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내적성숙의 길(7) : 자기의지 (딤후 2:3-7)

  • 잡초 잡초
  • 466
  • 0

첨부 1


내적성숙의 길(7) : 자기의지 (딤후 2:3-7)

  기독교역사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성경의 교리, 혹은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입니다.  특히 종교개혁이후에 이 두 가지의 강조와 상반된 해석 때문에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라는 사상이 나왔고, 오늘날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교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는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인간은 마치꼭두각시와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켰고, 반대로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무한한 능력을 제한시키는 오해를 낳았습니다.  

이런 어려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성경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있고, 인간의 책임과 자유의지도 확실하게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철저히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부분이 있고, 인간이 할 몫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우리의 세계로 끌어내려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과거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충돌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모두 과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훤히 압니다.  과거를 다 알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었냐, 인간의 책임이었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현재와 장래를 내다보며 우리의 의지로 최선을 다할 때 또 과거가 되면 그때 가서 하나님의 주권을 알게 됩니다.  그때까지 오직 인간의 의지가 필요하고,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 속에 우리가 삽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최선을 수고와 노력을 통해 신앙과 삶에 귀한 열매와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성숙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정하고, 갈 길을 만들어 놓았다면 우리는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가 되면 성숙할 사람은 성숙하고, 안될 사람은 안되는 것으로 마치 운명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분명 내적성숙과 변화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요 주권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나의 의지로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고, 헌신하지 않을 때 결코 성숙은 이루어

지지 않습니다.  래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모든 내적성숙의 길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의지입니다.  자기의지가 성숙을 만듭니다.  자기수고가 변화를 이룹니다. 

자기열심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바로 자기의지가 내적성숙의 마지막 길입니다.

우리가 이런 내적성숙을 이루기 위해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의지를 세워야 할까요? 본문은그것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내적성숙을 위해 그가 노력하고 추구할 자기의지를 3가지의 비유로 강조합니다.

첫째는 ‘군사처럼’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바울의 생애 거의 마지막에 기록한 성경이기에 어쩌면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가장 분명한 목적은 한마디로 내적성숙입니다.  그래서 1절에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평생 자기의지로 내적성숙을 이루어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헌신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처럼 이제 그의 후계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도 동일하게 그것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자기의지를 강조합니다.  그 의지를 확실히 세우기 위해 3절과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말합니다.  군사로서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군사는 자기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군사는 오직 우리를 군사로 모집한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이처럼 굳세게 의지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군사처럼 자기의지를 세워 성숙한 삶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여기 군사처럼 살라는 것에서 우리는 2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훈련입니다.  군사, 군인, 병사하면 떠오르는 것이 훈련입니다.  훈련이 없는 군사는 없는 것입니다.  훈련이 없으면 군인이 아니라 그냥 보통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훈련을 위한 ‘고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군대의 과정은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훈련을 통해 군사는 다듬어져 갑니다.  신앙도 훈련입니다.  나를 훈련하는 연단을 통해 온전하게 됩니다.  주일성수를 훈련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보다 철저하게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훈련으로 이해하면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를 훈련으로 생각하면 빠질 수 없습니다.  순종을 훈련으로 생각하면 지휘관에게 순종하듯 그렇게 우리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모두 훈련을 통해 완성됩니다. 

군사처럼 살라는 것에서 생각하는 다른 하나는 ‘싸움’입니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전쟁이 있습니다.  전쟁은 가능하면 없어야 하지만 만약 생긴다면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는 순간 한쪽은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옛날 로마의 군사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군사로 자기를 알고 산다면 우리는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을 종종 싸움에 비교합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을 믿는 순간부터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세상과 죄와 싸우는 것이고,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은 영적 전쟁에서 어떠했습니까?  이기셨습니까, 아니면 패하셨습니까?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과, 그리고 나를 옭아매는 죄와 싸워서 승리하셨습니까, 아니면 무너졌습니까?  우리가 예수의 좋은 군사로 부름을 받았기에 반드시 주님과 함께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집요하게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약점을 공격합니다. 분명 신앙에도 강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약점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쪽으로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아킬레스건’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신체 중에 발뒤꿈치의 바로 위, 장딴지의 근육에 이어지는 부분을 가리킵니다.  조심 없이 뛰거나 하면 끊어지는 수가 있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발이 빨라 전쟁에서 승리했던 아킬레우스가 결국 약점인 아킬레스건에 맞아 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강점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늘 우리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립니다.  래서 우리를 낙심케 하고, 무력하게 만듭니다.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좋은 군사입니다.  군사처럼 살아야 합니다. 군사처럼 의지를 세워야 합니다.  이제 잘 훈련받고, 잘 싸워서 날마다 승리하고, 내적으로 성숙한 강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선수처럼’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의지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군사와 함께 경기하는 자를 강조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강한 의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선수처럼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마음과 자세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듭니다.  평생 운동장에서 경기하는 선수가 되어야 하고, 메달을 따는 훌륭한 선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수처럼 산다는 것에서 다시 2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법대로’ 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본문에서 법을 말하고, 디모데에게 이것을 강조합니다.  선수가 운동장에서 달음질할 때 법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뛰었다 해도 무효입니다. 100미터를 뛰는 선수들이 종종 약물복용으로 메달이 박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월드컵에서 종종 선수들의 발을 걸어 경고와퇴장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경기하는 자는 법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경고를 받고퇴장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선수로서 잘 하기 위해서는 법대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규율과 원칙을 따라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따라야 할 궁극적인 법칙은 말씀입니다.  경기하는 선수로서, 우리의 인생을 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언제나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저자의 고백처럼, 주의 말씀에 내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말씀이 표준입니다.  도덕이나 양심이나 상식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말씀으로 삽니다.  하루라도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가 경기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나의삶에 자리 잡도록 가까이하고,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적성숙은 결국 말씀이 좌우함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선수처럼 살라고 했을 때 생각할 다른 하나는 ‘면류관’ 곧 상급입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경기하는 것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에서 선수가 잘 달리면 면류관을 받습니다.  그것을 통해 바울은 우리가 인생의 경주를 경주하여 면류관을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에게 면류관이 있습니다.  승리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의의면류관, 시들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의지를 세워 달릴 때 내세의 상급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세와 함께 이 땅에서도 받는 면류관, 상급과 은혜가 있습니다.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처럼 복을 받는 자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 축복을 강조합니다.  분명 욥처럼 갑절의 축복이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열배의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말씀처럼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처럼천배의 축복이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 의지를 세워 나가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의지로 내적성숙을 이루어가면 반드시 하나님은 내세만이 아니라현세에서도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런 상급과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선수처럼 의지를 굳게세워 달려갈 길로 잘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농부처럼’입니다.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군사처럼, 선수처럼, 농부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지를 세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내적성숙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농부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에서 다시 2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는‘수고’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농부를 ‘수고하는 농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농부는 수고해야 합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수고를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농부하면 검게 그을린 얼굴과 밀짚모자, 허름한 옷, 호미와 곡괭이가 생각납니다.  이 모두 농부의 수고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런 농부처럼 수고해야 합니다.  결국 모든 일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땀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녕 기쁨으로 거두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수고로 됩니다.  기도의 열매는 기도해야 얻는 것입니다.  물론 구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입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응답은기도로 됩니다.  ‘구하라’ 이것이 우선입니다.  수고한 만큼 거둡니다.  나는 얼마큼 수고하고 있습니까?  신앙의 성숙과, 변화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얼마나 땀을 흘립니까?

농부처럼 산다는 말에서 생각하는 또 다른 의미는 ‘기다림’입니다.  농부는 기다림의 표상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수고했더라도 기다리지 않으면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성급하여 뿌린 것을 뽑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농부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을 기다립니다.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바로 그 기다림 속에서 열매를 거둡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의 삶을 농부에 비교합니다.  농부처럼 씨를 뿌리는 수고도 있어야 하지만, 농부처럼 때를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합니다.  내적성숙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평생 가는 길입니다.  이런 삶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거리경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삶을 통해 열매를 맺고 성숙하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주시리라”  이것이 우리의 결론입니다. 내적성숙의 길을 가는 자의 결론입니다.  내적성숙은 말씀, 기도, 예배, 치유, 순종, 주님사랑, 그리고 자기의지에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해 무엇보다도 우리 의지를 세워 나가야 합니다.  흔들림 없이, 중단됨이 없이,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이것을 추구하며 나아간다면 분명 우리가 성숙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길로 나아가기를 다짐하며 군인처럼, 선수처럼, 농부처럼 의지를 굳건하게 세우면 주께서 범사에 우리에게 총명을 주실 것입니다.  좋은 여건과 환경으로 이끄시고, 감당할 수 있는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내적성숙의 길을 향해 힘 있게 달려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