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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벧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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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벧전 4:10)

김삿갓이 한 마을을 지나다가 초상집을 만나게 됩니다. 배운 것이 없는 집안인 터라 선비 김삿갓에게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벼슬은 무엇을 했습니까?” “벼슬이라니요? 우리 같이 무식한 집안에서 무슨 벼슬입니까?” “어떤 업적을 남겼습니까?” 그 질문에 가족들이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으니 옆에 있던 사람이 말을 거듭니다. “식욕 한번 끝내줬지요.”그러자 김삿갓이 붓을 들어서 비문에 ‘다죽다먹’이라고 씁니다.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하고 비싼 돈을 들여서 비문을 세웁니다. 훗날 다죽다먹이 뭔가? 꼼꼼히 생각하다 거꾸로 읽어보니까 먹다죽다. 인분 제조기, 똥만 만들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인생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단지 먹고 싸고 죽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신실하게 이루고 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사명과 상관없이 인생을 허비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본래 나를 향해서 가지고 계신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신자는 사역자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역자라고 하면 목회자만을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사역(事役)’이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말하는 것이고 ‘사역자’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하는 일군’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군인이라고 할 때 장군이나 장교들만 군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장군이나 장교들이 군인이듯 하사관이나 병사들도 군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군 즉 사역자라고 할 때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에 전념하는 목회자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역자인 것입니다. 

엡 2:10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목회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엡 2:8). 엡 2:10을 좀 더 설명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선한 일 즉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다 같이 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일군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나가십니다. 

하나님 일은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지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일하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입이요 손이요 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하고 싶은 일을 대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사람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는 “주님에게 다 맡겼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어두운 곳을 무척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엄마가 아이에게 뒷마당에 있는 빗자루를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엄마, 바깥은 지금 캄캄해서 너무 무서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려고 “얘야, 예수님이 항상 우리 곁에 계신데 뭐가 무섭니? 지금 밖에도 예수님이 계셔. 너를 지켜 주실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가 “엄마, 진짜 밖에 예수님이 계실까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그럼 예수님은 어디든지 계신단다. 네가 두려울 때 언제나 네 곁에서 너와 함께 계신단다.”라며 아이에게 확신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더니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 거기 계시면 빗자루 좀 갖다 주세요?” 철없는 우리는 가끔 신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는 일하지 않으면서 주님이 다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철없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일하지 않는 지체는 몸에 피해를 주고 심하면 몸을 죽이는 것입니다. 

위장이 일하지 않으면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지체도 죽이는 것입니다. 내 입이 피곤하다고 밥 먹는 사역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요? 위장이 소화 기능을 멈추고 허파가 숨쉬기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죽겠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죽어가고 교회가 약해지는 이유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속한 교회를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 전도의 사명을 가진 우리가 전도의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 구원의 문들이 닫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과 재능과 은사를 받고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들이 허약한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역하는 신앙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육체가 건강하려면 먹는 음식도 중요하고 먹은 만큼 운동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현대인들의 비만의 원인은 좋은 것을 많이 먹는데 먹은 만큼 운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비만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말씀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과거에 비하면 양질의 영적인 양식이 풍성합니다. 언제어디서든지 자신이 원한다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방송이나 인터넷을 틀기만하면 얼마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양식을 먹은 만큼 사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비만현상으로 영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끼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 동굴에 사는 물고기들은 눈이 모두 퇴화되어 있답니다. 어떤 사람이 두 눈을 같이 사용하다가는 두 눈이 다 나빠질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쪽 눈만 사용하다가 이쪽 눈이 나빠지면 다른 눈을 사용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죽 끈으로 한쪽 눈을 가리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흐른 다음 눈이 나빠졌습니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가죽 붕대를 감아 놓았던 눈을 떠 보았더니 눈을 쓸 수 없게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쓰지 않는 지체는 아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입니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보시는 섬김은 사람의 영혼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생명은 사라의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귀한 섬김은 그 사람을 성숙한 신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막 5장에 보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거라사의 귀신들린 한 사람을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짐승 같은 존재입니다. 옷은 벗었고 온몸에 상처와 상처로 인한 고름과 딱지 투성이입니다. 괴물처럼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위하여 풍랑을 뚫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그리고 거라사에서 그 한 사람을 치료하신 후에 다시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주님이 그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돼지 2천 마리를 희생시키셨습니다. 돼지 2천 마리 가격이면 집 한 채는 살 수 있는 돈입니다. 

둘째는 세상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제 차를 세차해 놓았다면 저는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제 아들이 세차를 한 이유는 차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제가 그 차의 주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관리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의 수고는 비록 그들이 하는 일이 교회의 일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를 섬기는 것은 싫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제 아내가 저에게 “나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당신 몸은 싫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해야 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와 관련된 일들은 전부다 저하고 상관이 있습니다. 아내의 취향, 아내의 옷차림, 아내가 만나는 사람들 무엇이 되었든 아내와 관련된 것은 저하고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저는 옆집 아주머니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옆집 아주머니는 저와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취향도 그 사람의 옷차림도 그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도 저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교회가 자신과 상관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교회는 자신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교회의 일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며 주님의 교회를 돌아보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살펴봅시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이 직접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신 것처럼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이 되신 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누군가의 권면을 통해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꼭 목회가 아니더라도 자기 주변에 있는 영적인 지도자나 기도하는 사람 혹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소원이나 열정을 통해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는 분입니다(빌 2:13). 성령이 임하시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노인들은 꿈을 구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는 꿈과 비전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일로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부담감을 주셔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봤는데 그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 같이 괴롭습니다.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이런 경우도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전도하지 않으면 마음의 부담감으로 눌리게 되고 심지어 부담감이 너무 커서 시름시름 앓기도 합니다. 

둘째, 나의 은사에 맡는 일이 있습니다. 
은사는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림을 잘 그리면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노래를 잘하면 찬양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셋째, 과거의 경험과 관련된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 전기를 자주 만져봤습니까? 그럼 교회에서 전기와 관련된 일을 맡아서 하면 됩니다. 내 과거의 경험을 발휘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일을 하시면 됩니다. 

넷째, 남보다 더 가진 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남다른 제주가 있으면 그 재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남보다 물질이 더 많다면 물질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남보다 시간이 많이 남습니까? 남보다 힘이 더 좋다면 힘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남이 갖지 못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다섯째, 상황에 따라 주어진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그 일에 능력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지만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그 일이 내 앞에 놓여있다면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은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도 경험도 부족하지만 내게 주어진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여섯째, 직분을 따라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교통경찰 중에 교통정리를 해야 할 능력도 기술도 부족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직분이 교통경찰이기 때문에 교통정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일을 하기에 은사나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하지만 직분이 주어졌다면 그 직분을 따라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사역자가 있습니다.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고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다른 일을 하지만, 같은 목표를 가진 같은 팀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함께 드러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잘 드러나시도록 높여 드려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능력과 서로 다른 과제를 주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나의 모든 지체는 그 일에 협력합니다. 눈은 보고 귀는 듣고 입은 말하거나 음식을 먹습니다. 눈과 귀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눈과 입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모습과 기능을 가지고 온몸을 섬기는 것입니다. 내 몸의 지체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협조하여 그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독특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존재하듯이 각자가 해야 할 독특한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독특함을 따라서 창조되었듯이 독특한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비교하면 교만해질 수 있고 열등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만 못한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면 상대를 비판하고 상대를 우습게 볼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을 만나면 기가죽고 자신을 비참한 존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늘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교만해졌다가 열등감에 빠졌다가 교만해졌다가 열등감에 빠졌다가를 되풀이 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여 하루에도 몇 번씩 교만해졌다가 열등감에 사로잡혔다가를 반복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역자인 것입니다. 

사역을 피하는 몇 가지 이유.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부탁하면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사역을 피할 수 있는 어떤 핑계도 하나님 앞에서는 안 통합니다. 출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계속해서 핑계를 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결국 출 4:24에 보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명을 받았으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합니다. 하나님은 배 밑창에 있는 요나를 찾아내시고 바다에 던져지게 하시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셔서 결국은 니느웨로 가게 만드셨습니다. 

첫째, 자기의 약점 때문에 사역을 거절합니다. 
성경은 약점 때문에 사역을 거부하고 핑계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인이었고, 레아는 예쁘지 않았고, 모세는 말더듬이였고, 기드온은 가난하였으며, 라합은 부도덕했으며, 다윗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온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엘리야는 자살을 생각했었고, 베드로는 즉흥적이고 성격이 불같았으며, 마르다는 늘 걱정이 많았고, 사마리아 여인은 여러 차례 결혼 생활에 실패했으며, 삭개오는 키가 아주 작은데다가 사회에서 따돌림 당했고, 도마는 의심이 많았으며, 바울은 건강의 문제가 있었고, 디모데는 마음이 연약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약점이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함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고후12:9-10). 

둘째, 함께 일하는 사람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사역을 거절합니다. 
눈이 팔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목구비 중에 하나를 너무나 싫어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성형수술을 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다른 지체가 일하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눈이 못났다고 코가 숨을 쉬지 않고, 그가 듣지 않고 입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지체가 내 맘에 쏙 든다면 좋겠지만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셋째, 바쁘기 때문에 사역을 거절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의 일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개인사정 때문에 사역을 거절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군인은 자기의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보초를 서던 사람이 근무지를 벗어나는 일은 어떤 이유로든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장실이 급해도 근무지를 이탈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옷에다 실례를 하는 일이 있어도 근무지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일에 개인사정은 안 통합니다. 

다섯째, 상처 때문에 사역을 거절합니다. 
상처를 받아서 직장생활을 못하는 사람, 상처 때문에 사람을 만나지 않는 사람, 상처 때문에 사역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불행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상처는 극복해야 합니다. 상처에 매여서 가정생활을 하면 가정생활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처가 되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털어버리고 자유하십시오. 그래야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역에 따라서 상급과 심판이 결정됩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자기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서 상급과 심판이 결정됩니다. 다섯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는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활용했기 때문에 주인이 돌아온 후에 칭찬을 받고 상을 받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이 돌아온 후에 책망과 심판을 받았습니다. 렘 48:10에 보면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의 번역이 더 우리 피부에 와 닿습니다. “야훼께서 시키신 일, 건성으로 하다가는 천벌을 받으리라”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가운데 하나님께 바친 것만 남는다는 내용의 시 [키탄잘리]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떤 구걸하는 거지가 황금마차를 타고 오는 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흥분합니다. 저 님이 나를 찾아오시면 내 운명이 이제 달라질거야. 그 님이 찾아와서 마차에서 내립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면서 “그대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당황했던 거지는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 님에게 전달합니다. 동전을 받아 들고 유유히 사라져 가지요.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동전 주머니를 보는 순간 한 닢 동전이 번쩍 번쩍 빛나는 황금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땅을 치고 통곡합니다. “내 소중한 님에게 내 모든 동전 보따리를 맡길 수 없었던가?”]

두드러지는 자리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으십시오. 

사람들에게는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두드러지는 자리에 앉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리를 종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리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사울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포기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자리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을 죽이기만 하면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을 텐데 다윗은 왕의 자리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하나님의 일에 더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입니다. 

다윗은 ‘중요함’과 ‘두드러짐’의 차이를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왕의 자리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요함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드러져 보이는 자리를 원합니다. 그러나 두드러져 보이는 자리가 중요한 자리는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귀나 눈이 없어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심장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보다 내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요즘 장관 내정자들의 청문회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비리에 연루된 사람들이 장관 자리에 앉기 위해서 청문회에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가를 생각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사실 그분들보다 더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대통령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셨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충성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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