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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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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1)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공생애가 끝나갈 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동북쪽으로 약 40킬로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 가신 이유는, 십자가 고난을 앞두신 시점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과 다가올 고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리고 마음에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보낸 날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하신 일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알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면서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지금 와서 새로운 내용을 가르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것은 비유하자면, 졸업 시험을 치게 한 것과 같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알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들은 대로 말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방금 언급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유대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들에 해당합니다. 더구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들이 미리 와서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출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5)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바로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선지 엘리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그의 생애 전부를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소개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로부터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받았으나 헤롯 안티파스의 미움을 사서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는 식지 않아서 언젠가 메시야가 오시기에 앞 서 그가 살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가리켜 세례 요한이라고 한 것은 당시 예수님의 평판이 매우 높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 숭배에 빠졌을 때 혼자서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을 상대로 싸웠던 열심이 특심했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기도하자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가 하면 또 그가 기도하였더니 비가 내렸습니다. 갈멜산 위에서 혼자서 바알의 선지자 450인과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중에 누가 참 신인가를 놓고 대결했습니다. 

그 날 바알의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부르짖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지만, 엘리야가 기도하였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웠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몰수히 기손 시내로 끌고가서 처형했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선지자는 죽음을 보지 않고 회리 바람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해서 메시야에 앞서 엘리야 선지자가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그만큼 컸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예레미야 선지자라고 했는데, 이는 예레미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를 살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당하던 때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법궤와 향단을 가져다가 느보산의 어느 동굴에 숨겨 두었는데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그가 와서 이것들을 내어 놓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백성들에게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생각한 것은 예수님을 그만큼 위대한 인물로 인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메시야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묵묵히 제자들이 전하는 유대인들의 평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을 보시고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실상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백성들의 평판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그 내용이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이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위대한 사명을 감당한 것이 분명하지만, 예수님과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들은 위대한 선지자로서 메시야의 선구자들인 것이 틀림없지만,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메시야는 단지 직임으로만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는 본질적으로 인생보다 뛰어난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이 같이 증언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찾아오신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여느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예수님께 물로 세례를 베푼 후에 증거하기를 “32)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1:)고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 자신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갖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2장 9절에 이르기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능력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무수한 병자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중에는 소경, 앉은뱅이, 벙어리, 귀머거리, 중풍병자, 혈루증환자, 문둥병자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병들을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의 한 말씀에 다 항복하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풍랑을 명하여 잔잔케 하시는가 하면, 물 위를 걸으시고, 떡 몇 개를 가지고 수천 명을 먹이는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들도 살리셨습니다. 방금 언급한 기적들은 제자들 뿐 아니라, 백성들도 다 보고 아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로만 여겼습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리지만 메시야로 믿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나 혹은 패역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예수님을 비방하고 욕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타종교인들도, 무신론자들도 예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칭송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윤리 교과서에 보면 예수님을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인류의 사대성인 중 한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류의 구세주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인물로 인정했던 유대인들의 입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평판이나 인정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원하셨다면 쉽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자주 행하시기만 하면 떡을 얻어먹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올 것입니다. 풍랑을 제어하시는 능력으로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유대나라의 임금이 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메시야 상이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열 두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제자들의 분명한 입장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쓰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을 받았을 때, 제자들은 아마도 당황하여 머뭇거렸을 것입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또렷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런 언급이 없지만,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지고 주님의 음성은 기쁨에 차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신 보람을 맛보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이 물음은 제자들에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가장 위대하고 중대한 질문입니다. 우리의 생애 중에서 받게 되는 질문 가운데 이처럼 중요한 질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생의 방향과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은 강물의 흐름을 바꾸는 분수령과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던 사람이 예수님에 대하여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180도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멸망 길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서 생명 길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이 질문은 우리의 가치관을 결정지으며, 삶의 목적을 새롭게 정립하게 해 줍니다. 

사도 바울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는 본래 유대교의 골수분자로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나사렛 예수는 이단의 괴수에 불과하였고,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타도해야 할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칠 때 그 사건의 증인을 자청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해서 예루살렘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해서 매질하고 감옥에 넘겼습니다. 드디어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는 권한을 위임 받아서 멀리 이방도시인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가 다메섹이 바라다 뵈는 한 곳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때는 정오쯤 되었는데, 갑자기 해보다 더 강렬한 빛이 그와 그의 일행을 둘러 비추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서 들으니 소리가 있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대답하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이단의 괴수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줄 알았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 나타나시다니, 사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던 것이 근원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나세렛 예수는 이단의 괴수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믿고 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사울은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마음의 눈을 뜨게 되어 생명의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식음을 전폐하고 주님을 핍박한 것을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때에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아나니아라는 성도가 와서 사울에게 안수하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즉시 일어나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며칠 머물러 있는 동안에 각 회당을 다니면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전했습니다. 그 날부터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기의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그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처럼, 바울처럼 우리 각 사람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대하여 솔직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아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답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예수님께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히지 않고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이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또는 사회생활을 하는데 무슨 도움을 받기 위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인이 될 수는 있어도 교회의 지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이 신앙고백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지적 능력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영성이 탁월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마음을 열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게 해 주셔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원 얻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온 지 오래되지 않은 신자들 가운데는 성경 지식이 부족하여서 자기의 믿음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스스로 자기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가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는 증거가 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예배에 참석하는데 힘쓰십시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어도 돌아서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더라도 너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콩나물을 키우는 것을 보면 재미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콩나물시루에 아침에 물 한 바가지 퍼서 부어주면 물이 밑으로 다 빠져나가고 콩나물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콩나물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설교를 듣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려도 설교 시간에 정신을 집중해서 들으면 됩니다. 설교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도 잘 듣기만 하면 그것이 영의 양식이 되어서 우리의 믿음을 자라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신앙고백의 토대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베드로를 비롯해서 사도들을 가리키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그들과 동일한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지체들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들은 아무리 역사가 오랠지라도 천년을 넘지 못합니다. 천년은 고사하고 오백년 가는 나라도 드뭅니다. 그러나 교회는 벌써 2천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교회는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더욱 더 왕성해져 왔습니다. 이로써 주님의 말씀과 같이 음부의 권세 곧 죽음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른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셔서 천국 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임명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열쇠를 가진 청지기가 곡간을 열어서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듯이, 초대교회 당시에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은 복음을 맡은 자들로서 영의 양식을 신자들에게 나누어줄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최초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특권은 사도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 교회 시대에 걸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권한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천국 열쇠를 가지고 여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않는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 곧 천국 열쇠를 가지고 천국의 문을 여는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땅에서 매고, 천국의 문을 닫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믿는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장 21절에 보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내용을 제자들이 주님께 대하여 바른 신앙을 고백한 이후부터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다 드러나 있는데,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했더라면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해 준들 무의미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한 연후에 그 사실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온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경의 다른 부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는 주님의 물음에 시몬 베드로와 같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진심으로 신앙을 고백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시다면 여러분은 시몬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이제 주님께서 주신 천국의 열쇠 곧 복음 전파의 특권을 선용하여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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