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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눅 23:33-38) - 가상칠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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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눅 23:33-38): 가상 제1언 

복음의 핵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기념하라고 명하셨던 유일한 행사인 성만찬은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를 극화한 예식입니다. 예수님은 생애의 어떤 활동보다도 당신의 죽음이 기념되기 원하셨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사역의 중심에도 언제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을 표시하는 기념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합니다. 반짝이는 금빛 은빛 목걸이와 귀걸이들, 보석으로 수놓은 십자가 모양의 핸드폰 고리들은 인기가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십자가의 본래적 의미까지도 알고서 좋아했으면 좋겠습니다. 본래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잔혹한 사형대였습니다. 그 끔찍함과 혐오성 때문에 로마 원로원이었던 키케로는 ‘십자가’라는 단어는 로마 시민에게서 그들의 생각과 눈과 귀에서 그리고 상상에서조차 멀리 사라져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피비린내 나던 그 사형대가 오늘날에 와서 액세서리가 된 것은 십자가에 담긴 의미 때문이겠지요.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려는 첫 단계로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셨던 일곱 차례의 말씀부터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흔히 ‘가상칠언’(架上七言) 이라 말하는 일곱 말씀을 순서대로 요약해서 용(容, 눅 23:34) 낙(樂, 눅 23:43) 자(子, 요 19:26) 기(棄, 마 27:46, 막 15:34) 갈(渴, 요 19:28) 성(成, 요 19:30) 혼(魂, 눅 23:46)이라 부릅니다. 그 첫 번째 말씀은 대제사장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드린 중보기도(도고)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로써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b)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공생애를 기도와 함께 시작하셨던 주님께서 공생애의 마지막도 기도로 마감하고 계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병자들에게 내밀던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은 이제 십자가에 못 박혀 버렸습니다. 소외된 지역을 찾아가셨던 그 분의 발도 십자가에 단단히 고정되었습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노라고 장담했던 제자들은 모두 달아나버렸습니다. 더 이상 가르침을 전수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에”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역사는 주님께서 이 때 드린 용서의 기도가 그분의 생애에 행하셨던 어떤 기적이나 가르침보다도 더 많이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 쪼개며 변화시켜왔음을 증언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떤 상황 앞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능력도 없는 내가, 나이도 많은 내가, 건강도 좋지 않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순간에도 우리가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체험적으로 고백했던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길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때입니다. 참으로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바랄 수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날 수 있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배웁니다. 십자가는 그 어떤 활동보다도 더 많은 것이 기도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 내용은 지금까지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마 9:6). 온전한 사람이심과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이셨던 그분은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성부께 간구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 병자에게도 즉석에서 직접 죄가 용서 받았음을 선언하셨습니다(마 9:2). 하지만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태도를 바꾸셨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을 죄의 형벌을 대신해서 받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과 같은 입장에서 기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각양의 죄들에 앞서 “저희” 곧 죄인인 그 사람 자체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도고하셨던 ‘저희’는 참으로 사악한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는 감히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저희의 그 입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손으로 그분을 때리며 옷을 벗기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들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고 계시는 중보자를 멸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주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8).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를 드리신 것은 그들이 이제야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서 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전히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주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2:8). 우리의 믿음 이전에 우리의 무지에 대한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먼저 있었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와 알지 못하고 짓는 죄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하다고 해서 무죄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해서 용서받을 필요가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이 기도를 하시는 순간에도 저희 군병들은 옷을 나누어 제비뽑고 있었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었습니다. 저희는 무지는 무관심과 관련이 있었고 그것은 곧 심각한 죄로 연결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하며 비웃었습니다(35). 군병들도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37)고 희롱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계심을 저희는 전혀 몰랐습니다.

한 사람씩 인터뷰해볼까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사실 군병들은 죄수 하나를 조롱하며 가지고 논 일이 그렇게 죄가 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했을 뿐입니다.’ 군중들도 십자가의 의미에 무관심한 채 방관하고 있었던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될 줄 몰랐습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정치적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입니다. 한 사람정도 희생해서 민란을 막을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장본인 빌라도 역시 실리를 좇아 양심의 소리를 누르고 타협했던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될 줄 몰랐습니다.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예수라는 인물로 말미암아 실추되고 있는 종교적 위신과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판결한 후에 정치적 범죄자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악들이 들어나자 그들은 백성들이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실망하여 신앙 자체를 회의한다면 유익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겠지요. 예수님을 처단할 수밖에 없는 100가지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내면적 동기는 ‘시기’였습니다(막 15:10). 시기가 그토록 큰 죄가 될 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제가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스승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었던 유다 역시 돈에 대한 탐욕이 그렇게 큰 죄가 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단지 은 30냥을 받고 마음에 들지 않는 스승을 배반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인터뷰해봅시다.  ‘예수님 믿지 않는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줄 몰랐습니다.’ 아마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도 이처럼 변명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단지 기독교의 배타적인 구원교리가 기분이 나빴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에 자존심 상했을 뿐이에요.’ 하지만 몰랐다고 말하기 전에 진리에 무관심했던 게으름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믿을 시간이나 있었나요?’라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돈에 더 관심이 있었고, 예수님보다 예수님의 옷이 주는 유익에 더 관심이 있고, 잠간 양심의 소리를 누를 때 얻어지는 실리에 더 관심이 있고, 기득권을 유지하고 위신과 체면을 지키고 싶은 데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가능하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는지요.

G그룹에서 A라는 사원을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했습니다. 월급을 비롯하여 그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때마다 적절하게 공급했습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조사해보니 그는 전혀 G그룹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G그룹과 적대 관계에 있는 S그룹에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세상에 두시면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각종 재능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았으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사탄의 뜻대로 놀아났습니다. 우리는 A사원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입과 손과 발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주신 재능으로 그분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무지하지만 심각한 죄이지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한 죄,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접하지 못한 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성경은 “저를 …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고 있음이 심판 받은 증거입니다.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이제는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그분을 알고 합당하게 그 분을 대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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