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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눅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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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눅 13:31~35)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인생의 교차로를 만납니다. 교차로에서는 어느 길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어느 한 길을 선택을 하고, 그 길로 발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인생의 교차로와 거기에 따른 중요한 결단을 해야 되는 또, 선택을 해야 되는 기로에 자주 섭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나는 어떤 배우자와 결혼할 것인가, 또 나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여 한평생을 살 것인가, 이것은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들이죠. 그러나 이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일생뿐만 아니라 영원을 좌우하는 영원한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선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영원한 운명의 귀로에 서서 자신의 가야할 길을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함께 살펴보는 본문을 보면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까 빨리 떠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동생 필립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와 눈이 맞아서 그를 자신이 아내로 빼앗았습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자,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로 세례 요한을 처형을 시켰던 인물입니다. 그가 이제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참 고마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영어 성경에 보면 "I MUST BE ON MY WAY" 이는 꼭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야한다는 말입니다. 왜 지금 자신 앞에 죽음이라는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단호한 의지를 보이시는 이유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 자기를 죽이려는 세력이 깔려있는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리는데 못이기는 척, 등 떠밀려서 안가도 되는데 왜 무모하리만큼 들어가야만 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왜 주님이 이 고난의 길을 죽음의 길을 가야만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받아야할 죄 때문입니다. 죄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심판 앞에 영원한 저주와 멸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매질을 당했습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지금 주님은 나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대해 영적으로 얼마나 무지한 지 모릅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모릅니다. 감동도 없어요. 왜 그렇게 사랑하는지 별로 관심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도 답답하신 것입니다.

여기 34절을 보면 주님의 심정이 어떤가를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에 품듯이, 얼마나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고 했느냐! 그러나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다.'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은 그 새끼가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닭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나운 매가 병아리를 채 가려고 하면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숨깁니다. 그리고 수탉은 털을 세우고 매와 일전을 불사합니다. 매처럼 날카로운 부리도 없고, 날카로운 발톱도 없지만, 매와 일전을 불사하는 것은 병아리를 지키려고 하는 본능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내가 몇 번이나 너희를 모으려고 했는데, 너희를 지키려고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너희를 사랑했는데,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거절을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호의를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진심을 거절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자식에게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거절당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거절당하는 것처럼 참담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은 자신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도성을 향해 가십니다. 

눅 19:41절에 보면 마침내 주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막상 멸망당할 예루살렘이지만 당신의 눈으로 보니까 가슴이 미어 터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신 것이 3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한 번, 그리고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있는데 그 때에 통곡하며 우신 것으로 증거 합니다. 그리고 여기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장면입니다.

여기 '우시다'라는 헬라어는 ‘클라이오(κλαιω, klaiw)'인데 ’소리를 내어서 울다‘,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죽음과 관련이 있을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우리가 압니다. 주님께서 그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저들을 보고 우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입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했죠. 이 땅에 오셔서도 재대로 된 방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구유에 나셨고, 어릴 때부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지내셔야 했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공생애를 감당하실 때 한번은 제자들에게 이런 탄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쏟으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언젠가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마 이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심리학자요, 신학자입니다. 오랫동안 노틀담 대학과 예일 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으며, 매년 무게 있는 책을 한 권씩 써 낼 정도로 부지런한 학자였습니다. 그는 1996년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10년을 캐나다에 있는 "데이 브레이크"라고 하는 정신 지체 장애인 수용 기관에서 봉사하면서 보냈습니다. 그가 끝까지 맡아서 돌보던 장애아는 아담이라는 스물 다섯 살 먹은 청년이었습니다.

아담은 육체적, 정신적 장애를 안고 있는 중증 장애인으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옷도 혼자 힘으로 입을 수 없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심한 장애를 안고 있던 터라 자기를 돌봐 주는 사람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심한 장애를 안고 있던 터라 자기를 돌봐 주는 사람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사실을 알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자기에게 그렇게 정성을 쏟는지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우웬 박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매일 아침 일어나면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이를 닦아주고, 면도도 해주고, 머리도 빗겨 주고, 옷도 입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는 제 맘대로 움직이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음식을 입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만도 두 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아담이라는 청년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아침, 저녁으로 수고하는 분이 세계적인 학자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줘도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분에 안 맞으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당신의 백성을 품으려해도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과가 어떤 것입니까? 35절 상반절을 보세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예수님의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30여 년이 지난 후, 66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가 마침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주민들과 순례자들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도 장군은 3일 만에 예루살렘 주위에 토성을 쌓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망을 가지 못하고 갇혔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무려 4년 동안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요세프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 당시 로마 군인의 잔인함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당시 성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아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 바닥에 패대기를 칩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도망간 유대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살던 장소를 찾지 못하도록 성전을 비롯한 전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로마 군인들 사이에 돌과 돌 사이에 보물이 숨겨있다는 소문이 돌아 성전의 돌 하나 하나를 철저하게 들어내서 70여 차례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미래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우시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암탉이 자기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고 품는 것과 같습니다. 병아리는 암탉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고, 날개 아래서 성장합니다. 암탉의 날개를 거절하고 벗어난 병아리는 생존조차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아침!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착실하게 출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우리의 고집입니다. 성경에서 문제삼은 고집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고의적인 고집'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인 고집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예 예배 가운데 자신의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요. 말씀이 안 들어옵니다.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거절하는 것입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고의적인 고집의 결과가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우리 집이 파괴되는 것도 큰 일이지만, 더 큰 일은 우리 인생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 인생은 황폐해 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것 하나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 영혼이 방황 때에도, 내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나를 여전히 품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피를 토하듯 외치잖습니까?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하신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나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그분 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정말 구제 불능인 사람들을 당신의 품으로 모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화의 길을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그분을 거절함으로 버려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인생이 그분을 거절함으로 황폐하여지지 않도록, 우리 모든 신경 세포 조직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버무려 지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35절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너희가 나를 거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중단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나를 환영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 너희는 나를 다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영광의 때를 미리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그는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빌2:6-11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상상력을 동원해 생각해 보십시오. 실로 엄청난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두에게 보여 주시는 비전(vision)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는 광경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 비전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보십시오. 'I must on my way!'!는 나는 가야할 길을 간다는 그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비전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절해서 버려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없도록,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절해서 황폐해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없도록," 이 일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영국의 웩 선교 단체 지하실 빈가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성령 앞에 기도하십시오. 답답한 마음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과 은혜를 하루하루 알 수 있도록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대로 머물지 마십시오. 그 십자가의 은혜에 우리가 붙들리기만 하면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우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은혜를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발견하고 우리 역시 내가 가야할 길을 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십자가의 감격, 십자가의 능력으로 뜨거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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