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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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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38-4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에 십자가 앞에 모여 예배하는 여기에 성령께서 임재 하시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여러분 개인 개인에게 꼭 필요한 은혜를 말씀을 통하여 채워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미 여러 번 들어서 많이 알고 있는 우화 중에 두려움 많은 겁 많은 생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겁 많은 생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 생쥐는 저 멀리서 걸어가며 울고 있는 고양이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겁쟁이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도저히 살수가 없습니다. 잠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찾아가서 하나님 저를 제발 고양이로 만들어 주세요. 라고 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그 생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고양이가 된 생쥐는 아주 활기 있게 사방을 뛰어다닐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보니 고양이가 된 생쥐가 역시 겁에 질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고양이가 되었는데, 뭐가 그리 겁이나?’ ‘예, 하나님 개가 겁이 나서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개가 어느 한 마리의 쥐를 잡아먹는 모습을 본 이 고양이가 된 생쥐는 개가 겁이 나서 자기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시 개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개가 되어서 사방을 멍멍 짖으며 재밌게 뛰어 다닐 줄 알았던 그 개가 여전히 자기 집에서 꼼짝을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묻습니다. ‘이제 개가 되었는데 무엇이 그렇게 겁이 나서 재밌게 다니지 못하느냐’ ‘하나님 호랑이가 겁이 나서 꼼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하기를 ‘얘야, 내가 아무리 애써도 네 마음이 생쥐라면 아무 소용도 없겠구나, 뭐 벌벌 떨 바에야 다시 생쥐로 돌아 가는게 낫겠다.’ 그래 다시 생쥐가 되었더랍니다. 

여러분, 사람도 마음에 변화가 없으면 외적 조건이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매 한가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책임을 환경에 돌리려고 합니다. 물론 환경의 영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과 나, 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내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환경이 나를 완전히 삼키는 것입니까. 무엇이 진정 사람의 모습입니까. 환경이 아무리 달라져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환경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끝없는 욕망, 우리는 그 욕망이 채워지면 될 것이라고 전제 합니다. 그래서 집 없는 사람은 집이 있었으면 하고, 병든 사람은 건강했으면 하고, 직업 없는 사람은 직업만 있으면 아무 소원도 없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만, 그런 것이 다 채워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은 점점 더 커집니다. 채울 수 없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 욕망의 문제를 완전히 제어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물질로도 명예로도 그는 절대로 평안하거나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의 문제,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변화, 이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밖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큰 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신앙적으로 기적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적마저도 내 수준에서, 내 판단에다 딱 맞추어서 그 기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이것을 전문용어로 ‘Tunnel View’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터널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터널을 뚫는 기술이 굉장히 발달하여서 세계에서 1,2위라고 합니다. 아무리 큰 산도 양쪽에서 뚫기 시작하면 그 속에서 기차게 딱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고속도로를 내거나 하면 터널을 굉장히 많이 뚫고 굉장히 긴 터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터널을 바라다보는 눈, 그런 뜻입니다. tunnel view. 밖이 아무리 맑고 아름다워도 터널을 들여다보면 긴 굴 저 끝에 구멍이 조그마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내 앞에 있는 세계를 이렇게 ‘tunnel view’로, 꼭 굴을 들여다보듯이 보고 거기에다 맞추려고 합니다. 여기에 맞지 않는 것은 뭐든지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바로 이런 내 방식, 내 방법대로, 내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사람의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기적은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기적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다 못 박아 놓고, 자기들이 못 박아놓고 하는 말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 믿을 것 같습니까?

오늘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는 ‘뛰어내려!’ 뛰어내리면 믿겠노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셨지요.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지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셨지요. 5천명을 먹이셨지요. 예수님의 생애는 온 통 이적과 기사로 충만합니다만 이것을 바라보았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힌 것이 뭡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표적, 지금 보인 것 말고, 다른 뭐 좀 화끈한 것, 천지개벽 같은 좀 기가 찬 그런 기적을 보이라고 재촉합니다. 이렇게 보면 기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결국 기적에 대한 ‘Reading Comprehension’ 기적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적을 읽는 능력 다르게 말하면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바라보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건강한 것만,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병이 드는 것도 기적일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어느 날 병이 나, 병원에 가게 되어 병을 발견하고 수술하여 회복하게 되는 것, 병이 든 것 그것이 기적일 수 도 있습니다. 하루를 산 것도 기적이요. 여기와 예배 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기적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그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 역시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오늘 성경에 나와 있는 어리석은 이 사람들처럼 또 다른 기적을 보기 원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었습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도다. 이것은 죽었다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한 알이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무엇을 생각하셨겠습니까? 내가 죽어야 열매를 맺느니라.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죽지 말고 살아라.’ 그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는 것만이 기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바라보면 죽는 것이 더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습니다만, 책에서 본 얘기입니다. 이집트의 3천년이나 된 미라에서 몇 알의 밀알이 나왔습니다. 바싹 마른 밀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기하여서 그것을 땅 속에 묻고 물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싹이 나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책에 있는 내용입니다. 밀알이 죽은 사람의 손에 들려 있을 때, 3천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았지만, 그것이 땅에 들어가 죽어서 썩으니까, 싹도 나고 열매도 맺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요사이 새 정부가 새로움을 원하고 새로운 변화를 요구합니다. 옛것의 죽음, 옛 가치관의 매장, 완전히 죽고 사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득바득 안 죽으려고 하니까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운 변화란 바로 죽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도 공천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새로운 변화는 바라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달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 아래 있는 사람들이나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이 ‘니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구원하고 나도 구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자체에 의미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유명한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가 모세 멘델스존인데 이 모세 멘델스존은 키가 작고 곱추였다고 합니다. 곱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 많은 상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가 그 집의 프롬체라고 하는 딸을 보자마자 그만 순간적으로 사랑에 빠집니다.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의 방에 조용히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 아가씨는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말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기를 내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부부관계를 맺어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고 말고요. 당신은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요?’ ‘저요, 저는 물론 믿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때 환상에서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예쁜 아가씨를 소개하면서, 이 여자와 네가 앞으로 살아야 되겠는데 그런데 세상에 태어날 때는 네가 한 평생 사랑해야 될 이 여자는 곱추로 태어날 것이다. 너는 곱추와 살아야 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올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곱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 그러시다면 내가 곱추가 되겠습니다. 내가 대신 곱추가 되겠습니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네가 곱추가 되라. 합디다. 그래서 내가 곱추가 된 것입니다.’ 프롬체는 다 듣고 나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마음에 가지고 있나요?’ 하고 감동하였고, 마침내 둘은 결혼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대신 곱추가 되겠습니다. 과연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감동을 시키고 이런 감동이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 십자가를 보십시오. 우리교회 십자가가 명물입니다. 이것이 색칠한 것이 아니고 동녹입니다.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이런 동녹이 쓸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갈수록 이 색이 빛을 바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십자가 앞에 있으면서도 ‘뭔가를 내게 보여주면 믿겠노라’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뭘 더 보여 달라는 말입니까? 더 이상 뭘 보여 달라는 것입니까! 십자가 외에, 십자가보다 더 큰 무엇을 바라고 기대한다는 것입니까. 내 앞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의 의미와 지혜와 능력을 읽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당장 내려오라고 아우성 쳤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고, 죽지 않으면 구원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죽지 아니하면 열매가 없고, 죽음이 없이는 새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이, 살아나는 것만이, 많은 것만이, 높은 것만이, 믿음의 길이라 고집하지 맙시다. 나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그 주님 앞에서 나도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모욕에도, 그 희롱과 고통에서도 묵묵히 사랑으로 대응하며 그들을 감동시키고 구원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하며 주님을 다시 아프게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맙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하며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면서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또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주시면 그러면 믿겠노라 하여,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고 아프게 하였던 우리의 잘못을 이제는 다시는 반복하지 맙시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기만 하여도 우리의 구원되심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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