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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으려면 (히 12:15~17, 딤후 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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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으려면 (히 12:15~17, 딤후 4:9~18)

어느 목사님이 26층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은 높은 층을 좋아해서 26층에 사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혜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층 아파트의 혜택 중에 가장 좋은 혜택은 좋은 전망과 시원한 바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집은 한 여름에도 창문을 열어놓지 못했답니다. 그 이유는 사모님 때문입니다. 그 사모님은 모든 창문을 다 닫고 걸어야만 주무십니다. 왜 그렇게 하냐면 도둑이 든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아니 26층에 어떻게 창문으로 도둑이 들어옵니까?”라고 하면 사모님은 “옥상에서 로프타고 들어온다.”고 닫으라고 한답니다. 

그 사모님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사모님에게 있었던 아픈 기억들 때문입니다. 사모님은 결혼하기 전까지 도둑을 세 번이나 맞았다고 합니다. 특히 고 3때는 여름에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데 책상 앞에 열어놓은 창문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을 직접 보고 놀란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26층 아파트에서도 창문을 열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병적인 반응을 보이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 남편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목사님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도둑을 맞은 적이 없답니다. 목사님의 가정은 항상 대식구였습니다. 식구가 많을 때는 16명이 한 집에서 살았답니다. 도둑이 들어오다가도 많은 신발을 보면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 덕분엔지 목사님은 한 번도 도둑맞은 일도 없고 단독주택에 살았는데도 창문을 다 열어놓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동안 상처받았다. 마음의 상처가 있다하는 말들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처라는 말을 쓰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픔이라고 쓰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분명 육체의 상처가 있듯이 마음의 상처도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아픔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되면 다행인데 쉽게 치유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상처를 안 받는 것이 성숙한 성도의 최상 책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다 완전치 못하기에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치유방법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 마음에 혹시 남들이 이해 못하는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아무도 해결해 주지 않는 아픔이 있습니까? 그 아픔 때문에 힘들고 어렵습니까? 
오늘 설교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가 주의 이름으로 처리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상처를 치유 받으려면 몇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1. 사람은 누구든지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많은 상처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는 상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엄청난 상처가 있습니다. 남편이 애굽에서 자기 살자고 아내를 동생이라 했습니다. 아마도 사라는 일평생 그 아픈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교묘한 작전으로 장자 권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면서 축복을 도적질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상처가 20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아픔이 따라 다녔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야곱의 부인 레아의 시력이 좋지 못하고 못 생긴 얼굴 때문에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픔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많이 낳는 것으로 보상하려는 상처, 그 동생 라헬도 남편의 사랑은 받으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열등의식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던 작던 상처를 갖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상처를 평생 갖고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 해결을 받고 치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고후11:23 이하를 보면 그는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서른아홉 번씩 다섯 차례 매를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번 돌로 맞았고, 세 번 파선했습니다. 온갖 위험을 다 겪었고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4:10에 보면 바울은 사역을 하다가 동역 자들의 배신을 당하는 상처를 받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말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자기를 떠나는 배신을 겪을 때 바울은 엄청난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위대한 사도 바울도 상처를 받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상처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자신은 마음의 상처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고 한다면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상처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처는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은 형들이었습니다. 
야곱에게 가장 상처를 준 사람은 형 에서와 외삼촌 라반이었습니다. 바울은 늘 함께 하던 동역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받는 상처도 대부분의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것이 가장 클 것입니다. 
가족에게 받는 상처, 부모, 남편, 형제, 가까운 그들이 상처를 줄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잘 아는 사람, 믿었던 사람,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허물없이 대하다보니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상대를 통해서 사랑을 받기를 원하지만 원하는 만큼 사랑을 받지도 못하여 상처를 받습니다. 또는 기대하는 것과 달리 상대는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나를 사랑해 주지 못하기에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어느 기관에서 자녀들이 상처를 누구를 통하여 받는가. 조사했습니다. 결과를 보니 아버지에게서 40.7%, 어머니에게서 32.1% 라고 합니다. 상처 받는 내용은 ‘함부로 하는 말’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은근히 무시하는 말을 할 때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자존심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내 말 한마디가 칼보다 무섭고 총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마음의 상처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을 보세요.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여기 보면 상처로 인하여 생긴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상처는 무서운 고통을 동반하는데 몇 가지만 살펴봅니다. 

1)상처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2)마음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3)마음이 더럽게 됩니다. 증오와 분노, 복수와 원한으로 가득합니다. 
4)세속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16절에 보면 ‘망령’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속된 더러운, 세속적인’이라는 뜻입니다. 
5)영적인 것을 소홀히 합니다. 
6)에서처럼 진정한 축복을 놓치게 됩니다. 
7)하나님께 버림받아 회개할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처리되지 못한 상처는 나 자신에게 더 큰 아픔과 또 다른 상처를 가져다줍니다. 
한국에서 치유사역으로 가장 알려진 분이 정태기 목사님입니다. 

정 목사님이 젊을 때 두 가지 별명이 있었답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재봉틀’이었습니다. 너무 자신감이 없어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말도 못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이분이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하시다가 37세 되던 해에 치유그룹에 들어가 자신의 상처에 대한 원인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상처를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보다 세 살 더 많은 친어머니가 계셨지만 제법 돈이 있었던 아버지는 열여섯 살이나 어린 젊은 여자를 작은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래서 본 부인에게서 4남매를 낳고, 작은 부인에게서 5남매를 낳았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다정할 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자식들에게 폭군으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래서 정 목사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캄캄할 때까지 집밖에서 빙빙 돌았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까 일에만 파묻혀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두운 가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나다 보니까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성격이 삐뚤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상처의 분출구는 자기가 기르던 소와 자기 집 식모의 아들이었답니다.  우리 속담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분풀이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처로 인한 아픔이 해결되지 않으면 애꿎은 사람들이 상처의 희생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야곱도 엄청난 상처를 통해 엄청난 고통을 겪습니다. 부모를 속인 사건으로 평생 속임을 당하며 삽니다. 삼촌에게 속습니다. 자식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요셉이 17살에게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릴 때 형들은 아버지를 감쪽같이 22년을 속입니다. 사기꾼의 상처가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도 남들이 모르는 상처로 인한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고통을 그대로 방치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3. 모든 상처는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소식은 어떤 상처도 치유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처와 상처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면 치유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해주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치유를 받기 보다는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가정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가정을 멀리합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멀리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치유가 안 됩니다. 가정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가정을 깨버리고,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교회를 옮기면 되겠습니까? 안보면 될 것 같지만 안 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상처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하시는데 우리가 그 훈련을 피한다고 훈련이 끝나겠습니까? 만약 우리에게 다가오는 훈련을 피해서 도망간다면 하나님은 그보다 강력한 훈련 프로그램을 적용하실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도시에서 목회를 하다가 늘 힘들게 하는 한 성도를 두들겨 패고 시골교회로 옮겼답니다. 그랬더니 그 시골에는 더 센 성도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상대를 두들겨 패려고 했는데 상대가 태권도 5단이어서 두둘겨 팰수 없었답니다. 결국 또 다른 사역지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치유 받아야지 막나가거나 회피해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치유에 사람은 해결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아픈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시고 더 나아가 그 상처 때문에 더 큰 인물이 되도록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능숙한 치유자이십니다. 우리들의 상처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앞에 나와서 치유를 받으면 우리는 이전 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치료자이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누가 나의 상처를 치료합니까? 출애굽기 15:26 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했고, 말라기 4:2를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4:23을 보면 주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을 만나도 치유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남으로 치유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좋은 배우자, 좋은 친구, 좋은 상담자, 좋은 목사를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치유하기를 원하시고 내가 주님을 찾기를 기다리십니다. 

시편기자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시편121편에서“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설픈 의사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돌팔이 의사와 같습니다. 

어느 병원 환자가 수술실에서 도망을 나왔습니다. 온 병원에 비상벨이 울리고 직원들이 동원된 뒤 마침내 수위실에서 환자가 붙잡혔습니다. 
수위 아저씨가 환자를 붙들고 물었습니다. “무슨 수술인데 그렇게 겁을 내요?”, “맹장 수술이요”, “그까짓 맹장 수술 가지고 그렇게 겁을 내면 어떡해요”, 
그러자 환자 하는 말 
“수술실에서도 간호사가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간호사가 나한테 한 얘기가 아니라 수술하는 풋내기 의사한테 했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도망 나온 거란 말이오.” 라고 하더랍니다.  
사람은 그 풋내기 의사처럼 어설픈 치료자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해주실 분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를 잃고 상처를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나무라지 않으시고 사랑과 긍휼로 치유하셨습니다. 
수가성의 여인을 사람 상대하시며 치유하셨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말씀과 인격적 예우로 치유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만이 참된 치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나가면 자유와 쉼을 주시고 용서를 통해 참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상처를 주님에게 넘겨드릴 줄 아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딤후 4장에 보면 자기를 괴롭히고 상처를 주었던 알렉산더에 대해 “주께서 갚으시리라”고 말하며 주님께 문제의 처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는 17절을 보면 ‘주님이 자기 곁에서 자신을 강건케 하셨다’고 말합니다. 또 18절에 보면 주님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신다고 말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사람 붙잡고 하소연 하지 마십시오. 혹 치유 된 것 같은데 그것은 잠시 진통제 맞는 것과 같고 근본적인 치유가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셔서 속상한 것, 억울한 것, 아프고 괴로운 것 다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치유를 기다리십시오. 주의 치유의 역사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2)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러기에 내가 먼저 치유를 받아야 남을 치유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치유되지 못하고 어찌 남을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복수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복수는 내 문제를 해결하는 비책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해결책일까요? 용서입니다. 
용서는 능력입니다. 용서는 치유에 가장 기본입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 속에 있는 복수심이 자신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될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방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내가 나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것은 나를 상처 준 사람을 통해서 내게 들어오는 저주를 끊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정죄가 문제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세요. 수가성의 여인에게 한마디도 책망치 않습니다. 간음 중에 잡혀온 여인에게도 책망과 심판을 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그 엄청난 죄를 범함에도 하나님은 그에게 당연히 무서운 심판과 책망을 하셔야 함에도 그가 말 한마디로 회개할 때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주님용서의 클라이맥스는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입니다. 
3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베드로를 한마디도 책망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이 용서요. 그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입니다. 그 치유가 여러분에게도 이 시간 임하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고통을 준 사람, 여러분에게 정말 감당키 힘든 아픔을 준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세요. 그리고 그 아픔이 주님의 손으로 치유되었음을 선포하세요.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 상처를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든지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종살이에 옥살이라는 말로다 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를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치유사역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치유사역자와 마음의 상처 치유자입니다. 
그런데 유명한 치유 사역자들을 보면 자신들이 큰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주님의 은혜 속에서 치유 받고 그 은혜로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치유사역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내 과거가 상처로 얼룩져 있을 때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립니다. 그래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더 크게 들어 쓰십니다. 

어린아이들이 한번 아프고 나면 성숙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한번 받은 상처가 나를 힘들고 고통스럽게만 하는 상처로 영원히 남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처로 인해 더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이전에 보지 못한 은혜를 맛보게 합니다. 그래서 상처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상처를 상처로 안 받아 들이고 그 아픔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최상입니다. 
그러나 혹시 상처를 받았거든 그 상처를 상처라고 떠벌리고 자랑하지 말고 속히  그 상처를 치유 받아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치유의 역사가 오늘 말씀을 들은 모든 분들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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