의 명령으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켰는데요(마27:62~66). 토요일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의 고요함은 폭풍 전야의 일시적인 정적에 불과했습니다. 토요일 밤이 지나자마자, 바로 주일 새벽에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온 세상과 인류의 전 역사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의 이야기는 다음 주일로 넘어갑니다. 

이상과 같이, 오늘로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은 엄청난 사건들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고난주간이면 성도들은 각 요일마다 그 날에 있었던 사건들을 묵상하면서 엄숙한 한 주간을 보내어 왔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고난주간을 아주 특별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예로부터 많은 성도들이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해 왔습니다. 특별새벽기도를 하거나, 하루 혹은 한 주간 금식을 해왔으며, 외국 어느 나라에서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실제로 거기에 못 박혀 매달리기도 하고, 자기의 몸을 채찍으로 때려서 피를 흘리는 사람들도 있고, 십자가를 지고 거리 행진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과 온 세상을 위한 주님의 고난의 여정을 그렇게 직접 경험함으로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형태로든 주님의 고난을 의미 없이 보내지 마시고, 그 고난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도록 의미 있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종려주일의 두 번째 의미는 이 날이 인간의 교활함과 본성적인 악함을 드러내 보여준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하던 사람들이 불과 몇 날이 못 되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변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쉬 변하는가’, 그리고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죠. 또 하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지는 않습니다만, 인간의 이중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오늘의 설교는 바로 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 그 때에 예수님은 

유월절을 하루 앞둔 그 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로부터 파견된 사병들과 성전 청원 경찰 그리고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체포되신 후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곧바로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로 끌려갔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전직 대제사장이자, 현 대제사장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가 일차 심문을 받으신 사실(요 18:12, 13)을 생략하고, 불법적인 야간 심문을 위해 가야바의 처소에 모인 산헤드린 공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당시 가야바와 같은 건물 내에 머물고 있었던 안나스에게 먼저 심문을 받으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에게 두 가지를 심문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누구인가?’하는 것이었는데요. 이것은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의 세력과 성향을 알기 위한 심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변을 생각하여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째 심문은 ‘어떤 교훈을 퍼뜨렸는가?’였는데요. 이것은 옳지 못한 가르침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현혹시키지는 않았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는 당당히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18:20~21).” 이렇게 안나스에 의하여 진행된 심문 과정에서 예수님은 어떤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에 곁에서 보고 있던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손으로 예수님을 치기도 했지요. 

그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그를 중심으로 모인 산헤드린 공회에 의해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가 세운 거짓 증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들의 고소 내용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두 번째 거짓 증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그들로서는 이것으로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인’으로 몰아붙이려고 했으나 예수님으로서는 이것이 진실이었기에 “내가 말하였느니라.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찢으며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라고 하면서 흥분해서 날뛰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고, 주먹 혹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현장에 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거기 있던 다른 무리들과 대제사장의 하속들은 몽둥이로 예수님을 심하게 구타했습니다. 정말 개 패듯이, 잔인하고 처참하게 예수님을 구타한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때린 후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이렇게 진행된 예수님의 재판은 유대의 율법과 로마법으로 볼 때 너무나 불법적인 것이었습니다. 

불법적인 첫 번째 이유는 유대나 로마법은 해뜨기 전에 이뤄진 재판, 즉 야간에는 재판이 있을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것을 어겼습니다. 두 번째는 증인과 변호인에 대해 확실하게 규정을 정해놓고서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하려한 그들의 전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는 변호인도 없었고, 증인들도 없었습니다. 대신 거짓 증인들만 동원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첫 번째로 심문했던 안나스의 경우, 증인도 없이 심리를 했습니다. 이것은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반드시 세울 것을 명한 주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역한 행동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들의 법에 따른 재판 절차는 최소한 이틀이 걸리기 때문에, 명절을 끼고서는 재판이 열리지 않았고, 또 예수님처럼 그렇게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한 채 하룻밤 만에 모든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재판이 산헤드린 의회의 공식적 회집 장소에서가 아닌 가야바의 거처에서 실시되었다는 점에서 이 재판이 불법이요 무효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이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당시 관례로 대제사장은 범죄자를 직접적으로 심문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재판 과정은 그와 반대로 대제사장이 직접 적극적으로 심문하였다는 점입니다. 이 재판이 불법적인 마지막 이유는 이미 사형 언도를 내려놓은 후 모든 재판을 거기에 ‘짜 맞추기 식으로’ 진행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율법도, 로마인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발달한 로마법도, 최소한의 양심이나 진리도 사라져 버린 말도 안 되는 재판을 예수님은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왜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그렇게 열광적으로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또 이 사람들까지 그렇다 쳐도 12명이나 되는 제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어떤 네티즌이 인터넷 지식검색창에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실 때 “그 추종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을 올렸습니다. 그가 질문을 올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예수가 행한) 이 정도의 기적을 베풀었다면 죽기를 각오한 수많은 추종자들이 생겼을 것이다. 특히 예수의 제자들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재판 시 왜 그를 위해 변론해 주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을까? 그 많은 추종자들은 땅 속으로 꺼졌나? 증발해 버렸나? 추종자들이야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절한다고 하더라도 그 잘난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수많은 화려한 기적 쇼(show)의 효과는 온 데 간 데 없고, 재판 시 예수는 홀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질문을 올린 사람은 “안티 기독교”의 한 멤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질문은 저와 여러분들도 한 번 쯤은 해 봄직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불법적이고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었을 때,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지난 3년 동안 그림자처럼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3.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엄청난 수치와 조롱과 더불어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상황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될 당시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고난의 자리에 계실 때 제자들은 각자 살기 위하여 도망을 가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 약 2명의 제자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은 됩니다. 첫째는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자리에 없는 것이 더 나을 뻔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바로 그가 보는 앞에 예수님께서 묶여 있는 가운데, 자신이 하는 말을 예수님이 다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자리에서 말이죠. 심지어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서 까지 맹세하여 모른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에 대해 욕설이나 저주를 퍼부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또 다른 한 제자인 요한! 그도 분명히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침묵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예수님에 대해 변호할 수 있었지만, 비겁하게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제사장 집의 종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면서도 침묵한 것이죠. 그리고 그 외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은 성경 어디에도 언급이 없을 만큼 철저하게 숨었습니다. “꼭 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말이죠.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은 없었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과 그의 수하들, 그리고 힘 있는 자들과 다수에 따라 이리 저리 움직이는 어리석은 대중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고난의 순간, 수난의 자리는 처절하도록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양심도 상식도 이미 사라져버린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자리, 어느 누구라도 이 사실과 예수님의 무죄를 변호해 주기를 기대했던 그 자리,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 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큰 소리치던 제자들은 비겁하게 숨어서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거기까지 갔던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그를 배신했습니다. 예수님께는 원수의 채찍보다 그들의 배신이 더 아팠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자들이라면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니 시간을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기보다는 이번 한 주간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작정입니까?

4.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설교를 마치면서, 처음에 드렸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것은 종려주일인 오늘이 가지는 두 가지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주님의 고난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고난을 그냥 의미 없이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종려주일은 사람의 이중성, 나아가 배신과 악함이 드러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의 결론이 나옵니다. 즉 고난주간을 맞아 여러분이 ‘무엇을 하면서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는 태도에 따라 여러분들이 제자들처럼 배신자의 자리에 있을지, 아니면 주님의 고난의 여정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는 사람이 될 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그냥 다른 때의 한 주간처럼 보내지는 맙시다. 누가 압니까?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에 동참하려고 하는 가운데 여러분에게 고난의 흔적이 생길는지요? 바울 사도가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고 말한 대로 이번 고난 주간 고난 체험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고난의 흔적이 생기면 그것만큼 자랑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이든, 일체의 전자 전파 인터넷을 금하는 미디어 금식이나, 하루에 한 명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 등을 하심으로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생기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여러분이 고난을 경험하느니 어쩌느니 한다고 해서 주님께 무슨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 고난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께는 아무런 보탬이 안될지라도 그 자신은 놀랍고 특별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처럼 배신자의 자리에 있지 않고, 고난을 경험함으로서 주님이 주시는 또 다른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고!’ 아닙니까? 주님과 가까이에 있어서 좋고, 그럼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유익을 얻어서 좋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찌 하든지 내일부터 시작되는 올해의 고난 주간이 여러분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으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서 좋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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